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스크랩]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鶴山 徐 仁 2005. 12. 26. 18:25

 

지난 번 글이 아직 어려운 감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 말씀을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쪼끔만 더 넓거나 깊게, 그러나 무쟈게 쉽게"를 글쓰기의 목표로 삼고 있는 제게, '글이 어렵다'는 말씀은 저의 게으름을 재우치는 말씀으로 새깁니다. 

 

어쩌면 글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해 봅니다.  그보다는 글의 내용이 좀 어려웠던 것이나 아닐까요?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의나 정의라는 개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입니다.  저는 다만 그걸 산뜻하게 정리해 두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느낌을 드렸다면 그건 그다지도 쉬운 개념을 풀어내느라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난삽하게 동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먼저 딱 제시해 놓고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1) 는 사적/개인적인 덕목이다.
(2) 정의는 공적/사회적인 덕목이다.
(3) 공의는 공적/법적인 덕목이다.

 

 

(1) 의(義)

 

의에 대해서 할 얘기는 지난 글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약간 중복이 되겠지만 요약하고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정의(正義)

 

지금 우리가 널리 쓰는 정의라는 말은 그 뜻이 다소 모호하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3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잉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윤리적/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공적인 덕목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잉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잉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편5절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장5절에서 잉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레미야서 23장5절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잉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사적인 덕목과 사회적/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띵가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예수님-성직자의 관계는 양-목자-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3) 공의(公義)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개념은 공의입니다.  이 낱말도 역시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 20세기초에 한반도에 들여온 일본식 한자인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저스티스'의 번역어였습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준비 운동 마무리

 

황봉구 선생님과 청랑 목사님의 대화에 살짝 끼어 들면서 (낄 데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한 채^^), 아무래도 그 주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의와 정의와 공의 개념을 나름대로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의와 정의와 공의는 모두 '옳음'이라는 덕목을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런 덕목이 자리를 잡는 위치가 제각각 다릅니다.  의(義)는 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수신 덕목입니다. 

 

정의(正義)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약속된 공통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덕목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한 덕목입니다. 

 

끝으로 공의(公義)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이지만, 그 적용은 정의에 비해 훨씬 제한적입니다.  명시적인 법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비추어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공식적인 심판 과정이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토론을 위해 준비한 개념들입니다.  충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의 이야기'에 뛰어들 수 있는 준비운동은 된 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출처 : 블로그 > 평미레 | 글쓴이 : 평미레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