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04. 에로티시즘이란?

鶴山 徐 仁 2005. 12. 15. 00:00
04. 에로티시즘이란?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498666

 

▲ 제라드 : 프시케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큐피드로부터 첫 키스를 받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녀는 큐피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무감각하고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얼어붙은 육체 속에서 차츰 깨어나서 성적인 욕구와 사랑에의 갈망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큐피드가 그녀를 육체적으로 잘 다루었기 때문이고 이에 대해 프시케는 정신적인 사랑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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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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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4] - 에로티시즘이란?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제 4주차 강의 주제는 에로티시즘입니다. 제가 이 주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에로티시즘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두 가지 사항이 논의될 것입니다. 하나는 용어(term)가 말해주듯이 에로티시즘은 우선 에로스 주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로스에 대한 이해는 에로티시즘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에로스가 개념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성립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강의에서 쾌락을 중심으로 한 섹스가 섹스의 본질에 대한 배반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상 에로티시즘은 그 배반에서 성립하는 것으로서 그 배반이 의미 있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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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로스의 의미

 

에로티시즘(eroticism)은 <에로스-이즘>이다. 그런데 이즘(ism)이란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인식과 행위의 보편적 원리로서 표방하는 하나의 통합적 인식 체계이자 행위 방식으로서, 그것은 스스로 표방하는 이념과 가치의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이를테면 rationalism이 ratio의 토대 위에서 성립하고 capitalism이 capital의 토대 위에서 성립하듯이, 에로스를 인식과 행위의 보편적 원리로 표방하는 에로티시즘이 에로스 위에서 성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에로티시즘이 에로스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에로티시즘이 우선 에로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 양상이 어떠하든 그 단초 또는 그 목적으로서 항상 에로스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 또는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출발점이자 준거가 되는 에로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그러면 에로스란 무엇인가?

 

아는 바와 같이, 에로스는 고대 그리스인의 산물이다. 에로스는 우리에게 하나의 신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아직 신격을 갖추기 이전 호메로스가 사용한 그 말의 용례를 보면 에로스는 보통명사로서 주로 강렬한 육체적 욕구를,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에 대한 강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였다. {일리아스}에서 파리스가 헬렌에게 매혹되고 제우스가 헤라에게 끌리게 된 원동력이 바로 에로스였던 것이다.

 

에로스는 성적 욕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로지 색정(lust)만을 의미하는 에피튀미아(epithymia)와 구별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가 에피튀미아와 결국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에 다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성적 욕구는 상대에 대한 친밀감을 발생시키거나 이미 있는 친밀감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데 (역으로 친밀감에 의해 성욕이 발생되기도 하지만) 에로스는 그 정서, 이를테면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사랑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에게는 에로스와 사랑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은 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는 필리아(philia)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성적인 것을 배제하는 필리아가 비록 때로는 성적 관계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에로스가 필리아와 같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용례들로부터 우리는 에로스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을 종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가 결코 에피튀미아나 필리아와 개별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지만 부분적으로는 에피튀미아적인 요소와 필리아적인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양극단에 에피튀미아와 필리아를 두고서 에로스는 그 사이에 펼쳐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상으로 말한다면 에피튀미아와 필리아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에피튀미아를 육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필리아를 정신적인 성격의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 중간에 위치한 에로스는 그것들의 혼합체로서 육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흔히 에로스를 <性愛>로 번역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에로스의 본질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번역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性愛>라는 용어에 대해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흔히 性愛를 하나의 개념으로 여겨 <육체적 또는 성적인 애정>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지만, 만일 그것이 에로스의 번역일 경우에는 그런 단일개념보다는 <性>과 <愛>가 각기 제 값을 지닌 두 의미로 구성된 복합개념으로 보는 것이, 위의 용례에서 보듯이, 오히려 에로스의 본질적 성격을 드러내준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에로스는 개념상 性과 愛, 즉 섹스(욕망)와 사랑의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리적으로 이것들은 서로 대립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대립은 상호 보완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대립과 보완이란 무슨 뜻인가? 대립이란 性과 愛가 서로 연속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모순적 관계임을 말한다. 모순은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性은 결코 愛에 도달할 수 없고 또한 愛도 性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완이란 性과 愛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측면을 말한다.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性은 쉽사리 愛로 진행될 수 있고, 愛도 또한 쉽사리 性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과 보완의 구조적 이중성은 에로스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이 이중성을 통하여 에로스의 운동성과 패러독스가 생산되는 것이다. 운동성이란 性과 愛 사이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상호 指向性을 말하고 패러독스란 그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녁에 이르지 못하는 Zenon의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 지향성이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또는 어렵다)는 失效性을 말한다. 그리고 이 지향성과 실효성의 작용으로 인하여 에로스에 관한 온갖 역동적이고 풍부한 질감의 감성(과 이성)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에로스의 이중적 본질은 신화적으로는 헤시오도스에 의해 최초의 신들 중 하나로 신격화 된 에로스가 신과 인간의 결합과 생식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나 헬레니즘 시대에 소년의 모습을 한 에로스가 황금 화살과 납 화살로 무장하였다는 착상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꿰뚫어 대표적인 인물로서 우리는 아마 플라톤과 사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향연}에서 디오티마로 하여금 에로스가 신 Poros(풍요)와 Penia(빈곤)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不死性과 可死性의 중간에 있는 자로 말하게 하고, 사포는 남아있는 단편에서 에로스를 <glykypikron>으로 (영어로는 sweet-bitter) 규정함으로써 에로스가 쾌락과 고통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두 철학자와 여류 서정시인의 이런 인식은 그 이후 철학과 문학에 있어 전개된 에로스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방향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뒷날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에 유지되고 있는 이중성도 그렇고,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너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고, 만일 네가 나를 미워하면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니카르코스)라든가 "Odi et amo"(I hate and I love, 카툴루스)라는 등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역설적 경구들도 모두 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에로스가 서로 대립하는 이중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에로스가 하나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모습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性과 愛 중에 하나의 모습만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무수한 편차가 있기 때문에 에로스는 그 편차에 따라 그 모습도 또한 무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로스가 존재하는 공간이 단층적 획일의 공간이 아닌 스펙트럼처럼 펼쳐진 다층적 복합적 공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性과 愛를 몸과 마음으로 대비하여 말하면, 몸 색깔이 강한 에로스가 있는가 하면 마음 색깔이 강한 에로스도 있고 또 그 둘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에로스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극적인 자태로 몸매를 과시하는 육체파 여배우가 에로스적(즉, 에로틱)일 수 있다면 독신의 경건한 삶 속에서 사랑에 헌신하는 고독한 종교적 수도사도 에로스적일 수 있고 그 중간에서 이도 저도 아닌 일반 대중들도 또한 에로스적일 수 있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평가한다면 오히려 性과 愛의 중간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반분하거나 또는 그 두 극단을 왕래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에로스가 될 것이고, 플라톤이나 프로이트처럼 性과 愛 중 어느 한 쪽을 배제하고 다른 한 쪽으로만 치닫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에로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것은 性과 愛가 바로 에로스 그 자체의 본질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에로스에 대한 好惡 또는 선악 문제는 그 자체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취향 문제로 귀결되거나 또는 에로스의 목적성이나 아니면 그 밖의 다른 가치와 연관되어 판단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에로스의 이중성과 그 의미는 에로스를 보편 원리로 표방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에로티시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에로티시즘이란 인간의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Bataille와 Paz의 규정이기도 하다. 인간이 성적 동물로서 성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인간의 성이 바로 에로티시즘이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성의 특징으로서 정신성, 도덕성, 개방성, 관능성을 들었는데, 그것들은 바로 에로티시즘이 갖추어야 할 속성으로서 그 성질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한 시대와 민족의 에로티시즘적 특성이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는 에로티시즘이 기본적으로 <에로스-이즘>으로서 에로스의 특성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논의는 우선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성을 가리키지만 인간의 모든 성이 곧바로 에로티시즘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으로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인간은 동물적인 면과 그것에 대비되는 비동물적인, 즉 인간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인간의 성에도 동물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렇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동물적인 성이 인간에게 발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의 성 곧 에로티시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적인 성은 동물에게 발생하였건 인간에게 발생하였건 그것은 여전히 동물적인 성에 불과할 뿐이다. 즉, 파충류의 뇌는 파충류에 있건 인간에게 있건 파충류의 뇌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이란 누구에게 발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발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의 성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성의 기능이 생식과 쾌락으로 구분될 때, 생식은 동물과 공유하는 기능이지만 쾌락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기능이다. 쾌락은 직립보행의 결과 인간의 생식에 위기가 닥치자 그 보전책(補塡策)으로서 자연이 인간에게만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의 기능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이 전적으로 그 기능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에로티시즘이 적어도 생식의 측면에서 성립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랑우탄이나 돼지의 에로티시즘 심지어 바퀴벌레의 에로티시즘도 가능하다고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자식 낳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던 전통적인 가정에서 에로티시즘이 생산되기는커녕 대체로 있는 에로티시즘마저 결혼이나 출산과 더불어 폐기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내가 아닌 매춘부를 중심으로 에로티시즘이 형성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기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쾌락이 에로티시즘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보았듯이, 생식이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주기능이라면 쾌락은 비본질적이고 주변적인 종기능인데 인간의 성은 바로 그 종기능을 극대화하면서 발전하여 왔고, 그 점에서 인간의 성은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배반이고 자연에 대한 반란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에로티시즘이 일종의 자연에 대한 거역정신이 되고 또 심리적인 문제나 문화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그것이 쾌락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로티시즘이 성적 쾌락과 동반한다고 하지만 모든 성적 쾌락을 다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할 수는 또한 없을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구분을 전제하는 우리의 논의에서 볼 때, 오히려 모든 성적 쾌락이 좋은 에로티시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올바른 표현일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 "성적 쾌락"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性的 快樂"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즉 다만 육체적 성 기관 등을 매개로 한 쾌락이냐 아니면 성의 본질과 관계된 쾌락이냐 따라 에로티시즘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일 前者의 경우라면 모든 육체적 관계가 다 에로티시즘이 될 것이고 後者의 경우라면 (좋은) 에로티시즘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생식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前者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럴 경우엔 예컨대, 매춘과 강간도 에로티시즘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성이 완전히 성기의, 나아가 육체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성적 쾌락은 성적 본질과 관련된 쾌락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그러한 쾌락은 임신을 전제로 한 섹스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러한 섹스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또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좋은) 에로티시즘이 형성되기 위해 과연 성적 쾌락은 어떻게 성의 본질적 기능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바꿔 말해 좋은 성적 쾌락은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은 물음이다. 위에서 오직 육체를 매개로 한 성적 쾌락이 거부된 것은, 그것이 나쁜 동성애의 경우처럼 성의 소외와 가치 전도를 끊임없이 가속화하고 내용상 종국에 가서는 쾌락을 위한 쾌락으로 전락되어 결과적으로 상대의 성(육체)을 수단화하고 비인간화하기 때문이다. 육체는 육체를 넘어선 목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쾌락은 생식을 <위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쾌락이 좋은 쾌락이 되기 위해서는 다름이 아닌 그것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섹스가 어떻게 항상 생식을 위한 섹스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생식이 오직 생물학적으로 한 생명체의 생산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 인간에게 성적 쾌락을 생식과 연결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길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생물학적 한계에서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는 비생물학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은유(隱喩 / metaphor)의 세계이다. 생식이란 생명을 가진 한 개체를 생산하는 일이다. 그러나 비생식적 섹스를 통해 자신들과 분리된 그러한 생명체를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성의 주체들이 자신들과 분리되지 않은 (생명체의 은유로서) 생명성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으로 삶이 활기를 갖게 되고 생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며 존재의 지평이 확대되는 등 자신들의 생명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어차피 생식이 한 개체의 죽음을 극복하고 그것을 지속하려는 삶의 의지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라면 개체에게 생명력을 주고 존재 지평을 넓혀주는 것도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생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이 언제나 생식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은유를 통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은 은유의 세계이다. 은유는 "한 사물의 양상이 다른 사물로 옮겨져서 두 번째의 사물이 마치 첫 번째 사물처럼 서술하는 것", 그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실의 세계가 아닌 언어와 상상의 세계이고, 또 행동의 세계가 아닌 의미와 이해의 세계이다. 따라서 은유는 직접적으로 어떤 행동을 유발하지 않고, 행동은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이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에로티시즘의 하나의 특징이 된다. 만일 어떤 영화가 관객을 흥분시켜 어떤 성적 행동을 직접적으로 부추긴다면 그것은 외설일망정 예술이나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작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은유로 작용하는 에로티시즘이 주는 메시지는 항상 간접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석의 여하와 해석자의 능력에 따라 에로티시즘이 되기도 하고 또 포르노그라피가 되기도 한다. 포르노그라피의 특징은 성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고 말초적인 자극을 가하여 직접적으로 행동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같은 나신상(裸身像)을 보고서도 사람에 따라 반응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것을 감상한 자의 이해와 해석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해의 주관성은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주관성은 필연적으로 실상과의 괴리를 발생시키게 된다. 일상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괴리들은 법이나 폭력으로써 어떤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 이해의 간격을 메우게 된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서 발생하는 괴리는 행동이 아닌 이해 차원의 유머로써 채워지는 것이다. 유머 정신은 에로티시즘의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이 부재한 물리적 세계에서는 에로티시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물리적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은유의 세계를 만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가장 탁월한 은유 중 하나인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빛과 소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의 공간이 결국 심리의 공간과 문화의 공간과 만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에로티시즘을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심리와 인간의 문화에 대한 이해이다. 에로티시즘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