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05. 현대사회와 에로티시즘

鶴山 徐 仁 2005. 12. 15. 00:02
05. 현대사회와 에로티시즘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570240

 

▲ 워터하우스 : 큐피드와 프시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시어머니 비너스의 질투로 그들은 헤어지고 프시케는 굉장한 고초를 겪는다. 그 중에서도 비너스가 '미의 상자'를 주면서 지옥의 여신 페르세포네에게 가서 화장품을 받아 오라고 명령을 한다. 그런데 절대 그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그 상자를 열어 보지만 도리어 지옥같은 잠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하는 남편 큐피드를 만나기 위해서 겪는 고초이다. 프시케(Psyche)는 영어로는 '정신'이라는 뜻이고 큐피드는 에로스(Eros)라는 뜻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육체적인 사랑이 정신적인 사랑과 만남으로써 참사랑이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를 그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즐거움 (Plesure)', 즉 행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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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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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5] - 현대사회와 에로티시즘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제 5주차 강의 주제는 현대사회와 에로티시즘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지난주 주제인 에로티시즘과 별개인 것이 아니라 사실상 연속된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전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다 있을 터인데, 그것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이 주제를 말하기 앞서서 남녀의 에로티시즘의 차이와 에로티시즘의 종류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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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녀의 에로티시즘 차이에 대하여

 

인간의 성은 쾌락을 중심으로 진화한 결과 에로티시즘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에로티시즘이 쾌락의 존재 이유를 계승·확대·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로티시즘이 바로 그 쾌락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쾌락은 種을 유속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쾌락이 자기 존재 이유를 충족하기 (즉, 善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생식과 관계해야 하는데, 인간의 섹스가 항상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그 목적을 충족할 수 없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생물학적 한계 상황에서 그 방편으로 등장한 것이 은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리적 존재이지만 또한 물리적 이상의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상상력의 공간이다. 그 상상력의 공간에서 생물학적 개체의 생식은 생명적 가치의 생산으로 환원되며 쾌락은 그렇게 은유화된 생식을 추구함으로써 계속해서 자기 존재 이유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은 은유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은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성은 단조로움을 넘어 다채롭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이 앞에서 설명한 에로티시즘이 성립하게 된 과정이다. 이에 의하면 개인은 물론 각 시대와 민족이 각기 은유의 능력에 따라, 다시 말하면 상상력의 정도와 그 방식에 따라 에로티시즘을 달리 표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점에서 남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남녀의 경우에는 이런 은유의 차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에로티시즘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에로티시즘은 쾌락에서 성립하고 그 쾌락은 생식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남녀의 경우에는 바로 그 생식의 전략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생식의 전략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쾌락에서 차이가 나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문화적으로 에로티시즘의 태도에서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식 전략에 차이가 나는 것은 생식에 참여하는 방식에서, 곧 그를 위한 육체적 조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고, 생식에 참여하는 방식에 차이가 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차이에서 기인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자와 난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보부아르의 지적대로, 정자와 난자의 관계가 전적으로 남녀의 모든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거기에 함축된 상징성이나 의미가 매우 가치 있고 또 어떤 결정적인 영향력을 배제할 수도 없겠지만 여기서의 논의는 그런 전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앞서 말한 논리의 토대 위에 남녀의 에로티시즘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에 국한하기로 한다.

 

정자와 난자의 수정 과정을 보면 우리들은 정자의 구조의 단순성과 기능의 효율성에 감탄하게 된다. 올챙이 모양을 한 정자는 23개의 염색체를 간직한 머리와 물결운동을 하는 꼬리와 그 사이에 물결 운동하는 데 필요한 약간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몸통(중편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직 그것뿐이다. 정자는 더 이상 어떠한 여분의 에너지도 또 수정란을 위한 어떠한 영양분도 갖고 있지 않은데 그런 것들은 몸을 무겁게 하여 가능한 한 빨리 난자에 도달하려는 운동을 방해할 뿐이다. 반면에 자기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정자보다 100배나 큰 난자는 핵질 외에 세포질도 지니고 있어 접합 이후의 수정란의 모든 양육과 성장을 책임지고 있다. 한마디로, 정자의 역할은 수정에 그치는데 반하여 난자의 역할은 그것 외에 수정 이후의 모든 것을 떠맡는 것이다. 그만큼 생식에 있어 난자는 정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투자하는 셈이다.

 

그런데 정자와 난자의 이러한 양상은 그대로 남성과 여성에게로 이어진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정자가 남성적 주체를 형성하고 난자가 여성적 주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간단히 말하면 투자도 많지 않으면서 손해볼 것이 없는 정자의 주체는 가능한 한 많은 정자를 뿌리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반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이후에 일어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난자의 주체는 정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성 선택이 여성에 의해서 주도되어야 한다는 생물학적 논거가 되기도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에로티시즘에 대한 남녀의 본질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알베로니는 남녀의 에로티시즘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해 남성이 포르노그라피라면 여성은 핑크로맨스라고 규정한다. 남성은 궁극적으로 섹스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데 비해 여성은 섹스 자체보다도 섹스 외의 것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것인데, 그 차이는 결국 위에서 말한 생식에 참여하는 방식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의 특성들도, 이를테면 남성의 성적 흥분은 시각적 즉각적 일시적이고 성감대는 성기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오르가즘이 빠르지만 단편적이고 행동이 은폐된 공간을 지향하고 취향이 성적 대상으로서 미인을 좋아하지만, 반면에 여성의 성적 흥분은 촉각적 완만하고 지속적이고 성감대는 전신에 산재해 있으면서 오르가즘은 더디지만 다층적이고 행동이 열린 공적인 공간을 지향하며 취향은 미남보다는 미인을 취할 수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속성들도 이 차이와 연관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성적 갈등과 왜곡은, 대체로 이러한 남녀의 에로티시즘의 차이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고 그 무지가 갈등을 심화시켜 질병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체로 권위 의식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이 현상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보려하지 않고 또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성은 본질적으로 차이를 전제한 차이 속의 대화이고 그 차이는 개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개성이 결과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은 소비에 불과할 뿐 창조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차이가 인정되지 않은 성은 결과적으로 서로의 참여에 의한 보완적 성취라기보다는 대개 일방의 타방에 대한 강압이나 또는 예속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고, 그리하여 연극효과를 만들어 내는 권력처럼 성도 주로 남성에 의해 그 효과가 강요되고 또 그것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남성이 성적 파트너인 여성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여성의 틀을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또 자신의 경우에도 자기가 생각한 왜곡된 것들을, 대체로 야만성이나 폭력성을 남성성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섹스가 거듭될수록 더욱 공허해지고 불감증만 양산하는 것은 그 때문이며, 결국 그 부조화의 틈을 비집고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 소위 '제비'라는 사회적 집단이 기능을 하게 되고 그래서 불륜이라는 비도덕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에로티시즘의 차이가 차별로 인식될 때 성은 생산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남녀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평가는 남성은 적극적, 능동적인 반면에 여성은 소극적,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만큼 부지불식간에 차별성을 나타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성에만 국한되지 않은 이 평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사람들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라는 생물학적인 현상으로도 그것을 쉽게 실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흔히 남자를 나비에 비유하고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단지 움직인다고 해서 능동성과 적극성을 부여하고 또 움직이지 않다고 해서 그 반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동물 중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본디 생식과 그를 위한 섹스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본질적으로 모두 그 자체의 죽음과 소멸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행위에 참여하는 누구는 능동적이고 또 누구는 수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될 법한 말인가. 누구나 다 단호한 실존적 결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무겁고 또 자족적인 난자가 움직일 수 (또 그럴 필요가) 없듯이 몸이 가볍고 또 자족적이지 않은 정자는 가만히 있을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의 한계 내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한계의 차이만큼 다르게 나타날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 남녀의 에로티시즘은 생식에 참여 방식의 차이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과 남녀간의 성의 갈등은 그 차이에 대한 무지와 왜곡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물론 은유의 능력과 경향의 차이에서도 그것이 유래하겠지만 남녀의 경우에는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제 에로티시즘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에로티시즘의 종류에 대하여

 

성이 있는 곳에, 그리고 성의 담지체 및 확장자로서 육체가 있는 곳에 에로티시즘이 발생한다. 성이 있다는 것은 생식 곧 생산이 있음을 의미하고, 나아가 그것에 동반된 육체적 쾌락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적 생식만이 있었던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육체의 에로티시즘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엄연히 하나의 실체로서 정신과 함께 영혼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육체처럼 스스로의 생식을 지향하는 생명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과 영혼 각각의 에로티시즘에 대해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감성의 에로티시즘도 가능하겠으나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중간에 있는 질감의 존재로서 상대적으로 실체성이 약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육체의 에로티시즘정신의 에로티시즘 그리고 영혼의 에로티시즘 이렇게 세 종류가 있지만, 그들이 각각 어떠한 성격인가를 논하는 것은 장황한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들이 각각 각자의 실체성의 결에 따라 독자적인 특성을 드러내면서도 상호 연결되어 있지만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있음으로 해서 육체의 에로티시즘이 성립하듯이 정신과 영혼의 에로티시즘의 경우에도 그것을 구현하고 성립시키기 위한 정신과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신과 영혼이 잠재적 또는 당위적 존재로서 단지 요구되는 차원이 아니라 사실적 또는 현실적 존재로서 참으로 실재해야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이 없을 때 정신과 영혼에 관한 온갖 기도는 한갓 하나의 허구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입으로는 누구든지 다 정신적 사랑 또는 영혼의 사랑을 열렬히 말하고 추구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누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성을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성을 향유하기 위하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세상에 나온 이후 사춘기까지 계속 육체를 키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지금 젊은이들은 최상의 육체적 조건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어떤 점에서 가장 좋은 육체적 성을 향유할 수 있는 최상의 시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젊은이들의 육체는 앞으로 쇠퇴할지언정 결코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이렇게 아름답고 강인한 육체를 가진 젊은이들은 그 육체를 가지고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그 육체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육체는 우리 부모가 가장 아름답고 강인할 때 그 씨앗이 심어졌듯이 나도 나의 부모처럼 육체의 지속을 위해 하나의 육체적 씨앗을 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 뿐인가? 육체는 오직 육체적 성을 향유하기 위해서 즉 섹스를 하기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비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질문을 추적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하나의 실체로서 정신을 만나게 되고, 육체가 아름답고 강인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다름 아닌 정신의 씨앗을 심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아름답고 강인한 정신은 또한 건강한 영혼의 잉태와 성장을 위해 필요한 조건임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태도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데, 육체의 에로티시즘과 더불어 정신의 에로티시즘과 영혼의 에로티시즘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육체의 그것만으로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놓인 삶의 강을 온전히 효과적으로 횡단할 수 없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태어남이 육체를 입는 것이고 죽음이 육체를 벗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의 과정도 그것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에는 육체로 시작하지만 다음에는 정신으로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영혼으로 갈아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름답고 강인한 육체는 오직 그 육체적 생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생식을 위한 정신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다만, 육체에서 벗어날 때라야 비로소 육체의 용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있다는 점이 하나의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속적인 이행과 초월은 에로티시즘의 본질적 측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육체의 에로티시즘은 정신의 에로티시즘으로, 그 다음에는 다시 영혼의 에로티시즘으로 나아가야 하고, 정신의 에로티시즘은 육체의 것으로 그리고 영혼의 에로티시즘은 육체와 정신의 것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잠시 현실로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이행과 초월을 모르는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궁색하고 참담한 것인가를 충분히 목격하게 된다. 일례로, 한국 남성의 정력 숭배 의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정력에 좋다는 동물들이 살아남지를 못한다 한다. 과장이길 바라지만 우리 주변에 그렇게 흔하던 까마귀가 거의 사라진 것을 보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육체적 에로티시즘만을, 그것도 잘못된 형태로 추종한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다. 또한 종교는 탄생 자체가 지극히 에로틱한 성격을 지니는 것인데도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강조하고 추구한 나머지 거기에는 획일과 권위와 배타의 함성만이 요란할 뿐 정작 생명을 위한 진정한 종교적 에로티시즘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명경지수(明鏡止水)도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에로티시즘도 결코 정체되지 말고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흐름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3. 현대 사회의 에로티시즘적 조건에 대해

 

이제 에로티시즘에 대한 마지막 논의로서 현대 사회에 있어 에로티시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겠으나, 여기서 말하는 현대 사회란 엄밀하게 규정된 개념이 아니라 대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이를테면 현대와 탈현대의 특성들이 뒤섞여 있으면서 초기 산업사회의 성격마저 여전히 남아있는 오늘날과 같은 그런 사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결국 그러한 요인들이 에로티시즘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사회가 한편으로는 에로티시즘의 발전을 위해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또한 매우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에로티시즘을 위해 현대 사회가 지닌 긍정적인 측면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대 사회에 와서 개인의 자유가 더욱더 신장되었다는 점이다. 에로티시즘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그것은 성적 내지는 육체적 쾌락이 자신의 배타적 독점적 성격으로 인하여 타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보다는 단절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개인적 자유를 가졌던 개인이나 계급만이 사실상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가졌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산업사회 이후 계속 추구되었던 개인의 자유가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라는 확실한 이념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권리는 계속 확장되어 왔는데,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자유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더욱 확고한 신뢰감을 가져왔고, 그 결과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가 더욱더 증대되리라는 것을 전망케 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는 지금 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확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위에서 말한 자유가 신장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다.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증대는 그 정신적 조건을 충족하는 것으로서 학문과 교육이 없는 곳에서 개인의 자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사실은 그 역도 성립한다). 자유는 그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증대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의 실상과 이념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 결과 무지와 공포와 죄책감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성욕이 있고 그 성욕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은 결코 도덕적 또는 종교적으로 죄악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의학과 생물학과 심리학은 성적으로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하고 당당하게 한 일등공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물질적 조건으로서 경제적 풍요와 정의를 들 수 있다. 빈곤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발생할 수 없는 법인데 산업사회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빈곤의 문제가 획기적으로 해결되었고, 따라서 성적 자유의 한 형태로서 에로티시즘이 크게 살아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본디 사회적 상태에서 성은 권력과 재화를 따른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정치적 권력자나 경제적 권력자가 성을 소유하거나 지배했고, 그 현상은 물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지국가 개념에서 보듯이 현대 사회는 여하히 그 권력과 재화의 집중을 막아 권력과 재화의 분배적 정의를 이루느냐 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도덕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 에로티시즘이 (문화 시장에서) 갈수록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나아진 경제적 정의 때문인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대중매체의 혁신을 말할 수 있다. 특히, 문화 현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기능하려는 에로티시즘에게 대중매체의 전달력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사실 그간 에로티시즘이 개인의 기호적 차원을 뛰어넘어 그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TV나 영화 등 영상 매체의 흡인력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대중매체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영상매체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개방성과 폐쇄성을 동시에 갖춘 무한대의 가상 사이버 공간이 인터넷을 통해 형성됨으로써 이제 에로티시즘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앞으로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도 인터넷의 발전 중에 있고, 그 발전 방향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의 장래가 그 어떤 것보다도 바로 이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의 신장, 학문의 발전과 교육의 증대, 경제적 풍요와 정의, 그리고 인터넷의 등장 등이 현대 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의 발전을 위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에로티시즘에 불리하게 작용할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다른 요인들을 들먹일 필요가 없이 앞에서 언급한 그 긍정적 측면들이 바로 양날의 칼처럼 이번에는 에로티시즘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요인들로 힘을 얻은 에로티시즘적 현상이 사회가 허용하는 한계치를 넘어서면 곧 그러한 것들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이 인간이 지닌 것 가운데 가장 파괴적이고 맹목적인 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그것도 그러한 요인들 때문에 더욱 극단적으로 침해하는 현상들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성에 관한 한, 가장 골치 아픈 고전적인 문제가 아니던가. 더욱이 경제주의가 하나의 신조가 되고 육체가 숭배되기에까지 이른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에로티시즘에 긍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핵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육체의 에로티시즘이 정신의, 그 다음엔 영혼의 에로티시즘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논리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육체적 에로티시즘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예비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이어줄 정신적 에로티시즘과 영혼적 에로티시즘을 위해서는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이렇다: 현대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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