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03. 성(섹스)의 이원성

鶴山 徐 仁 2005. 12. 14. 23:58
03. 성(섹스)의 이원성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467863
 
레니 : 희랍신화에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신들이 적잖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동물적인 습성이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우리에게는 동물적인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것에만 의존하는 인간은 사실상 미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미숙한 사람이 하는 사랑은 '미숙한 사랑'이고 이런 미숙한 사랑을 사랑의 이상형이라고 한다. 그림은 헤라클레스의 부인인데 반수반인인 네수스가 그녀를 납치해가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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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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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3] - 성(섹스)의 이원성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성의 이원성(二元性)입니다. 이 주제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이 본질적으로 남녀 사이에서, 즉 그 이원적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원성이란 비단 남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라는, 따라서 성도 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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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은 본질적으로 남녀 사이의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성과 여성 중 그 하나로 태어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남성과 여성 외에 제 3의 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남성과 완전한 여성이란 각각 성기의 형태와 성선(性腺)의 구조 그리고 성염색체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이따금 외성기(外性器)의 형태상 남녀의 성기를 함께 가지고 있는 어지자지나 외성기와 성선이 불일치하는 반음양(半陰陽), 또는 클라인펠터 증후군이나 터너 증후군과 같은 염색체성 반음양 등이 있는데, 그것은 제 3의 성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남성과 여성의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한, 즉 생식력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형태인 것이다. 만일 성의 존재 이유가 사람들이 말하듯이 유전적 재조합을 위한 것이라면 성이 가급적 여러 개 있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재조합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훨씬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물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자연계에는 암수 두 성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히 예외적인 점균류粘菌類를 제외하면) 유성생식을 하는 種들에게는 왜 암수 두 성만이 진화하게 되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이 생식에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섹스)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생식할 수 없는 그들을 상호 보완하게 하는 하나의 관계적 기능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만일 애당초 자연에 유성의 존재자가 없었고 또 그 성이 암컷과 수컷이 아니었다면, 그들 사이에는 물론 섹스라는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섹스는 기능상 생식과 쾌락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당연히 생식이다. 다 알고 있듯이 생식은 오직 성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데 반하여 쾌락은 다른 자연적 및 사회적 본능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쾌락은 본능의 충족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쾌락은 섹스의 주인공이 아니라 생식을 위한 보조적 방편으로서 진화된 것이다. 따라서 생식이 성의 본질적 기능으로서 이해될 때 섹스는 오직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갖게 되고, 그 결과 생식을 위한 하나의 가치로서 여성은 더욱 여성답고 남성은 더욱 남성다워야 한다는 하나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고 있다. 그것은 정자다운 정자와 난자다운 난자의 결합이 최상의 수정체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론의 단순함에 오히려 당황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의 이원성이다.

 

그러나 생식에 토대를 둔 성의 이원성이 주장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항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인간의 섹스가 반드시 생식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쾌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에 인간이 바로 성적 동물로 정의되었듯이, 인간은 이성간의 섹스를 통해서 생식보다는 그 종적 기능인 쾌락에 더욱 치중해왔으며, 더욱이 그 쾌락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성간의 관계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뛰어넘어 동성간의 섹스까지도 (생물학적 원리에 대비하여 이는 문화적 원리라 할 수 있다) 추구하여 왔다는 점이다. 전자는 성의 이원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그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원성 관계 자체가 무너진 경우지만, 전자의 극단이 후자를 결과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과 인간의 괴리가 이보다 더 분명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섹스는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배반이고 자연에 대한 반란이며, 결국 의도된 가치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이 실상이 이러한데도 과연 성의 이원성이 유효할 수 있을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의 이원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의 이원성은 존재의 형성 차원에서 원리 또는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에 성의 본말이 전도된 현실이나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사실들이 성의 이원적 당위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의 이원성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행한 섹스의 행태들을 토대하여 귀납적으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규범적·당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유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거짓말하지 마라"는(즉, 참말의) 원리가 부정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말에서 보면 거짓말은 하등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짓말은 언제나 존재한다. 의당 없어야 할 무가치한 것이지만 실제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이 참말의 기능성하고는 다를지라도 아무튼 어떤 기능성을, 그것도 참말과의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는 모종의 기능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 기능성이 무엇이고, 기능성의 측면에서 거짓말과 참말의 역할이 어떻게 구분되며 또 그 둘은 어떤 관계에 놓일 수 있는가는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고, 또 이 점에서 거짓말도 기능성이 있는 좋은 것과 없는 나쁜 것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거짓말이 있음으로 해서 참말이 부인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존재 이유가 참말과의 관계에서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말이 먼저 있었고, 우리는 항상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성의 비이원성 문제를 함축하고 있으니, 본말의 전도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것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성의 비이원적 관계는 동성애이다. 그런데 이성애의 원리적 측면에서 보면 동성애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고, 평가한다면 악으로밖에 규정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동성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은 크게 생물학적 선천설과 문화적 후천설로 나누어지지만, 또 유전적 요소와 문화적 환경을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이나 다른 동물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인과발생학적으로 동성애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힘으로써 결과적으로 동성애가 편견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애와 대등한 성의 한 양태로서 승인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동성애는 이성애하고는 관계없이 존재하고 또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애가 섹스의 기본적 형태라는 관점에 볼 때, 비록 동성애를 다양성의 한 형태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원리상 그것이 기본형으로부터 파생된 변형이 아니라 독자적인 형태라는 점을 수용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무엇이 곤란한가는 덮어두고 지나가자. 여기서 다시 앞의 예를 들면, 거짓말이 승인될 경우에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승인된다기보다는 거짓말을 하게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지금 참말과 관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예에서 '거짓말'이라는 낱말의 부정적 의미에 좌우되지 말고 그것이 참말의 전복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람). 이 입장은 동성애에 대해 바로 동성애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또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애하고 관계에서 어떤 기능성을 얼마만큼 갖느냐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스펙트럼 영역을 갖게되는 것이다.

 

기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 보완적 기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성애가 충족하지 못하는 것을 충족시킴으로써 동성애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경우, 생식력이 없는 동성애는 당연히 쾌락의 측면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쾌락의 극대화에서 그 한 방편으로서 동성애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동성애는 생식이 배제된 이성애와 결과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인식 때문에 동성애를 마치 이성애를 행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육체의 토대 위에서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동성애를 이성애처럼 해서는 안 될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모방하려는 이러한 동성애 때문에 대체로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생식도 배제한 채 오로지 쾌락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성의 본질을 더욱 철저히 전복하고 오럴 섹스나 애널 섹스 등을 통해 성행위를 왜곡하는 것이려니와 육체의 토대 위에서 추구되는 동성애의 행태라는 것들이 이성애를 통해서도 성취할 있는 것(기능)들이어서 결과적으로 이성애를 성으로부터 추방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애의 추방이란 결과적으로 가정에 대한 위기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 동성애는 이성애를 보완하기보다는 경쟁적 관계에 빠지게 되고, 가치의 전도와 추방의 위협을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도 적어도 가치나 심리의 차원에서) 느끼게 된 이성애자들은 더욱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몰아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동성애가 긍정적으로 수용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성의 생식 차원처럼, 바꿔 말하면 기본적으로 존재를 증가시키려는 성의 본질적 기능에서 보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만일 그 결론이 타당하다면, 동성애는 어떻게 그것을 행할 수 있는가?

 

앞서 인간이 성적 동물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결과적으로 두뇌의 발달에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D. H. 로렌스가 "인간의 성은 두뇌이다"라고 한 말도 결국은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커짐으로써 쾌락의 역할이 증대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과연 두뇌의 발달에 함축된 핵심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요체는 한마디로 정신의 세계가 인간에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이 그토록 다양하고 다채롭게 전개될 수 있고, 또한 단순한 육체적 행위의 단계를 뛰어넘어 정신적인 행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육체의 능력이 아니라 언어와 상상과 감성과 이해의 세계를 제공하는 바로, 아니 오히려 더 정신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긴 진화의 결과 이제 정신은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육체가 없는 인간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듯이 정신이 없는 인간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인간됨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이성애에 작용하고 또한 이성애가 그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애는 육체를 생산하듯이 또한 정신도 생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성이 반드시 정신을 생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의 생산성을 지향하는 그 본질에서 보건대, 섹스에 긴요한 정신적 존재의 생산성에 어떻게 관계하느냐 하는 것이다. 경험으로 보아 이성애가 육체적 생산보다도 오히려 정신적 생산을 성취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주어진 기능이 육체적 생식인 한, 비록 정신적 생산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그 육체적 생식성을 제약하거나 또는 그것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이성애는 정신하고 철두철미한 관계를 맺을 수도 없거니와 또 맺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플라토닉 러브'의 비극성은 이것을 위반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자, 그러면 섹스는 정신의 생산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인가? 동성애는 이 물음을 비집고서 탄생하는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전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요컨대, 동성애는 정신적 생산성을 결핍한 이성애의 생식을 보완해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많은 논란거리들을 숨기고 있지만, 두 가지만을 말하기로 한다. 하나는 이것이 동성애의 비육체성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는 그 동기나 목적에 있어 항상 정신의 생산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요구라는 점이다. 비육체성에 대한 엄격한 요구라기보다 정신적 생산성에 대한 요구로 해석하는 것이 동성애의 현실적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무난할 것이다. 뭉뚱그려 말하면, 이성애에서는 육체가 主이고 정신이 從이라면 동성애에서는 거꾸로 정신이 主이고 육체가 從이 될 것이다. 섹스의 좋고 나쁨은 이 주종관계(主從關係)의 상태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성애를 하기 위해서는 (없는) 정신을 만들고 (또 허약한 정신은 키우고) 정신이 없다면 아예 동성애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체적 관계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출발점과 지향점에서 정신을 배제한 채 오로지 육체만으로 육체만을 추구하는 동성애는 결국 육체적 정신적으로 존재의 무의미성만을 양산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성에 관한 한 육체적 생산성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정신적 생산성을 추구하든지, 아무튼 이 둘 중 하나는 붙잡어야 할 것이다.

 

동성애가 이 논의에 끼어 든 이유는 비이원성의 이원적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섹스가 본질적으로 이원성의 원리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성애의 생식적 결핍성을 보완하는 데 동성애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비록 동성애에 대한 논의는 불충분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목적은 일단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번 되짚어보기로 하자.

 

우리는 성의 기능을 생식과 쾌락으로 구분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애를 중심으로 한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여성의 역할을 염두에 둔 성에 대한 인식으로 여기에는 사실 동성애를 위한 자리가 별로 없다. 위에서 생식을 폐기하고 쾌락을 극대화되면 동성애와 만난다고 하였지만 거기에는 동성애가 성의 본질로부터 이탈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들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자 한다면 우선 성의 기능에 대한 인식의 교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크게 보아 두 종류의 본능, 즉 자연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이 있다.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란 자연 상태에서 다른 동물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 본능과 사회 본능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食慾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개체를 보존하려는 자연 본능이 되지만 또한 그 욕망을 공유케 함으로써 사회적 존재 기반을 강화하는 (곧 사회성을 증대하는) 기능도 한다. 거꾸로 사회적 본능인 所有慾의 경우도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욕의 경우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성적 관계를 통하여 종족 보존이란 (자연 본능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또한 그것을 매개로 사회 본능을 충족함으로써 사회적 존재 기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의 기능은 이제까지 것하고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즉, 성은 자연 본능이 되는 (육체적) 생식과 사회 본능이 되는 (정신적) 친교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쾌락은 두 기능에 다 從적인 것으로서 들어있어 각기 그 특성에 맞게 제 몫대로 작용하겠지만, 食의 기능으로 쾌락을 들 수 없듯이 또한 성의 기능으로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분류로 보면 동성애의 위상이 분명해질 수 있는데, 이성애가 생식과 연결되는데 비하여 동성애는 친교와 연결된다. 물론 이 분류에서도 친교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생식이 여전히 본질적인 기능성과 의미를 갖는다. 그 결과 생식과 쾌락으로 구분될 때하고는 다르게 친교가 생식에 대한 종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는 이성애에 대해 선택적인 위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성적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 이성애로도 또는 동성애로도 선택하여 나갈 수 있고, 아니면 그 둘을 병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분류의 타당성과 효용성에 대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기 바란다.

 

이제 성의 이원성을 위한 조건으로서 두 번째 사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섹스에서 이원성을 원리로 채택하게 되면 그것의 실천 원리로서 "여성은 (더욱) 여성답고 남성은 (더욱) 남성다워야 한다"는 행동강령이 정언명제로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데, 그 이유는 이원성이 기본적으로 생식을 위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의 경우 이 원리를 적용하면 정자는 더욱 정자다워야 하고 난자는 더욱 난자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양질의 좋은 수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인데, 만일 정자가 정자답지 않고 또 난자도 난자답지 않다면 그것들의 접합이 결코 좋은 수정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남녀간의 성도 이치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일단의 여성주의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성을 왜곡하고 억압한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성 차별적 사유 형태라고 지적한다. 그간 "남자답다"와 "여자답다"란 표현은 어떤 가치를 사실적으로 또는 당위적으로 지칭하는 언어 본래의 기능보다는 맹목적으로 남자를 높이거나 여자를 낮추는 의식과 가치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고정불변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여겼던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것들이 사실은 양성성을 갖춘 인간이 상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임이 드러난 이상 "남자답다"거나 "여자답다"와 같은 성차별적 표현은 무의미한 것으로서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와야 한다"는 여기 주장과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반론 사이에는 뭔가 큰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튼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다와야 한다"는 주장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이 차별이 아닌 차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별이 사회적 맥락 가운데 이해관계의 대립을 통해 한 쪽이 다른 쪽을 의도적으로 폐기함을 기도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식을 위한, 따라서 새 것을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그리고 그 결과 서로 협동을 요구하는 차이성이라는 것이다. 창조는 언제나 이질적인 요소의 혼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답다")이라도 어느 맥락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무지와 편견의 결과 생물학적 차이를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 수용한 것이 고대인의 오류였다면, 학문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오류가 아직까지도 어디에서나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의 더욱 엄청난 오류인 것이다. 그로 인해 차이에 대한 인식적 공간이 매우 좁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차이가 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양성성에 대해 말하면, 그것은 특히 최근에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의 행동 패턴이나 심리적 취향 또는 기질을 해석할 때 대두되는 핵심적 개념이 되었다. 그 요체는 사람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 고정된 성질이나 가치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조건만 주어지만 어느 것이나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자들이 적극 지지하는 이 이론은 그 결과의 정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혹시 제한된 데이터에 근거한 통계를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너무 확대 재생산하지 않나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것을 남녀 어느 개인을 놓고 보면 충분히 타당한 설명이 되겠지만 남녀 전체를 평균으로 놓고 말하면 이른바 남성성은 남성에게 그리고 여성성은 여성에게 두드러진다. 더군다나 이 문제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확 달라진다. 적어도 생물학적으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런 존재가 있다면 생식의 비효율성 때문에 진화에서 낙오하거나 도태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생물학이 발견한 최적의 존재 방식은 정자와 난자와 같은 (또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그 방식뿐이다.

 

생물학과 정신분석학의 차이는 인간을 보는 방식의 차이이다. 대충 말하여 하위 학문인 생물학이 자연의 시각이라면 상위 학문인 정신분석학은 문화의 시각이다. 그러나 이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어느 한 입장만을 고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어느 한 관점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어느 입점에 서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내세우는 이 강의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원리가 존중되고 있다. 그 원리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생산하기 위한 조건들이 최고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 양성성이 이를 위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차이성은 좋은 생산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되는데 양성성으로 인해 그 차이성들이 되레 해소되기 때문이다. 양성성이 사회적 갈등의 해소에는 유용하지만 존재의 증가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논의에서 양성성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남녀의 고정적인 성차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하여 남녀의 문제를 인간 또는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남녀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를 원초적으로 해소하려는 방법보다는 생물학적 원리를 존중하여 남녀의 성적 차이에 대한 뚜렷한 인식 위에 상호 보완성의 불가피성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남녀간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위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정언명제가 반론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것은, 첫째 그것은 생산을 위한 남녀의 차이를 말할 뿐이지 결코 사회적 차별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고, 둘째 생식을 지향하는 성의 본질을 방해하는 양성성은 사회 또는 심리 이론이라면 모르겠지만 섹스의 원리로서는 수용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2. 모든 존재는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섹스가 본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원성이란 성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전 우주의 모든 유무형의 존재들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원리인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성뿐만 아니라 인생을 좀더 깊고 넓게 이해하게 되어 이원성으로 인한 다양한 변주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풍요로움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들이 이원적 관계에서 존재하고 운행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인식 가운데 하나이다. 대표적으로 동양의 음양이론이나 서양의 변증법적 발상에서, 그리고 이 세계를 선신과 악신의 또는 빛과 어둠의 대립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옛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우주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 사례는 우리가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달이 차면 기운다든가 주가가 오르면 떨어진다든가 증오가 문득 사랑으로 변한다든가 등의 현상들은 (그 逆들도 마찬가지지만) 물론, 生者必滅이나 會者定離 등의 원리도,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와 지식나무의 존재나 우주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존재도 또한 이원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이원성에서는 일치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이원성이 어떠하느냐에 대해서는 동서양이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애당초 존재 양상의 차이일 수 있으나 또한 세계를 보는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이원적 대립이라도 동양의 음양적 관계냐 서양의 변증법적 관계냐에 따라 다르고, 善惡이라도 기독교적이냐 도가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원의 중간자로서의 인간이라도 그리스 신화적이냐 단군 신화적이냐에 따라 달리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성하고 직접적 관계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 논의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원성은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이기 때문에 성도 또한 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꼭 이원적 관계여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문화권에 따라 이원의 방식이 다르듯이 성의 이원 방식도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따라서 그 방식의 우월을 한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교통 통신의 발달과 세계화란 이념 때문에 모든 면에서 지구촌이 하나로 통일되어 가는 추세이고, 그에 따라 성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듯한 인상이다.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