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코 : 희랍신화에서 육체와
정신이 합일된 참사랑의 경우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큐피드는 육체적인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에 프시케를 만나는 날 바로 육체관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프시케는 비너스의 질투로 큐피드와 헤어져서 숱한 고생을 하지만 그 정신력으로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큐피드와 다시
만나서 둘은 전보다도 더 깊은 참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육이 합해진 영원한 사랑(이들은 신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을 성취하는
것이다.
--------------------------------------------------------------------------
▷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
[성과 사랑 02] -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이번 주 강의 주제는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겠습니다. 제가 이
주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적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현상에 대한 하나의 기술(記述)을 넘어서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한 하나의
定義(definition)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주제 아래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 이야기되겠습니다. 하나는 무슨 근거로 인간을 성적
존재로 정의하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정의에 따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성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1. 인간은 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성적 동물이다" --- 이것은 인간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닌 하나의 정의이다. 여기서
서술과 정의가 지닌 함축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그것을 정의로 받아들인다면, '성'은 하나의 種差(종차)로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지닌 유일한 성질이라는 것이 되는데, 과연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알다시피 성(sex)이란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어 유성생식을 하게 된 생명체들이 운명적으로 공유하게 된 공통적인
생물학적인 현상인데 인간만의 특징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성이라고는 말하지만 적어도 인간과 동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동물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동물학자 모리스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포유류)은 성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수용할 때 성의 기능은 생식과 쾌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물의 섹스가 전적으로 생식을 위한 것이라면 인간의 섹스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섹스를 하는 빈도에서 나타난다. 거의 모든 동물들은 발정기라는 일정한 때에 국한하여 교미를 한다. 수컷들이 온갖 방법으로 암컷을
유혹하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것은 자신의 DNA를 가진 새끼를 번식시키기 위한 오직 그 때뿐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그것은 특히 암컷들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동물의 암컷들은 배란기
외에는, 그리고 임신 중이나 출산 후 새끼를 키울 때에도 일정 기간 발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교미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이 무리의 지배자가
된 수컷 사자나 오랑우탄이 암컷이 키우고 있는 이전 지배자의 새끼들을 살해하는 것은,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암컷의 발정을 도와 자신의 새끼를
임신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인류의 암컷은 어디 그런가. 출산 후 육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임신 중에도 섹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암컷에게서 왜 배란기가 감추어지고 발정기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기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섹스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다른 동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빈번하게 섹스를 갖는 것일까? 생식을
위해서라면 그 방식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생식에는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인 그런 섹스의 행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추구되고 진화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생식 이외의 성의 기능인 쾌락을 들 수 있다. 모리스에 의하면, 우리는 생식이 아닌 쾌락 때문에 빈번하게 섹스를
추구한 셈인데 인체도 그런 방향으로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수유나 생식을 위해서라면 인류는 그렇게 커다란 여성의 유방과 남성의
성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수유만을 위해서라면 ⅔의 지방과 ⅓의 유선으로 구성된 유방에서 그렇게 많은 지방이 달려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 인간보다도 덩치가 큰 침팬치의 발기한 성기가 5 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그것보다도 훨씬 큰 성기도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화하게 된 이유는 오로지 번식이 아닌 성적 쾌락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암컷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인류 암컷의
성적 오르가즘이란 현상은 인간의 성이 쾌락을 중심으로 진화되어 왔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모리스의 주장에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론은 정자전쟁 이론과 같이 대체로 그러한 것들이
번식에 더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에 대한 논의를 떠나 모리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논의는,
동물의 성은 생식이고 인간의 성은 쾌락이라는 점에서 동물과 인간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왜 포유류에게는 없는 성적 쾌락이라는 현상이 인간에게만 있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과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에 따르면, 아득한 먼 옛날 아프리카의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어느 날 나무 위에서 내려와 사바나 초원지대로 걸어나왔다. 왜 안전한 樹上을 버리고 위험한 사바나로 걸어나왔는지,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되지만 아무튼 걸어나온 이 모험이 오늘날의 인류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결과와 의미들은 결정적인 것이었지만,
성의 쾌락과 관련되는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말한다면 그에 따라 골반이 좁아졌고 두뇌가 커졌다는 점이다. 골반이 좁아진 것은 몸을 수직으로
지탱하는 골반의 역할 때문이었겠지만 좁아진 골반 때문에 출산 시에 그 전에 없던 엄청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産苦였다. 산고가 종의 지속에
위기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지닌 육체적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산고라 하는데, 만일 새끼를 낳는데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어느 암컷이 계속해서 새끼를 낳으려 하겠는가? 종의 최대 목적은 종의 계속적인 유지에 있는데 지금 인류에게 그 목적이 위태롭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류의 암컷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새끼를 낳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인류가 다시 나무위로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의
진행에는 되물림이 없고 진화에는 후퇴가 없는 법이다. 여기서 인류는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쾌락을 진화시켰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적 쾌락은 산고 때문에 종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보전(補塡)하기 위해서 인류에게
진화된 것이다. 그 점에서 쾌락은 보조적 수단으로 생식을 돕는 데 그 존재 가치와 의의가 있다. 그런데 쾌락이 진화할 수밖에 없고 또 더욱
진화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를 든다면 직립보행과 더불어 인간의 두뇌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뇌가 커졌다는 것은 구피질이 아닌 신피질이
새롭게 생성 발달했다는 것을 말한다. 쾌락은 그 피질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만이 쾌락을 억제하기도 하고 항진시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두뇌는 인간의 모든 것이지만,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는 인간의 성이 쾌락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적 존재라는
것인데 그 쾌락이 사실은 생식의 보조적 수단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이 "성적 동물"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어느 정도 밝혀진
셈이지만, 여기서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성적 쾌락과 관련하여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성적 쾌락의 주체에 대해서이다. 인간의 성적 쾌락이 종의 지속을 위한 산고의 보전 기능으로
진화되어온 것이라면 그 쾌락의 주인공은 당연히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성이 출산하고 산고를 겪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에 있어 남성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여성의 오르가즘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볼 때 여성은 항상 성적으로
억압되었고 늘 주체가 아닌 소외적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조작한 결과이다. 가부장제의 문제라면
가부장이 모든 성을 독점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성이 권력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은 늘 심한 불공정과 불평등의 양상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성에 있어서 정의로울 수는 없는 것인가? 다른 정의와 마찬가지로 성적 정의로움도 인간다운 사회적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권력이 작용함으로써 성이 부정의하게 되었다면 성으로부터 권력을 떼어냄으로써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분배적 관점에서 그것을 남녀가 共有 내지 分有함으로써 성적 정의가 실현될 수는 없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성의 정의로움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食과 관련된 문제(이를테면, 경제)가 인류의 중심 문제였다면, 이미 그 기미가 나타나고 있지만 앞으로는
性과 관련된 문제가 인류의 핵심적 문제로 등장될 것으로 전망된다. 성별 간 성적 정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위에서 인간이 성적 동물로 정의되었는데 이제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규정으로서 인간이 단순히 빈번하게 섹스를 하는 동물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정의를 든다면 이성적 인간관인데 인간에 대한 정의로서 성적 정의는 원리적으로 이 정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할 때 거기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인간이
이성이란 종차를 통해서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둘째는 이성을 바탕으로 인식과 진리가 탐구되며, 셋째는 이성적 판단과 성찰 위에 인간의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 정의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 앞서 본 바와 같은 성의 차이를 통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고, 둘째, 인간은 그 성을 바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며, 셋째, 인간은 그러한 성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이러한 정의를 공적으로 수용하였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오히려 수용하기는커녕 이성적
인간관에 의해 줄곧 거부되어 왔다고 하는 편이 진실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의 풍속사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온갖 형태의 성 문화가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정작 드러난 양상은 언제나 성에 대한 금지와 은폐 일색이었다. 그것이 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감추어진 이데올로기적 음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금지와 은폐의 결과는, 성은 인간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한
방법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타락과 사회 혼란의 한 원인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세기 프로이트 이후 그것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 성은 해방되기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그 해방은 강의실이나 이론의 공간에 국한되어 있을 뿐, 현실 세계의 성은 여전히 억압과 편견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아직도 정당한 인식과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때로는 구원의 길로 추구되고 또 때로는 파멸의 길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성에 관한 이러한 모순적 상황과 인식과 실제의 괴리적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성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성을 공론화하는 것이다. 공론화만이 인식과 실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성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되 그것은 반드시 개별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성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극복할 수 있고 또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성
인간이 성적 동물이라면 성적 동물로서 인간은 非性的일 수가 없다. 성적 동물로서 비성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바로 그 정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이성을 추구하고,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사회성을
추구하듯이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마땅히 성을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성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이 더욱 인간답게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성이 과연 어떤 성인가 하는 점이다. 모든 것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되듯이
성도 또한 좋은 성과 나쁜 성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좋은 성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간의 성은 정신적이어야
한다.
앞서 인간의 성이 신피질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았듯이, 정신성은 인간의 성이 성립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정신성을 갖어야 한다는 것은 실행의 측면에서 볼 때 성이 행동화되기 이전에 그 성이 성찰되고 판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에 대한 성찰과 판단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소극적으로는 가장 폭발적인 성욕의 힘이 맹목적인 본능에 맡겨짐으로써 가져올
무분별한 극단적 파멸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요, 적극적으로는 그 힘이 가장 창조적인 인간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성이
고귀한 인간의 성으로 승화되느냐 아니면 단지 하나의 동물의, 아니 동물만도 못한 성으로 전락되느냐는 결국 그 정신성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뿐 없는 것으로부터는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성이 있는 육체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성이 육체의 성을 초월하지 못하고 끝내 육체의 성에 그쳐버리는
것은 현대가 정신을 잃어버린 나머지 육체만 있고 지향해야 할 정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성에 관한 모든 사회적 병리
현상과 온갖 스캔들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지 않을까? 한자어 性은 어원적으로 마음(心)과 生(육체)이 합쳐서 된 會意文字인데,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영혼, 정신)과 육체가 합쳐지고, 그것도 마음에 육체가 인도될 때야 비로소 性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에
있어서 정신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정신성의 한 형태는 바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사랑이 어떤 정신성을 갖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둘째, 인간의 성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도덕이요 다른 하나는 법이다. 그 점에서 인간의
성적 행위도 법과 도덕에 근거할 때 비로소 행위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중에 더욱 기본적인 것은 도덕으로서 성은 그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도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성적 인식과
행위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도덕은 기존하는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것을
뛰어넘어 개인의 자유를 구현하려는 성은 끊임없이 그러한 도덕과 대립하여왔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여기서 말하는 성의 도덕성을 닫힌 개념이 아닌
열린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성이 있을 곳은 도덕(기존 질서)과 비도덕(새 질서)의 경계선일 것이다. 그것은 기존
도덕에 전적으로 얽매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떠나기보다는 오히려 비도덕적인 것을 도덕으로
끌어들여 도덕의 경계를 더욱 확장해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성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비도덕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는 개방된 도덕성에서 나오지만 개방된 도덕성의 진정한 힘은 앞서
말한 정신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으면 도덕도 없는 것이다. 흔히 그러한 성적 행위가 선구적인 자유의 구현이라기보다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비쳐지는 것은 그것을 오직 비도덕적인 측면으로만 조명하거나 기존 질서의 반동 때문일 것이다. 성의 도덕성을 통해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한 어떠한 성도 결코 인간다움을 실현하지 못하고 또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인간의 성은 개방적이어야
한다.
성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것인데, 본질상 육체가 닫힌 세계라는 점에서 성은 자아 중심적인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즉, 육체적 성은 철두철미 이기적인 것이다. 육체적 성으로만 접근했을 때 대체로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고 결국 그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육체적 성은, 정녕 그것만으로 지속된다면, 그 폐쇄성 때문에 존재에 대해 절대적인 위기가 된다.
존재의 질병 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육체적 성만을 추구하는 동물들이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다행히 그놈들이 발정기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 그것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고, 발정기가 없어 빈번하게 섹스할 수 있는 인간의 경우에는 다행히 그것을 제어할 정신성 내지 도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성은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은 둘의 관계에서 성립하고 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열어야 하는데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주고받는 그 관계를 위한 필수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방의 대상이 단지 물적 존재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통합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아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적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교류나 그 차원의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격적 교류와 그 차원의 본질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기 중심적 폐쇄적 성만을 고집한다면 그러한 성은 일방적이고
습관적인 욕구의 해소에 불과할 뿐 개방을 통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다움을 위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성적 불감증이 이기적 폐쇄성에서 발생하고 적극적인 자아의 개방을 통해 치유된다는 점은 개방성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넷째, 인간의 성은 관능적이어야
한다.
관능성이란 우선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육체의 힘으로서 결합을 지향하는 성을 위해서 육체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육체의 관능성은 성의 직접적인 계기로서 육체의 상호 이질감과 생소함에서 오는 단절을 극복할 수가 있는 조건이
된다. 관능성은 두 육체의 교류의 창이자 다리이다. 단지 그 관능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되겠다. 그러나 육체의 관능성은 그것이
육체적이라는 점에서 그 효용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육체적 관능성은 성의 문을 열어주지만 그 끝을 맺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정신의 관능성이다. 정신적 관능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 또한 별개의 문제가 되겠다. 단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의
관능성은 성적 관계의 외적 단초에 불과할 뿐 그것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퍼내도 메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구치는
정신적 관능성만이 상대를 끊임없이 유혹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성의 조건으로서 정신성, 도덕성, 개방성, 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들은 사실상
엄격하게 구분되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내적인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정신성은 도덕성과, 도덕성은
개방성과, 개방성은 관능성과, 관능성은 정신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더없이 좋겠지만, 좋은 성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이 네
가지를 함께 구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들 중 어느 하나의 가치를 붙잡는다면 이들의 긴밀성으로 인하여 다른 가치들도 쉽게
획득될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동물성이고 한편으로 인간성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이 동물의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고 인간의 성으로
승화하기 위한 노력을 어느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인가는, 자신이 지닌 결에 따라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