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01. 머리말 : 인간학적 주제로서의 성과 사랑

鶴山 徐 仁 2005. 12. 14. 23:53
01. 머리말 : 인간학적 주제로서의 성과 사랑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425179

 

 

 

 

 

 

 

 

 

 

 

 

 

 

 

 

 

 

 

 

 

◀ 부거로 : 프시케는 인간이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사랑의 신 큐피드(Eros)가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그러나 큐피드는 육체적인 사랑을 했고, 프시케(Psyche)는 이름 그대로 정신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그 후에도 우리 인간의 이상적인 사랑으로 부러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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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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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1] - 머리말 : 인간학적 주제로서의 성과 사랑

 

안녕하세요? 저는 <성과 사랑>을 강의하게 될 동덕여자대학교의 박홍태 교수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강의실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평소 일반 면대면 강의실에서 하던 방식대로 오늘 첫 시간에는 먼저 이 강의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강의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여러분들의 이해와 전망을 돕고자 합니다. 오늘은 한 학기 수업을 위한 일종의 warming up 또는 orientation 시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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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에 임하는 입장에 대하여


<성과 사랑>이라는 과목명이 말해주듯이 이 강의의 주제는 성과 사랑이다. 그런데 혹자는 과목명에 병렬되어 있는 '성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성과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과연 하나의 주제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제인가? 만일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구별되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제라고 한다면 그것들의 상호 관계는 어떤 것인가? 즉, 그것들은 상호 독립된 개별적인 주제로서 그들의 관계는 그때그때 발생하는 우연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이긴 하지만 어떤 긴밀한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만일 연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떤 특별한 연관성이 내재한다면 그들 관계는 '사랑과 성'의 관계인가 아니면 '성과 사랑'의 관계인가? 그러나 저러나 도대체 그 두 표현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 만일 차이가 있다면, 굳이 '성과 사랑'이라고 한 것이 단순히 임의적인 글자의 배열이 아닌 어떤 불가피성에 기인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 불가피성은 또 무엇인가?

 

얼핏 보기에 말장난이나 별다른 의미 없이 보이는 이러한 의문들이, 그러나 깊이 숙고할수록 성과 사랑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것들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항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도 이러한 질문들(사실은 개별적인 질문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관된 하나의 질문 체계이지만)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하나의 입장과 답변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이 강의는 그것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될 것이다) 우선 그 입장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성과 사랑' ---이것은 하나의 주제인가 아니면 두 개의 주제인가? 하나라고 하면 성과 사랑이 같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도 어느 것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성으로 하나인가 또는 사랑으로 하나인가로 구분되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주로 환원주의자나 또는 일원론자(대체로 유물주의자이고, 그 중에서도 극단주의자)가 취할 수 있는 관점이고, 세속적으로는 "사랑하니까 같이 자자"라든가 그것을 뒤집어서 "자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부류들이 부지불식간에 취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강의는 그와 반대로 성과 사랑이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영역에 속한 별개의 것이라는 관점에 서 있다. 거칠게 말해서 (극단적 대비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성은 육체인 것이고 사랑은 비육체적인 것, 즉 정서나 정신 또는 영혼이라는 식이다. 원칙적으로 별개인 그들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부정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적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성과 사랑은 그 자체로는 상대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아무런 의무도 부과할 수 없는 상태의, 상호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 사랑이 서로 관계를 맺어 왔고 또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다. 사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고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하면, 성과 사랑의 관계는 부분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즉, 성 가운데 어떤 것은 사랑이지만 모든 성이 다 사랑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할 것이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지만 모든 사랑이 섹스로 이어져야 할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립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이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의 심연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장 단호한 방법은 '결단'이라는 실존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라도 거기에 함축된 단순미와 비장미가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비록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 있는 충족을 준다 하더라도, 결단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단은 그 목적과 함께 그 모든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또한 그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의식과 강한 실천의지가 끊임없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흔히 위대한 사랑이나 비극적인 사랑이라 일컫는 것들은 대체로 이러한 타입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일 뿐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방법들을 모색하게 되는데, 대개는 공식적 비공식적 제도나 관습, 또는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개인 또는 집단의 심리적 기제에 호소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대개 어쩔 수 없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동성과 소극성을 깊숙이 감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흔히 결혼(물론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이나 체념이 사람들이 애용하는,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성과 사랑의 단절을 잇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실존적 결단과 수동적 방법 외에 성과 사랑을 결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그러나 가장 유력한 방법은 성과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육체로서의 성과 정신으로서의 사랑은, 사랑이 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만일 동일한 그 본질을 붙잡기만 한다면, 즉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상호 관계는 자연스럽게 성취될 것이다. 성과 사랑에 위협이나 강요, 또는 애걸복걸 등과 같은 무리수가 개입하는 것은 그것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성의 내적 (곧 미시적) 세계로 들어갈 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 본질로서 개체성, 관계성, 그리고 생명성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도 또한 상호 관계의 통로로서 그것들을 공유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 성과 사랑의 관계는 '성과 사랑'인가 아니면 '사랑과 성'인가? 여기서 먼저 '과'(and)라는 토씨가 방향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기본 관점은 형성(존재론 또는 발생론)의 측면에서 "Nothing comes from nothing"이라는, 즉 無에서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없는 것에서 출발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이다. 위에서 성을 육체적인 것으로 보고 사랑을 비육체적인 것으로 잠정 규정하였는데 인간이 육체로 태어나고 정신이 나중에 생기는 것이라면, 그 관계는 당연히 '사랑과 성'이 아니라 '성과 사랑'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랑이 성으로부터 발생하거나 또 모든 성이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의 출발이 그렇다는 것이다. (작용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사랑이 주체적으로 작용하는 "Something comes from nothing"이 효력을 발생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도 차후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랑이 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성이 사랑 속에 마치 햇살처럼 퍼져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비유컨대, 그것은 사랑의 DNA와 같다. 그래서 성이 좋으면 사랑도 좋게 되고 성이 나쁘면 또한 사랑도 나쁘게 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사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에 대한 관념과 가치와 행태를 치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은 사랑의 형성 뿐 아니라 그것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을 칭찬하면서 만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비판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반컵의 물에 안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50점 짜리 시험지를 받은 아이에게 격려하는 엄마가 있는 반면에 오히려 있는 기마저 꺾어버리는 엄마가 있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첫 번째가 사랑의 행태이고 두 번째 부류들은 아직 사랑의 정체와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과 사랑'에 대해서 이 강의는 기본적으로, ①그것들이 영역상 별개의 것이지만, ②본질을 공유할 경우에는 (결국은 부분적으로만) 관계를 맺고, ③관계를 맺더라도 형성의 차원에서는 그 방향이 항상 성에서 사랑으로 흐른다는, 즉 성의 본질이 늘 사랑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 성과 사랑을 二元的 一元性의 관계로 파악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앞으로 보게 될 에로티시즘의 실체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④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을 덧붙이자면, 이 강의는 기본적으로 성과 사랑을 인간학적 입장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의문도 인간학적인 관점의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성에 관한 연구가 여러 분야에서, 그 중에서도 정신분석학, 생물학, 인류학, 사회학 등에서 각기 나름대로 놀라운 진보를 보여왔고, 사랑은 여전히 종교와 문학과 예술의 주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과 사랑에 관한 한 이제 그런 개별과학적 연구 성과들이 개별적 차원을 떠나 상보적 관계 속에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이 강의에서는 특히 다른 학문보다도 기본적인 성격의 생물학과 인류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예정인데,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강의의 구성에 대하여


이 강의는 성에 관한 전반부와 사랑에 관한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주제의 배열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랑이 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기본 전제에 따라 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양적으로 보면 성 부분이 사랑 부분보다 조금 많지만, 성에 대한 이해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 강의의 핵심적 주제는 결국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강의는 성보다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성에 관한 전반부의 논의는 다시 에로티시즘과 가부장제 하에서의 성관념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한 것은 유사 이래로 이루어진 인간의 온갖 형태의 성적 활동이 결국에 가서는 그 두 가지로 수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성은 여전히 인간에게 다 해명되지 않은 채 하나의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은 성이 생식과 더불어 쾌락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가부장제가 생식과 관련하여 진화되어온 사회적 산물이라면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관계하면서 발전되어온 문화적 내지 심리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성의 주기능과 부기능의 관계가 더욱 전도된 양상이 되었지만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성의 모든 것으로서 여기서의 논의는 이들에 집중된다.


그리고 사랑에 관한 후반부에서는 특히 사랑의 구조와 요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이 논의는 사랑이 시대와 문화와 민족과 개인에 따라서 도저히 하나의 원리로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일정한 틀이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제시된 것이 사랑은 < Give & Take >라는 도식이다. 이 < Give & Take >로써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차후에 점차 드러날 것이지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 Give & Take >가 갖는 원리로서의 생명력과 효용성은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고 또 그것을 통해서 기존의 사랑의 다양한 형태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용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 Give & Take >가 단순히 관념적 구상이 아니라 성의 (미시적) 작용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는 점이 논거의 유지에 보탬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3. 학습 목표에 대하여


이 강의는 성과 사랑에 대한 (특히 사랑 부분은) 다분히 주관적인 하나의 견해이다. 그 점에서 하나의 편견일 수 있고, 따라서 이 강의를 듣는 이들은 반드시 이 관점을 수용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펴는 주장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느냐는 결국 충분한 논거 여부와 그것의 논리성 및 적용의 효용성에 좌우되겠지만, 오히려 이것을 비판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의식과 사랑론을 체계화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할 지도 모를 일이다.

 

교양과목으로서 이 과목은 성격상 성과 사랑에 관해 학설이나 이론을 공부하는 과목이 아니다. 그래서 강의 중에 어떤 주제를 놓고 특별히 논거를 대가며 자세하게 논증하거나 반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강의 계획서>에서 밝혔듯이, "상업주의적 성문화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형성하고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분별할 수 있는 인식 능력과 강한 실천 의지"를 함양함으로써 이 강의를 수강하는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성 상품화하고 사랑의 감정에 빠져 판단과 행동이 전도되거나 난폭해지고 또는 정지되는 사태 등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심지어 부모와 자식에게도, 필히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듯이 성과 사랑에도 반드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은 것을 취할 수 있고 또 나쁜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의 근거는 오직 인식에 달려있다. 이 강의는 우리 학생들이 성과 사랑에 관해서도 좋은 것을 추구하되 나쁜 것은 추구하지 말았으면 바램에서 개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기타 사항에 대하여


① 현재 제시된 평가 방식, 즉 리포트(15%)+토론(20%)+출석(15%)+출석시험(40%)+기타(10%) 방식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과목을 수강한 학생들의 수에 따라 변경될 수가 있는데, 학생들의 수가 확정된 이후에 최종 평가 방식을 공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타의 내용도 차후에 공시하겠습니다.


② 이 과목을 수강한 학생들에게 먼저 1차 과제물을 부과합니다. 리포트 란을 참조하여 주기 바랍니다.

과제물 제목: 성과 사랑에 대한 현재의 내 인식은 무엇인가? (또는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이 강의를 통해 내가 기대하거나 알기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③ 토론은 조만간 실시하겠습니다. 토론 주제의 선정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학생 여러분들의 의견을 반영할 계획입니다.


④ 시험은 필답고사가 되겠습니다. 필답고사를 결시하면 무조건 F로 처리됨을 유의하기 바랍니다. 공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경우 외에는 예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