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성의 행태와 가족의 형태 | 성과♡사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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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지오 :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틴말로는 Venus)는 헤르메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에로스이다. 이 신화에는 멋진 상징이 숨어
있다. 즉, '미'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사랑(Eros)'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나는 것인데, 실제로는 예쁘지
않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성과 사랑 06] - 성의 행태와 가족의 형태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이번 주 강의 주제는 성과 가족의 상관성 문제입니다. 저는 인간의 성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에로티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제인데, 전자가 인간의 성을 쾌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생식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난주까지는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번 주부터는 가부장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가족이란 기본적으로 남녀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형성되는데 그 둘 사이의 성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가족의 형태가 달라져왔습니다. 여기서는 난혼제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진화를 주장한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Lewis H. Morgan)의 이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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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건의 가족론
생식과 쾌락이란 성의 두 기능 중에, 쾌락의 측면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에로티시즘을 만나게 되지만 그에 반해 생식의 측면으로 나아가면 가족(제도)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성을 에로티시즘과 (오늘날의 가족제로서) 일부일처의 가부장제라는 두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앞서 본 바와 같이 생식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主從的 보완 관계로서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것이지만 드러난 사회적 현상으로 보면 상호 별개로 발전하거나 오히려 대립적인 것으로 작용해온 게 사실이다. 오늘날 생식을 다만 노역과 고통의 과정으로만 보고 쾌락을 위해 생식이 기피 대상으로 간주되는 일반적인 인식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들의 조화와 결합이 우리가 추구하고 해결해야 할 성의 궁극적인 방향이 되겠으나, 여기서는 성에 관한 다음 논의로서 가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가족은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결혼이 가족을 이루는 공적인 절차라고 한다면 성은 바로 결혼의 본질적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랑이 不在하더라도 가족은 성립하지만 성이 不在하면 가족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가족형태는 一夫一妻의 家父長制이다. 일부일처제란 성적 관계에 관한 규정으로서 말뜻 그대로 하나의 남편은 하나의 아내하고만 또 하나의 아내는 하나의 남편하고만 성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의미하고, 가부장제란 가족의 권력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서 가족의 권력이 남편에게 즉 아버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성서의 아담과 이브의 경우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헤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의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제의 역사와 그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장구하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유사 이래로 오직 그 형태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인류가 그 가족제만을 유지해왔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스웨덴의 인류학자 바호펜(Bachofen)은 다윈(C. Darwin)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2년 후인 1861년 그의 저서 {모권론}에서 결혼형태의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구분하면서 그러한 입장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첫 단계는 아프로디테로 상징되는 창부제이고, 두 번째 단계는 데메테르로 상징되는 여인정치제이며, 세 번째 단계는 아폴론으로 상징되는 부권제이다. 그에 의하면 창부제에서는 남녀가 성을 향락적으로 즐기는 난교적인 관계가 이루어졌고, 여인정치제에선 모권중심제로서 결혼으로 인하여 난교적인 성관계가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으며, 부권제에서는 난교적 성관계는 없어지고 부부의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그와 동시에 남성에게는 독점적인 그리고 여성에게는 예속적인 성적 지위가 형성되었다. 그는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인류가 난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또 모권에서 부권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고 있으나 실증적 논거가 부족한 그의 주장은 그러한 몇 가지 학문적 공적과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서 계속 지탱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바호펜을 계승한 자가 미국의 진화주의 인류학자 모건이다. 그는 1877년에 풍부한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원시사회에서 그리스 로마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변천사를 체계화한 {고대사회}라는 획기적인 불후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모건의 이론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갈 사항은, 사상적으로 볼 때 바호펜이 멀리 BC.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국가} 제5권에서 이상국가의 토대를 위해 국가의 수호자 계층에서는 추첨에 의해 남녀가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일종의 난혼제와 재산은 물론 처자식과 남편까지를 공유하는 공유제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가부장권을 부정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남녀의 동등 교육의 실시는 물론 정치적으로 여성도 최고 통치자인 철인왕이 될 수 있음을 말하였는데 이러한 점들이 바로 바호펜의 사상적 선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 플라톤의 이런 주장이 학문적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그의 주장이 실천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이상적(곧, 허구적)이라는 선입견과 함께 가부장제가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던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모건의 주장을 그의 저서, 특히 제3부 {가족관념의 발달}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모건에 의하면 인류의 가족제는 ①혈연가족, ②푸날루아 가족, ③대우혼(對偶婚) 가족, ④가부장제 가족, ⑤일부일처제 가족으로 발전하여왔다. 그러나 이 형태 중 ①, ②, ⑤는 기본적이지만 이 순서가 반드시 순차적으로 발생하고 또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건이 이러한 가족구조 변화에 주목하게 된 동기는 친족 제도가 갖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족은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사회가 낮은 단계에서 하나 높은 단계로 진보해 가면 가족도 그 다음 단계로 진보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에 비하면 친족제도는 수동적이다. 그것은 단지 일정 기간에 가족이 완수해놓은 진보를 오랜 시간을 두고 기록해나가는 데 불과하다. 가족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었을 때 한하여 친족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친족 제도가 있다는 것은 설사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가족 형태가 있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실제로 있지 않았다면 제도로서 그에 상응하는 친족 제도가 발생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친족제도는 기본적으로 그 명칭으로 나타나는데, 친족 명칭은 분류식(分類式)과 기술식(記述式)의 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혈족이 기술되지 않고 자기의 촌수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일정한 범주로 분류되고, 그리하여 동일한 친족관계의 용어가 동일한 범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데 반하여, 후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경우처럼 혈족이 친족 관계의 기본적 용어라든가 또는 이러한 용어가 조합된 것에 의하여 기술되고, 그렇게 하여 각인의 친족 관계를 특정하는 것이다. 이 둘의 근본적 차이는 전자가 집단 내의 복혼(複婚)에 비롯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한 쌍의 남녀 사이의 단혼(單婚)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단계의 가족 형태의 특징을 보기로 하자.
혈연가족은 인류의 초기의 가족 형태로서 한 집단 내의 직계 및 방계의 형제자매의 통혼을 기초로 하고 있다. 모건은 하와이 원주민들에게서 분류식 중에서도 특히 '말레이 식'이라고 명명한 친족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부모, 자녀, 조부모, 손자녀, 형제자매의 다섯 종류의 명칭만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혈연 관계는 인정되지 않은 셈이다. 모건은 어떤 남자가 그 형제들의 자식(조카)을 모두 자기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형제의 처가 자신의 처도 되기 때문이라고, 즉 처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형제가 처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혼에서는 자기 자식과 형제의 자식을 구분할 수 없으며 형제의 처가 낳은 자식은 형제의 자식일 수도 있지만 똑같이 자기 자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는 까닭에 모두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자매의 경우에도 남편을 공유하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대로 명칭이 구별되었던 것은 서로 다른 세대간에는 결혼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혈연가족제에 대해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세대간의 통혼을 허용한 혈연가족이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가족 형태인가 하는 점이다. 즉, 그보다 선행하는 것으로서 세대간의 구별을 무너뜨리는 바호펜이 말한 소위 난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모건은 이에 대해 그것이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떤 집단 내에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 이유는 그 집단이 생존을 위해 보다 조그만 집단으로 해체되고 혈연가족으로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애써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중요한 점은 혈연 가족이 사회의 최초의 조직 형태였고, 또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이전의 것이 어떠한 상태였든지 간에 그것이 갖는 미조직의 상태에 관한 개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후에 모건의 사상을 이어받은 엥겔스도 같은 맥락에서 "근친상간이 발견되기 전에는 형제자매간의 성교가 세대를 달리하는 자들 간의 성교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것들을 모두 '무규율 성교'(Regellosigkeit)라는 개념으로 포괄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생산적인 논란을 피하고 있다.
다음으로 푸날루아 가족은 한 집단의 직계 및 방계의 여러 자매 또는 여러 형제들이 각자의 남편과의 또는 각자의 처와의 통혼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의 남편과 처들은 반드시 혈족은 아니었지만 혈족인 때도 있었는데, 그 경우엔 남자의 집단과 여자의 집단이 혼인하였다. 푸날루아(Punalua)란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가까운 반려자'나 '동반자' 또는 '친근한 동료'란 의미로 공통의 남편들은 서로를 푸날루아라고 불렀고, 공통의 처들도 마찬가지였다. 푸날루아 가족의 친족제도는 혈연가족제의 말레이 식과는 다른 '투라니아 식'으로 두드러진 차이점은 친형제자매간의 통혼을 금한 것이다. 형제자매간의 통혼을 금함으로써 족외혼을 실시하고 그에 따라 씨족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씨족이 완전히 발생한 다음부터는 방계의 형제자매간에도 혼인을 금하였다. 푸날루아 친족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형제건 자매건 간에 언니가 동생의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또 동생이 언니의 아들을 역시 아들이라고 부르는 점에서는 혈연가족과 같지만 형제가 자매의 아들을 아들이 아닌 생질이라 부르고 또 자매가 형제의 아들을 아들이 아닌 조카라고 부르는 점에서 다르다.
대우혼 가족제는 군혼 하에서도 어느 정도 형성되고 있었는데, 얼마 동안 지속된 관계에서 남자는 여러 아내 중 주된 아내를 가질 수 있었고 아내 또한 주된 남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푸날루아 단계에서 씨족이 더욱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그로 인해 혼인할 수 없는 많은 '형제 집단'과 '자매 집단'의 수가 증가함으로써 군혼이 불가능하게 된 결과 대우혼 가족이 이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 남자는 일부다처제의 권리를 가졌지만 경제적 이유로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동서 기간 중 엄격한 정절이 요구되었고 간통은 처벌을 받았지만 남편에게는 상호적인 의무가 인정되지 않았다. 남편은 수시로 아내를 버리면서 다른 아내를 취할 수 있었고 여자도 남편을 떠나 다른 남편을 받아들이는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였다. 발달된 대우혼은 한 쌍의 남녀 사이의 혼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일부일처제와 유사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은 동거의 배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우혼 가족은 일반적으로 공동 가옥에서 거주하였는데 그런 거주상의 제한이 가족의 개인적 성격을 못 갖도록 일조 했을 것이다. 혼인은 감정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편의와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자녀의 혼인 결정권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부일처제는 배타적인 동거를 하는 한 쌍의 남녀 사이의 혼인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대우혼 가족으로부터 부권의 싹이 발전되었지만 그것이 항구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문명시대에 와서이다. 일부일처제는 남자는 한 사람의 아내에 만족하고 여자는 정절에 매인 생활을 한다는 외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합법적인 혼인을 통해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적출(嫡出)의 자녀를 출산하고 이 결과를 확보하기 위해 여자를 격리시키는 것이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 여자들은 자녀들의 소속이 그녀의 씨족으로부터 남편의 씨족으로 바뀌고 혼인으로 인하여 그녀의 남계 친족들이 가졌던 권리를 박탈당했으나 거기에 상당하는 다른 권리를 획득하지는 못하였다. 일부일처제가 남자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 자신들의 요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일부일처제 하에서의 아내의 불리한 위상과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현재까지 가장 발전된 형태의 가족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일부일처제의 정당성에 대해 검토할 기회를 갖겠지만, 이에 대해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만 과연 모건이 기대한 대로 일부일처제가 양성의 평등이 달성되도록 개선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그것은 과거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사회 진보로써 발전되며, 사회 변화로써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제도의 창조물이며, 그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이 문명시대의 개시 이래 현저히 개선되었으며, 근래에서도 매우 현저하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적어도 양성의 평등이 달성될 때까지는 더욱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의 계속적인 진보를 가정하면서 먼 장래에도 일부일처제 가족이 사회의 요청에 따르지 못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 올 제도의 성질을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세대간 혼인을 허용하는 혈연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제자매들의 결혼을 금하는 푸날루아 가족으로 발전하고 집단혼이 해체되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나타나면서 대우혼이 탄생하고 마지막으로 그 대우혼의 개인적 성격이 발전하여 일부일처제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모건의 이론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가 항상 일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역과 종족에 따라 상이한 역사와 사회의 발전상태를 갖는 점을 인정하면서 결혼과 가족 형태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모건의 이론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성과 가족의 밀접한 관계로서 성의 행태가 가족 형태를 직접적으로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2. 모권은 존재했는가?
가족론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주제는 모권의 존재 여부이다. 바호펜이 완전한 여성 지배(gynaecocracy)의 모권사회를 말한 이후 한 동안 몇몇 학자들에 의해 모권의 존재는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설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부권과 같은 형태의 모권이 과연 존재했는가는 여전히 하나의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에 대한 논의는 母權(matriachal)에 대한 분명한 정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권을 母系(matrilineal) 및 母居(matrilocal)와 구분하는 일이다. 모건의 가족제의 발전 과정에서 보면 부권이 형성되기 이전의 혈연가족과 푸날루아 가족과 對偶婚 가족 단계에서 모계사회는 분명히 존재하였다. 군혼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난감한 문제는 모계가 분명한데 반해서 아이의 부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임신의 생물학적 원리를 모른 나머지 사람들은 부계에 대한 인식마저도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의 혈통에 따라 분류되고, 그럼으로써 그 계통에 따라 씨족과 또한 재산이 형성되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로서 여자가 낳았다는 의미의 회의문자 '姓'은 바로 그러한 과거의 사실을 뚜렷이 나타내준다. 그런데 그 단계에는 또한 모거사회도 있었다. 대우혼 단계에서 두 남녀가 헤어질 때면 아내보다도 오히려 남편이 집을 나가거나 붸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결혼하면 주로 남자가 씨족과 재산을 형성하고 있는 여자의 주거지로 이주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렇게 모계와 모거의 형태는 분명히 존재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것과 다른 부권 형태의 모권도 과연 존재했는가가 문제이다.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권의 형성 배경과 그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부권은 남성들이 자의식을 갖게 된 결과 여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식과 재산에 대한 권리에서 자신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모계나 모거 사회에서도 생산력의 주된 원천은 힘과 노동력을 가진 남성이었다(이들을 '크토닉 남성'(chthonic male)이라 부른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필요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남성들이 목축과 농경, 나아가 수공업을 통해 부지런히 생산하였고 그에 따라 재산도 축적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씨족의 한 구성원으로 간주되는 한 그 재산은 씨족에 귀속되고 사후에는 남녀 형제에게나 또는 여자 형제의 자식들이나 그 후계자들에게 상속될 뿐 자기 자식에게는 아무것도 상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複婚에서 單婚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상속을 위해서 적출(嫡出)을 확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나타났다. 부권이 강화됨으로써 씨족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음은 물론이다. 간략히 말하면, 부권은 재산의 사유와 성의 배타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대립과 경쟁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모권이 존재하고, 더욱이 부권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앞서 말한 부권의 형성 배경이나 성격을, 아니면 그와 유사한 것들을 전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럴 경우에만 부권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으로서의 모권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가부장제 이전의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사회에서도 그러한 배경이나 성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부권사회는 그 이전의 어떤 사회하고도 판이하게 다른 성격과 독특한 환경을 지니고 형성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모계와 모거 사회는 사유와 독점이 아닌 재산과 성의 공유를, 그리고 투쟁이 아닌 공존을 지향하였다. 결과적으로 모계와 모거를 넘어서 모권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물질적 토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위대한 자연적 생산성을 가진 여성들이 사회적 생산성을 위해 불필요한 조작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권력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母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튼 모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권의 폐해로 시달린 우리에게 오히려 하나의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클림트 : 여인이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뱃속에 있는 아이는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면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의 일체감, 또는 합일의 경지는 그 어린애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그 경지를 추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뱃속은 천국으로 상정되며 그에서 종교가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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