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07. 일부일처제의 정당성 문제

鶴山 徐 仁 2005. 12. 15. 00:07
07. 일부일처제의 정당성 문제 | 성과♡사랑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689444

▲ 틴토레토 :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 (수염난 노인)의 아내였는데, 전쟁의 신 아레스와(뒷쪽 침대 밑의 투구 쓴 군인 ) 바람을 피우는 현장에 그의 남편이 나타나 그녀를 세세히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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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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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07] - 일부일처제의 정당성 문제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이번 주의 주제는 일부일처제의 정당성 문제입니다. 일부일처제는 가부장제의 가장 발달된 형태로 현재 대부분 문명사회에서 채택하고 있는 가족제도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선, 일부일처제가 과연 그 본질에 합당하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고, 다음으로 예컨대, 모건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양성의 평등이 달성될 수 있도록 더욱더 개선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들은 전자가 충족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후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관계를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관계와 무관하게 각기 별개로 던져진 물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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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순을 안고 있는 일부일처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부장제는 모계사회에서 점점 축적되어 가는 富를, 그 부의 생산자인 남성들이 다른 남성의 자식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 자식에게 상속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추구된 것이다. 적자상속(嫡子相續)은 가부장제의 최초이자 최후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단 남성들에 의해 시작된 가부장제가 일부다처의 단계를 거쳐 일부일처제로 강화·이행될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자신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다처에 의해 사회와 가족 내에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염려한 그 일처의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성의 입장에선 嫡子 확보를 위해서나 또 성적 쾌락을 위해서, 오히려 그러한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는 그 변화를 굳이 촉진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일부일처제가 됨으로써 그 일처는 자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독점할 수 있는 반면에 일처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嫡子의 확보를 위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도덕적, 법률적 통제와 억압까지도 덩달아서 확실하게 독점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흔히 일부일처제가 개인적인 사랑의 결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일부일처제의 주의 주장이나 그 수행 목적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인류사에 있어 극히 최근에 발생하였거니와 어느 사회보다도 먼저 사랑이 생성할 수 있는 제반 토대를 갖추고 있었고 또 최초로 일부일처제를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에서조차도 자식 낳는 것이 일부일처제의 유일한 목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남자)에게는 육체적 쾌락을 위해 매춘부가 있고 일상적인 봉사를 위해 첩이 있으며 아이를 출산하고 집안을 충실히 관리하기 위해 아내가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적 사랑을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내보다는 오히려 일부일처제를 약화시키는 매춘부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물론 사랑과 결혼(아내)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의 결과 오늘날 연애결혼이라는 형태가 등장하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상황은 개인적 사랑이 여전히 일부일처제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궁극적 이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기원으로 보면, 일부일처제는 자연적인 조건이 아닌 전적으로 경제적 조건 위에 세워진 가족형태였다. 일부일처제에서는 결혼으로 결합한 두 남녀 사이에서만 성적 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일부일처제가 도달한 자체 논리의 궁극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정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모스테네스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남성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고 언제나 여성들에게만 완강하게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조건이라는 것이 오직 남성의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일처제 역시 그러한 도식에 따라 결혼에 있어서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억압이라는 편향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사유재산의 발생은 여성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한 셈이었다. 권력을 가진 입법자로서의 가부장은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을 조작하여 항상 여성의 성적 순결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부정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단죄한 반면에 자신의 성적 일탈에 대해서는 언제나 늘 미온적이고 관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 하에서 이렇게 남성의 성적 일탈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여성의 성적 복수가 일어난다는 것은 일부일처제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분명 하나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E. 푹스에 의하면, 그것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일부일처제에 내재하는 "자체의 필연성" 때문에 하나의 "자연스런 질서"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연의 질서를 어긴 일부일처제에 대한 "자연의 복수"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자연의 복수는 피할 수도 없고 또한 우리들의 문명과는 분리시킬 수도 없는 두 가지의 사회제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첫째는 피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서의 간통이며 둘째는 피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서의 매춘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역한 일부일처제에 대해 자연은 매춘과 간통으로써 일부일처제를 파괴한다는 것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은 매춘과 간통이 하나의 사회구조로 존재함으로써 그나마 비자연적인 일부일처제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매춘이 "일부일처제의 중요한 목적인, 혈통이 바른 상속인을 어느 정도까지 유지시키기 위하여 일부일처제가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는 보호막"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모순을 안고서야 비로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부일처제가 계속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만약 존재 이유가 있다면, 그것의 존재 이유와 그 정당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2. 매춘과 간통

 

위의 물음에 대한 논의에 앞서 잠시 매춘과 간통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먼저 매춘에 대해 보자.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 중의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뿌리가 깊은 매춘은 그에 대한 이해와 오해도 그만큼 깊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그럴듯한 이해를 든다면 매춘이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불가피한 요소라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도시의 매춘은 궁정의 하수도와 같다. 이 하수도를 막는다면 궁정은 곧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불결한 장소가 될 것이다"고 말할 정도이다. 여기서 '필요'란 강한 성욕을 지닌 남성을--또는 그 남성으로부터 선량한 여성을 보호하기 -- 위한 것이지만 '악'은 대체로 성을 제공하는 여성들의 몫으로 나타난다. 그에 반해 가장 대표적인 오해를 든다면 매춘의 원인이 주로 여성들에게 있다는, 즉 그 악의 주연이 여성이라는 인식이다. '賣春'이라는 한자어도 그렇지만, 매춘을 줄이기 위한 온갖 노력들이 매춘 여성의 경제적 능력의 향상과 도덕성의 강화에 집중되는 것도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매춘을 규제 및 처벌할 경우에도 주로 공급자를 대상으로 했고, 묵인할 경우에도 차선책으로 수요자를 위한 성병 등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가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춘이 비록 모종의 사회적 기능(필요)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극복되어야 할 대상(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춘에 대한 더욱더 올바른 인식도 요구되지만 그보다도 이미 드러난 다음과 같은 오해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급선무일 것이다. 우선, 매춘은 어느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히 말하면, 매춘은 시장에서 성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상호 관계에서 형성되는데 지금까지 매춘의 문제가 이런 단순 논리를 무시하고 쌍방의 문제가 아닌, 수요자인 買春男를 배제한 채 공급자인 賣春女 위주로 인식 또는 처리되어왔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빈곤이 매춘을 낳는다는 경험적 믿음 때문에 매춘녀를 위한 직업 교육이 실시되는 것을 말릴 수 없지만, 사실은 부가 증가함으로써 매춘도 증가한다는 그 관계성에 주목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그 富의 권력을 행사하는 買春男에 대한 교육과 처리를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매춘을 부분이 아닌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춘에서 경제적인 요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또 성에 대한 도덕적 재무장도 매우 긴요한 사항이긴 하지만 그러한 것만으로는 사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매춘이 경제나 도덕적 차원 외에 사회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또는 역사적인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 문제에 총체적인 접근과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매춘이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사회 및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앞서 매춘은 일부일처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자기 모순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매춘이 성의 이중적 규범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은 가부장 사회의 이중적인 성 규범 때문에 발생한 매춘이 결국은 끊임없이 그 이중적 규범을 강화·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토대가 되는 성의 이중적 규범에 대한 반성과 극복이 없는 한 매춘을 극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으로 간통에 대해 보자. 간통이란 혼인 후 성적 정절을 지켜야 할 아내가 법적인 남편 외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흔히 간통이 성적 욕망의 문제로서 단순히 아내의 바람피우기로 이해되고 있는데, 물론 그런 경우를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간통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엄격한 가부장제 하에서 간통이란, 그것이 드러날 경우에 그 당사자에게 가혹한 형벌과 엄청난 비난은 물론이고 그녀의 가족 또는 문중이나 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불명예를 가져다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통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이유가 단지 충족되지 못한 성적 욕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설사 그러한 이유로 간통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공포와 불안의 심리적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성적 쾌락을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간통이란 나타난 것으로 보면 성의 문제이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그것은 모종의 복수와 저항의 성격을 지닌 일종의 사회적 문제이다. 그 점에서 간통과 매춘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모든 사회적 권리와 수단이 박탈된 상태에서 여성이 자기를 억압하는 가부장권과 그 제도에 저항할 수 있는, 자기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이란 아마도 가부장제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로 존중받고 있는, 자기에게 있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방기해버리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성, 즉 결과적으로 간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간통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인간임을 파괴하는 행동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가부장제 하에서 간통이 근절되지 않았던 것은 일부일처제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성의 이중적 규범이 초래한 한편의 일탈과 다른 한편의 억압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에서 간통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존중받지 않는 사회에서 더 많았는지 조사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 부르트네일 : 신혼때에는 그림에서처럼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며 누구나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긴 세월 살다보면 본의아니게 외도를 할 수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의 외도가 많지만 여자의 외도도 차츰 늘고 있다. 어느 쪽의 외도이든 두 부부의 사랑에는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3. 그래도 일부일처제인가?

 

이제 앞서 말한 일부일처제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부일처제가 안고 있는 자체의 그 모순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만일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상반되게 나타날 수 있는데, 하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일부일처제의 존재 이유를 회의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비우호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일처제는 더욱 존속할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는 우호적인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이 어떻게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부일처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이렇게 간추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우선 존재 이유의 정당성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 자기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것으로써 자기를 파괴한 결과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또한 존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만일 계속해서 존재해야 한다면 그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서 갈수록 증폭되는 모순들을 보전하기 위한 억압과 조작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 인지가 발달하고 인권에 대한 인식도 크게 향상되었지만 매춘과 간통이 줄기는커녕 더욱더 조직화 산업화되고 하나의 유행처럼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성의 이중적 규범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관념들과 이데올로기가 조작되었지만 그것이 결국엔 일방적으로 강압적인 힘과 권력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사회 안에 여러 가지 성적 병리 현상을 양산하게 되는데, 매춘과 간통 외에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강간, 미혼모 문제, 기아(棄兒), 인신매매, 원조교제 등 사회와 가정과 개인을 파괴하는 온갖 부정적 사건들이 범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사회보다 더 원시적인 모계사회나 더 미개한 야만사회에서도 없었던 것들로서 도덕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성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그들 사회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심리적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일부일처하자고 해놓고서 정작 기회만 주어지면 일부일처를 파괴하고 있으니 그 이중성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일처제에 비판적인 자들은 실재하는 일부일처제는 이미 더 이상 일부일처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런 이유로 일부일처제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이라면 일부일처제를 대체할 가족제를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최근에 때때로 논의되는 일인가족제가 성의 이중적 규범을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한 하나의 반동임은 분명하지만 장차 그 대안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불투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그 모순 때문에라도 일부일처제는 더욱 확고하게 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유사 이래로 인류는 일부일처제를 실시하여왔는데 만일 그것이 그렇게 나쁜 제도였다면 理智가 뛰어난 인간은 분명히 그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였던가, 또는 그 제도가 스스로 다른 형태로 진화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직까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그만큼 아직까지 그것이 최선의 제도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의 모든 문명과 문화가 일부일처와 함께 성취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가장 좋은 제도를 사용하면서 아무 비용도 들이지 않고 공짜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반드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매춘과 간통이 그 비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좋은 것을 무작정 포기할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그 비용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하의 매춘과 간통은 궁극적으로 성의 이중적 규범성에서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줄이자는 것은 결국 완강한 그 규범의 경직성을 여하히 타파하고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가부장제의 관념 조작과 이데올로기가 성의 이중적 규범성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양성의 평등이 달성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그 부당한 미화와 일방적인 정당성을 논파하는데 새롭게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일부일처제 하에서 '一心同體'는 그간 부부의 최고 이상이자 가치였다. 그러나 말뜻 그대로 일심동체가 이루어진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겠는가?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 구호 아래 일심은 늘 남편의 마음이었고 동체는 늘 남편의 육체가 아니었던가. 거기에서 아내의 마음과 육체는 늘 소외된 채 방기되어 있었고 그녀의 주권은 늘 부재하였다. 개념적으로 볼 때, 일심동체는 하나라는 것과 같다는 것만을 주장하지만, 억압과 묵종과 상호 기만이 전제되지 않는 한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라고 해서 하나가 될 리가 없고 또 다른 것을 같다고 해서 같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그런 류의 기만성은 타파되어야 하고 차라리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둘이고 육체가 둘이지만 가족을 이루었으니까 함께 모으자는 의미의 '合心合體'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탄생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일부일처제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어느 입장에 설 것인가는 각자가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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