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롬
: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을 조각해놓고 그여인에 반해버렸다. 그러나 그 여인은 어디까지나 조각품이어서 껴안고
키스를해도 싸늘하기만 하다. 그래서 신에게 그 여인과 똑같은 여인을 보내주면 그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빌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살아 있는
여인으로 환생했으니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남자의 사랑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성과 사랑 09] - 성에서
사랑으로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성에서 사랑으로>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성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으나
앞으로는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강의의 제목이 <성과 사랑>입니다만 그 핵심적 주제는 성보다는 사랑에
있습니다. 저는 사랑이 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기 때문에 사랑에 앞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서 성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어떻게 성에서 사랑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그 성과 사랑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순결과 성적 자유>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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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지만 성적 자유를 위하여
오늘날 자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고, 그 점에서 성적 자유도, 그것이
자유인 한에 있어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성적 자유도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 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는 먼저 그 개념을
명료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흔히 성적 자유를 프리 섹스와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은 엄연히 서로 다른 것이다. 영어로는
성적 자유가 <sexual freedom>으로, 그리고 프리 섹스는 <free sex>로 표기되는데 얼핏 보면 그것들은
단순히 앞뒤 단어를 바꾸어놓았을 뿐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개념처럼 보이지만, 원론적으로 전자는 자유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섹스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더욱이 어의(語義)와 관계없이 통념상으로 프리 섹스가 무분별한 성행위를 함축한다면 자유는 그러한 무분별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더욱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성적 자유가 프리 섹스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성적 자유를 논의하는 목적은 성적 자유가 순결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그 이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점을, 그리하여 그것은 (순결과 같이 공히) 추구되어야 할 가치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순결과
성적 자유는 서로 모순되어 상호 배척하는 관계에 있고, 따라서 우리가 그 둘을 같이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의, 그 중에서도 특히
전래되어온 순결의 고착된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앞의 논의에서 육체 중심의 순결 이념이 반시대적이고 반인간적이며 비보편적임을 들어
그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하나의 덕목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개념상의 전의(轉意)가 요구된다고 하였고, 그러한 육체적 순결의 한계와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서 정신적 순결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정신적 가치가 순결로 들어오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그 조건 하에서만 순결과 성적 자유는 상호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적 자유에 관한 논의도 결국은 그 정신성과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적 자유가 순결과 함께 논의되다 보니 그것이 마치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로 보기 쉬운데,
그건 오해이다. 그간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성적 자유가 여성에게 더욱 긴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남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남성들이 연애나 매춘과 같은 짓을 마음대로 해왔다고 해서 성적 자유를 누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에 대한
개념적 검토가 요구되는데 그 결과 순결의 경우처럼 개념상 전의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자유가 인간다움과 행복의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반드시 정신이 개입되게 된다. 물론 그 정신은 유치하거나 미숙하지 않은 충분히
성숙된 정신이어야 하고, 만일 어떤 행위가 그러한 정신의 작용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 행위를 가리켜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매춘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육체적 순결관이 덕목이 될 수 없듯이 또한 정신이 부재한 채 육체만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는 또한 자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성 왜곡의 또 다른 현상일 뿐이다. 자유가 육체적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근본적으로 그것의 토대로서 정신이 개입되지 않는 한 육체적 자유는 종국적으로 주체적 의지를 상실한, 맹목이나 또는 무지에
의한 자기 기만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성적 자유는 남녀 모두의 문제이고 또한 본질적으로 정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이 없다면, 순결의 경우처럼, 진정한 성적 자유도 없게 된다. 사실 순결에서나 성적 자유에서의 요체는 바로 정신의 유무에 있는데,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정신이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는 각자가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제 성적 자유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의 규정성이 적용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마디로, 자유가 대내적 조건으로서의 자율성과 대외적인 조건으로서의 책임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선택이라고 할
때, 성적 자유도 또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같은 자유인데, 말의 자유와 다른 점은 말의 자유가 말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선택이라면 성의
자유는 성과 연관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판단과 그 판단에 따른 주체적 행위의 결과를 떠맡을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성에 관해
어떤 선택도 성적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성관계를 맺는 것도 성적 자유이지만 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도 성적 자유가 된다.
문제는 자유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만일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성에 관한 어떠한 행위나 또 어떠한 상태도
성적 자유에 포함될 수 없다. 예컨대, 맹목적으로 전래의 가치를 묵종한 결과 이르게된 순결의 상태나 단순히 욕망에 지배되어 저지르게 된 성관계가
성적 자유가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이 논의에는 부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하자. 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관계의 덕목으로서 성적 자유는 (또한 순결도) 언제나 자아의 주체적·능동적인 투사(投射)로서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신의 존재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신이라는 것이 그냥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가
성적 자유를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진다고 하겠다.
- 성에서 사랑으로 -
1. 사랑은 언제 발생하는가?
인간은 이 세상에 몸으로 태어난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둘로, 그리고 입장에 따라선 그 위에 영혼이
첨가되어 셋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태어날 때는 육체로 태어난다. 혹시 어머니 배속에서 육체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도 함께
만들어지고, 정신이 육체 속에 하나의 씨앗으로 잠재된 채 태어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태어날 때는 정신이 아닌 육체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단 육체로 태어난 자에게 육체는 그의 모든 것이다. 내 육체의 한계가 바로 나의 한계가 되고, 내 육체의 본성이 그대로 나의 본성이
되기도 한다. 나는 결코 내 육체 밖을 나갈 수도 없고 그 밖에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육체로 태어난 나는 우선 살아나갈
수 있는 완전한 도구로서의 성숙한 육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욕망(desire)은 그 작업의 기초가 된다. 존재론적으로 식욕이 끝난
지점에서, 즉 식욕의 한계점으로부터 출발하는 성욕은 그 역할이 식욕과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식욕처럼 그 작업에서 자기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욕망이 육체가 있는 곳에 있듯이, 성욕도 (그리고 성도) 언제나 육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성적으로 육체가 일단 완성된 단계가 사춘기이다. 육체는 불완전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이 육체로만 집중되지만, 육체가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에 육체의 한계 때문에 육체에서 더 이상의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 그
노력은 자연히 육체로부터 이탈을 기도한다. 육체로부터의 이탈이란 육체를 넘어서까지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이것은 완전함(존재)의 확산이라고
볼 수 있다. 육체(물체적 조건)를 채우려 하고 채워진 육체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 이것이 아마도 인간적 삶의 바람직한 궤적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육체로의 집중이 육체의 특징으로 인해 유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육체로부터의 이탈은 이탈의 특성 때문에 비유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그것의 주된 방식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이런 의미에서 느낌을 "영혼의
언어"라고 했을 것이다. 사랑은 이 느낌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성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성격은 사랑의 그 자체적 의미로서나 또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으로나 성의 성격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단서로서의 느낌에 대한 이해이다. 우선 느낌은 욕망하고
다르다는 것이다. 느낌이 육체와 정신의 경계에 있다면 욕망은 전적으로 육체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느낌이 성질상 나로부터 나가는 것이면
(그리고 때때로 넘나드는 것이라면) 욕망은 늘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느낌은 개방적이고 욕망은 폐쇄적이다. 흔히 느낌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할 때 사랑은 결국 재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 느낌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단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단서이기 때문에
거기(대부분 첫 느낌)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단서를 붙잡고 계속해서 추적할 때, 즉 중첩된 느낌의 세계를 거듭 열어나갈 수 있을 때 사랑은
발견되거나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사랑의 열쇠가 육체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과 나아가 정신성의 개발에 달려있는 것이다.
느낌은 육체와 정신의 중간 단계이다. 그래서 느낌은 육체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정신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지만
느낌이 어디로 향하느냐가 사랑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게 된다. 육체로부터 이탈하는 느낌에서 사랑이 시작하기 때문에 사랑은 기본적으로
비육체적인 것이다. 만일 육체로부터 시작된 느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을 때 사랑은 결국 육체를 못 벗어나고 육체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사랑은 성의 모습을 띄게 된다.
2. 성과 사랑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성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규정을 바탕으로 역으로 성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논의에서 볼 때 성과 사랑은 그것들이 속한 범주가 분명히
다르거니와 사랑한다고 섹스를 해야 할 (그리고 섹스를 한다고 사랑한다는) 하등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성과 사랑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사랑이 성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으로부터 성과 사랑의 상관 관계에 대해
말하면, 사랑은 성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성의 본질적 기능인 생식, 곧 생명체의 탄생과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점에서 성과 사랑은 둘 다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임을 함축한다. 모든 생명(성)은 화학적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육체를 이탈하는 느낌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생명의 육체적 측면이 성이라면 비육체적 측면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란 측면에서는 서로 관계 맺지만 사실상 범주가 달라서 그것들의 관계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 놓인 심연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떤 결단(의지)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극단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그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말하면, 섹스는
육체적인 것이고 사랑은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육체적이란 점에서 섹스는 자아 몰입적인 구심력(求心力)으로 작용한다면 사랑은 육체를
이탈하는 비육체적 느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타자 지향적인 원심력(遠心力)으로 작용한다. 때때로 사랑이 성의 특성으로 드러나는 것은, 지금까지
줄곧 말해온 바이지만, 육체만이 있고 비육체적인 감성이나 정신이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성이 현실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비현실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은 공적(公的)인데 반하여 사랑은 사적(私的)인 성격을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이 현실의 논리를 벗어나 비현실적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사랑이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것도 비현실적인 사랑에서는 치열한 현실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과 관련될 때 성과 사랑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을 공식화하고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결혼을 하게 되지만 대체로 결혼과 더불어 사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성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엄격한 현실적 공간으로 비현실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현실적인 논리와 가치만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여겨지는 결혼이 왜 현실적 공간으로 이해되는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성과 결혼은 공간적이기 때문에 시간적 성향의 사랑을 담는데
실패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개념에 부수되는 여러 차이점들이 또한 성과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또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시간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사랑은 공간적인 비실존적인 정(情)과 구분되고,
또한 그 점에서 <to love>는 결코 <to like>와 혼동될 수 없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