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Give & Take로서의 사랑 (1) | 성과♡사랑 ...... |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2916230 | |
▲ 루벤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제외한 모든 신이 초청되었다. 이에 분노한 에리스는 피로연에 가서 황금 사과를 식탁 위에 놓고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노라'라고 말했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믿는 세 여신이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제우스에게 물었으나 제우스는 여신들의 싸움에 말려들기 싫어서 왕인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목동이 된 파리스가 공정한 심판을 할것이라고 미루었다. 그런데 이 때부터도 뇌물이 있어서 헤라는 파리스에게 아버지한테 빼앗긴 왕국을 그가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했고 아테나는 그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아프로디테는 당시 세계적인 미인 헬렌과 그를 결혼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과연 파리스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어여쁜 여인을 차지하게 해주겠다는 여신 편을 들어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트로이 전쟁은 시작된다.
-------------------------------------------------------------------------- ▷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성과 사랑 11] - Give & Take로서의 사랑 (1)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저는 지난번 강의에서 사랑은 < Give & Take >라고 말했는데 앞으로 두 번에 걸쳐 그 < Give & Take >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사랑이 < Give & Take >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what) 주고받고, 왜(why) 주고받으며, 그리고 어떻게(how)에 주고받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각각에서 사랑을 위한 세 가지의 가치를, 그리하여 총 아홉 가지 가치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그 아홉 가지 중 몇 가지나 가지고 있고 그리고 갖더라도 얼마만큼이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사랑의 형편이 결정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1. 우리는 무엇을 < Give & Take >하는가?
사랑은 < Give & Take >이다. 그런데 주고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 것인가? 분명히 주는 것과 받는 것은 그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주는 것을 받을 수 없고, 받는 것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다른가? 일반화하여 말하면, 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고, 받는 것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줄 때에 분명한 것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준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짓으로 주거나 또는 다른 사람 것을 주는 것인데 그것이 주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준다고 해도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받을 때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받을 수 없다. 자기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받는다는 것은 아직 있을 만큼 충분히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즉 여전히 없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있을 만큼 다 있는데도 또 받는다는 것은, 가득 찬 컵에 물을 또 붓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무익할, 오히려 유해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기본적인 교환 원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욕심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줄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훔쳐서라도 주려 하고 받을 수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한계를 넘어서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실존)를 해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해서 안 되는 이유는 질병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질병의 주된 원인은 영양실조와 과로이다. 의사들이 처방이 끝난 뒤 환자들에게 "잘 먹고 푹 쉬라"고 권유하는 것은 그런 질병관을 반영한 것으로서 영양과 휴식을 취해서 건강해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엔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성인병이 만연해 있다. 의학적으로 성인병의 원인이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영양과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성인병을 잘 먹고 잘 살아서 얻는 선진국형 질병이라 하지 않는가. 이것은 마냥 받아들이는 것이 존재를 위해서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 Give & Take >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덕목)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우선 < Give & Take >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알아야만 자기에게 있는 것을 제대로 줄 수 있고 없는 것을 주려고 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 된다. 또 그래야만 받을 경우에도 있는 것을 받지 않고 없는 것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자아인식능력 또는 자의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를 안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육체적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욕망이나 정서적 상태는 물론 가치관 인생관 등의 정신적 세계까지 자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기에게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가를 아느냐의 여부이다. 예컨대, 젊은이는 젊음이 있는 사람인데 그 젊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는 결코 젊음을, 그리고 그 젊음에 부속된 무수한 다른 가치들을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항상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서 우리의 자아인식도 변할 수밖에 없는데, 그에 따라 < Give & Take >의 내용도 변하면서 사랑도 또한 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삶이 변화하는데도 그 변화를 따르지 못할 때 사랑은 더 이상 존재에 활기(活氣)를 주는 사랑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존재의 족쇄가 되기 쉽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자아성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아발견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랑은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 또는 적어도 자아인식을 형성하려는 사람이 추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결여한 철없는 아이들의 놀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능력이 없다고 사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대체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익숙한 육체적 욕망이나 습관적인 감정들을 중심으로 자아인식이 작용한 경우로서, 이런 사랑의 특징은 처음에는 강력한 흡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생명성에 플러스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재앙을 초래하고 만다는 점이다.
둘째로, 사랑은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자원이,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고자 해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결과적으로 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 Give & Take >가 곧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줄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 필요한데, 그 점에서 그를 위한 자아개발(또는 새로운 자아인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인 것, 정서적인 것, 나아가 정신적인 것을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육체적인 것은 우리에게 맨 먼저 형성된 것으로서 그리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대체로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계기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랑이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육체(또는 물질)만으로는 결코 만족스런 세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진정 하나의 통합적인 세계를 위한 정서와 정신, 더 나아가 영혼을 반드시 요구되는데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사랑이란 그런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육체만으로는 좋은 사랑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을 게을리할 때 남게 되는 것은 결국 육체밖에 없게 되고, 그래서 사랑은 결과적으로 육체(섹스)와 물질로 계량화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이외의 것이 요구될 때 허위와 폭력과 억압 등이 사랑의 이름으로 그것을 대치하게 된다. 우리가 좋은 사랑을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살피기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 줄 수 있는 육체적 능력을 더욱 풍부하게 신장해야 함은 물론 자신의 정서적, 정신적, 영혼적 자원의 개발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셋째로, 자기를 타인에게 개방하는 개방에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이 준다고 했을 때,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핵심적인 사항은 상대가 받을 수 있는 것을 줘야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주려고 하는 상대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 Give & Take >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과 없는 것, 즉 장점과 단점을 다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내가 받는다는 것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없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가장 큰 용기란 무엇보다도 위기나 위험 가운데에서도 의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단점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 Give >하려는 상대에게 자기의 단점까지를 포함하여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또 다른 속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상대를 볼 때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보면서 그 결과 상대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감추고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하고 또 행동하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대로 존재하고 행동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즉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이 요구된다. 자신을 긍정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독자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존재의 그물망적 존재이다. 내가 있기 위해서는 우선 내 부모와 내가 태어난 가정 환경이 있었고, 또 내가 속해 있는 이웃과 사회와 국가 등이 있었다. 따라서 나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둘러싼 이런 모든 조건을 승인한다는 것이 되고, 그 때라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런 승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 Give & Take >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좋은 사랑을 만들 수 없게 된다. 자기의 처지를 당당히 승인하지 못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은폐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랑에 가장 독소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질병이 싫다고 하더라도 그 질병을 인정할 경우에만 비로소 질병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사랑을 위해서도 새겨둘 가치가 있다.
2. 우리는 왜 < Give & Take >하는가?
그러면 이제 왜 < Give & Take >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 이야기되었지만, < Give & Take >는 관계의 방정식으로서 관계는 결핍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결핍은 관계를 통해 충족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결핍된 존재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결핍을 충족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데 결핍의 충족이 그것의 한 의미가 될 것이다. 다만 사랑의 < Give & Take >가 반드시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주는 것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핵심은 타자로부터 받은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결핍(단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먼저 줘야한다는, 달리 말하면 비워야한다는 것이다. 이미 더 들어갈 빈 공간이 없이 꽉 차 있는 통 속에 들어 있는 없는(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들어 있는 있는(충분한)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상태든 존재는 항상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랑이 항상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나는 너를 통해서 결핍을 벗어나 충족될 수 있다는 인간관, 이것이야말로 사랑을 위한 기본 태도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사랑은 대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불평등하다. 인간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있는 것을 주고 없는 것을 받는 < Give & Take >의 사랑은, 비록 처음에는 있고 없는 것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종국에는 서로간의 차이를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없기 때문에 의존적인 꿀린 관계였지만 나중에는 없는 것들을 채워 대등한 맞선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등한 관계란 그것이 곧 인격적 관계임을 함축한다. 인격적 관계가 아닌, 예컨대, 사회적 또는 경제적 관계에서는 불평등을 극복하고 대등하게 된다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관계란 소유하거나 지배하거나 명령하는 관계가 아님을 의미한다. 소유란 그 대상이 물적 대상일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대등한 인격적 관계로서의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은 본질적으로 소유적 관계로서, 이상적인 결혼이라면 일방의 타방에 대한 일방적 소유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는 쌍방적 소유의 형태일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소유로 생각하는 이유는, 사랑과 결혼을 연속적 과정으로 여긴 나머지 결혼의 관점에서 사랑을 보기 때문이거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잠시동안의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소유감을 사랑 전체로 확대하여 보기 때문일 것이다. 소유의 대상은 본질적으로 시간성을 갖지 않은 공간적인 것들이다. 시간성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으로, 생명이 없는 사물을 소유할 수는 있으되 인간을, 일반화하여 살아있는 생물체들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결혼이 진정으로 합치되면 그 이상 좋을 수는 없지만 대개의 경우엔 사랑이 결혼으로 진행된 이후에는 시간적인 생명은 어느듯 사라지고 공간적인 소유만이, 그 결과 지시와 명령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대등한 관계란 상호 존중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가리키는가? 과연 사랑하는 나와 너는 어떤 경우에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인가? 존중이라는 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할지 모르지만, 그것에 관한 핵심적인 사항은 내 의견이 하나의 의견으로서 받아들여질 때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에도 언급되겠지만, 의견이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무엇이 그것을 보상한다고 하더라도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않은 것은 결코 존중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다른 것에서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견이 다른 의견으로서 상대로부터 존중받는다면 나는 존중받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상대의 의견을 가벼이 여기거나 그에게 묵종과 침묵을 요구하지 않는다. 앞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존중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둘째, 별리(別離)가 사랑을 위한 하나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있는 것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의존하는 꿀린 관계에서 대등한 맞선 관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그런 관계에서는 상대를 소유하거나 지배·명령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이 존중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가 이루어질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그 이후의 결말은 어떤 것인가? 계속해서 그 관계를 유지하든지 아니면 그 관계를 그만 두든지, 그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 Give & Take >가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만 둔다는 것은 < Give & Take >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 또다시 두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는데,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부재하지만 그간의 사랑의 결과 형성되었던 습관의 힘으로 그 관계에 머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 관계의 청산이 곧 別離가 될 것이다.
별리(別離)는 사랑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결코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시간적인 사랑은 공간적인 상태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을 주로 공간적 관계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의식에서는 마치 어머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헤어진다는 것을 결코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응석이나 투정, 또는 애걸복걸로 대하게 되는데 근본적으로 사랑을 존재적 차원이 아닌 오직 심리적 차원으로 본 결과이다. 이럴 때 사랑은 비장(悲壯)하지 않고 실존의 세계를 떠나 유치(幼稚)하게 된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하였듯이, 만남과 헤어짐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관계인데, 도대체 일방적으로 만남만이 인정되고 헤어짐은 용인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상태라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만남의 방정식이라면 사랑은 또한 헤어짐의 방정식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남이 유의미한 것이었다면 헤어짐도 또한 사랑을 위해 매우 유의미한 행위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別離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은 고통이다. 만일 사랑을 즐거운 것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을 알지 못한 상태로 그 또한 유치(幼稚)한 것이다. 사랑의 본질을 생명성이라고 하였는데 생명에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듯이 사랑에도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사랑한다함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 고통을 극한까지 밀고가면 우리는 죽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생명을 위한 섹스에 죽음이 동반되듯이 사랑에도 죽음이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대변되고, 그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것은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사랑과 죽음의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여기서 쌍방이 < Give & Take >적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자. 과연 사랑하는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 Give & Take >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끊임없이 < Give & Take >가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그것은 그 당사자들이 끊임없이 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한 곳에만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서 주고받는다면 서로의 결핍을 금방 채울 수 있지만 서로 같이 움직이면서 주고받는다면 새로운 상황이 계속 창출되기 때문에 결코 < Give & Take >가 완결될 법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랑은 달리기에 비유된다. 우리는 사랑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은데 사랑만이 영원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그것은 허위의식이고 무지에 의한 교만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능한 단 하나의 길이 열려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랑에 참여한 두 사람이 함께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즉 달리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변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사랑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
'敎育.學事 關係'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사랑의 종류와 다양성 (0) | 2005.12.15 |
---|---|
12. Give & Take로서의 사랑 (2) (0) | 2005.12.15 |
10. 사랑의 구조와 요소 (0) | 2005.12.15 |
09. 성에서 사랑으로 (0) | 2005.12.15 |
08. 순결과 성적 자유 (0) | 200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