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림트
: The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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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내용은 수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글씨 크기, 색깔 등은 제가 보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 이 문서에 대한 모든
권한은 강의를 하신 동덕여자대학교 박홍태 교수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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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 13] - 사랑의 종류와
다양성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사랑의 다양성에 대해서입니다. 사랑의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결국 사랑의 종류에
대한 논의가 되겠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종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런 다양성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원리인 < Give & Take
>에 의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 Give & Take >를 가지고
기존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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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지금까지의 논의는 사랑이 < Give & Take >라는 것이었다. 이 법칙은 모두
열두 개의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데, 먼저 그 구조적 요소로서 관계성, 생명성, 자발성이 요구되었고, 세부적으로 들어갔을 때 무엇을 주고받을
것인가에서 자아인식, 자아개발, 자아개방이 요구되었고, 다음으로 왜 주고받는 것인가에서는 대등성, 별리성, 진실성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주고받을 것인가에서는 대화, 인내, 자유가 요구되었다. 사랑에 요구되는 것이 비단 이것들만이 아니겠지만, 이것들은 좋은 사랑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비감정적 즉 존재적 또는 실존적 차원의 가치로서 기타 다른 가치들은, 심지어 사랑의 감정적인 요소까지도 이것들을 통해 확보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 Give & Take >가 사랑의 원리라면 그것으로써 기존하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과연 실제로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랑은 시대에 따라 각각 그 모습이 달랐다. 일종의 매춘부인 헤타이라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인의 사랑으로부터 종교적 사랑, 예의바른 사랑이라고 하는 궁정식 사랑(courtly love), 낭만적 사랑, 육체적 사랑, 사이버 사랑
등등 온갖 사랑의 행태야말로 그 시대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시대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에 벗어난 감이 없지 않지만 기왕에 좀더
말하면, 시대의 사랑이란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달리 말하면 여성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드러난 모습이 어떠하든 사랑에서의 주인공은 결국 항상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본질적으로 여성적 가치를 표상하기 때문에 여성이 그 주인공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사랑은 더욱더
거칠어지고 격렬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 거기에 경쟁적이고 투쟁적인 남성적 가치가 개입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사랑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을 아마도 결혼하듯이 하고 또 섹스하듯이 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듯이 결혼하고 또
섹스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본 모습으로 되살아날 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관한 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사랑이 언제 제 모습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을 경쟁과 투쟁의 남성적 가치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생명와 평화 등 사랑이 그 본래의 여성적 가치를 회복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사랑이 가져오는 하나의 사회적 효과라면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적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그 주체가 될 수 있는 여성들마저 경쟁과 투쟁으로 무장하여 여성적 가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사랑을 위해서는 하나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의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들을
유형별로 분류한다면 그것은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본래 서구적인 것,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적인 것으로서 그리스어에서는 그 외에도 색정의 에피튀미아(epithymia), 보호의 스토르게(storge) 등이
사랑의 범주에 포함되었지만 위의 세 가지가 사랑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랑들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에로스와 필리아와 아가페가 사랑의 원리인 < Give & Take >로써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에로스가 육체적(또는 성애적) 사랑이라면, 필리아는 정신적(또는 우정적) 사랑이고 아가페는
영혼적(또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 Give & Take >에서 보면그것들의 차이는 < &
>에서 나타난다. 사랑에서의 < & >는 생명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에로스가 육체 중심의 생명이라면 필리아는 정신
중심의, 아가페는 영혼 중심의 생명인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그것과 연관되어, 생명을 주고받되 그 성격에 따라 제각기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 영혼적인 것을 주고받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육체가 없다면 육체를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육체적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육체가 미숙하거나 허약하여 그것을 행할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주고받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육체적 사랑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사랑을, 즉 에로스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숙한
육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사랑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그렇듯이 필리아나 아가페의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필리아의 대표적인 형태를 말하면 대등적 관계란 의미에서 부부애와 친구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부부와 친구 사이에 주고받을 수 있는
정신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 관계는 결코 대등성의 필리아적 관계를 이룰 수 없게 된다. 필리아를 위해서는 정신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정신이 부재하는 곳에 항상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부부와 친구 관계가 흔히 권력적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전락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은 아가페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단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아가페적이다. 그러나 그 아가페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이, 그것도 성숙한 영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재할 때 영혼성이 없는 사이비 영혼들이나 미숙한 영혼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일신과 일가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부르짖는 기도가 아가페가 될 수 없는 것은 거기에는 성숙한 영혼이 부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에로스와 필리아와 아가페를 이렇게도 설명할 수도 있다. 대등성의 필리아를 < Give
& Take >적 관계라면, 에로스는 < -- & Take >적이고, 아가페는 <Give & --
>적 관계라는 것이다. 이들 관계는 존재론적 발전의 단계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에로스에서 필리아로, 그리고는 다시 아가페로 이행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 -- & Take >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탄생과 육체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없는 곳으로
가소성(可塑性)만을 가진 미숙한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하나의 삶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물질을 받아들여 그 결과
하나의 육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줄곧 받아들이기만 한 육체는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의 천성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에는 즉 물질적 관계에는 기본적으로 공유가 즉 나눔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육체적 나눔을 그것도 생명의 형태로서 실현하기 때문인 것이다. 모름지기 여성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도 위대하고 경이로운 神聖을 성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 & Take >는 바로
에로스의 그러한 성질을 표상하고 있다.
형태상으로 말하면 계속 받아들이면 충족하게 될 것이고 충족하게 되면 나누어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 -- & Take > 단계가 < Give & Take >적 관계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Give & Take >에서 처음에 주고받는 것은 아마 육체적 곧 물질적인 것일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만 익숙한 자의
세계란 온통 그것밖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육체와 물질은 본질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물질을
공유하려한다면 다른 특별한 이념이 요구되는데,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와 기독교 정신의 관계에서도 그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물질적 충족은 정신적 충족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달성된다는 것인데, 물질적 충족을 위해서는 필히 정신적인 것이 요구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온전한 의미에서 두루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육체(물질)가 아니라 정신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요청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스승이다. 나에게 부모가 육체를 낳아주었듯이 스승은 나에게 정신을 나아주는 것이다. 에로스 단계에선 부모가 낳아준 육체를 키웠듯이 필리아
단계에서는 스승인 낳아준 정신을 키우는 것이다. 현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누구에게도 스승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스승이 없다는 것은 곧 정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스승이 부재한 곳에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와 같은 대중스타나 명성이든 재화든 권력이든 뭔가로 한몫 잡은 기회주의자들,
아니면 TV드라마나 비디오, 영화 등이 우리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정작 < Give & Take
>단계에 이르렀지만 나누어줄 정신이 없는 것이다. 사실 남녀의 관계에서 < Give & Take >에 이른다는 것은
대단한 성취이다. 에로스의 단계를 좀더 들여다보면, 정서가 작용하는 단계까지를 포함하여 여러 단계를 말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남녀관계는 거기서
맴돌 뿐이며, 가부장제의 온갖 장벽들을 뛰어넘으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하게 주고받는 필리아의 단계까지 이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 Give & Take >의 단계는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 Give & Take >단계 이후, 사랑은 < Give & --
> 단계로 향한다. 아가페의 단계이다. 아가페는 도식에서도 나타나있듯이 주기만 하고 받지 않은 단계이다.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아가페가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비록 그 결과가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삶의 탄생을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외형상 죽음을 향한 행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가페적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가 예수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오른뺨을 치거던 왼뺨을
내주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데 오른뺨을 치는데 어떻게 왼뺨을 내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도 같이 쳐야 되지 않겠는가? 원수를 어떻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원수는 죽이도록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아가페의 실체가 이것이라면, 아가페를 위해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모든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거대한 내적인 혁명인 것이다. 혁명이란 안과 밖을, 위와 아래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왼뺨을 내줄 수 있고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 -- & Take
>적 에로스에서 < Give & Take >적 필리아로의 전이가 그래도 가능한 것이, 타고날 때부터 친숙한 <
Take >가 계속 작용하고 있어 그 세계가 그래도 생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가페는 그 < Take >가 완전히 소멸된
< Give & -- >적 관계로서 자기 중심적인 < -- & Take >가 아가페와의 사이에 놓인 깊은
단절을 뛰어넘어 자기 소멸적인 이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혁명적 결단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가페가 에로스와 필리아에 없는
하나의 특별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도, 그래서 사랑이 진정 하나의 혁명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진정 자신을 향해 확 뒤바꾸는
혁명가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생명까지 담보하는 사랑을 할 수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진정 사랑을 기도한다면, 필히 자신을
뒤집어엎는 혁명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Love is Touch
곡명은 확실히 모르지만, 노랫말 중에 < Love is Touch >라는 구절이 들어있는
팝송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런 곡명의 팝송도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사랑이 접촉이라는 것인데, 사랑에 대해 참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렇다. 사랑은 접촉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공유한다는 점에서 요즈음의
접속(access)이라는 말과 상통한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촉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아야 한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접촉이란
예컨대, A와 B라는 두 원으로 말하여, 두 원이 원을 경계선으로 맞닿아 있는 것으로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상태이다. 서로를 침범하여
조금이라도 겹쳐 있으면 접촉이라고 할 수 없다. (도형을 그리지 못해 유감임) 그래서 접촉이란 A는 계속 A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결코 B에
의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음) B와 맞닿아 있고 그 접촉면을 통하여 B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B도
또한 A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접촉하는 것인데 반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결혼이란 서로 침범하여 공유하는 영역을 넓혀 가는,
그리하여 마침내 사적인 영역이 소멸되는 것이리라. < Love is Touch >란 사랑도 그렇다는 것인데,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사랑이란 자신을 없애는 것도, 또 자신을 상대에 덮어씌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접촉할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라는 것이고 또 접촉이 새로운 접촉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 Love is Touch >라 하더라도 문제는 어떻게 접촉하느냐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하여 네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①physically touch, ②emotionally touch, ③mentally
touch, ④spiritually touch이다. 순서로 보면 ①육체적인 것에서 ②정서적인 것으로, 다음에 ③정신적인 것과 마지막으로
④영혼적인 것으로 진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먼저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이 순서이겠지만 어떤 이는 육체적인 것이 먼저라면 어떤 이에게는 정신적 접촉이 또 다른 이에게는 영혼적 접촉이 먼저 올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네 가지 사랑을 모두 섭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금욕주의적 플라토닉 사랑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접촉이 어느 한 부분에만 집중하기 때문인데 그와 같은 이치로 육체적 사랑도 사랑의
편식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physically touch와 emotionally touch가 에로스라면 mentally
touch는 필리아가 될 수 있고 spiritually touch는 아가페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 Give
& Take > 원리와 관련되는가는 앞에서 살펴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