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좋은 사랑을 위하여 | 성과♡사랑 ...... | |
출처: http://blog.naver.com/mirror/3234367 | |
▲ 브레케르, 다프네는 숲의 요정으로서 그 미모가 출중하지만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잘생긴 아폴론이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붙잡으려하자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구 도망친다. 그녀는 마침내 자기 어머니인 강의 여신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갑자기 강물을 쏟아 부어 둘 사이를 떼어 놓지만 그 딸은 그 물에 익사하고 그곳에서 월계수가 자란다. 그녀를 잃고 슬퍼하던 아폴론은 그 월계수를 따서 월계관을 만들어 쓴다. 따라서 승리의 월계관이 아니고 실연의 월계관인 셈이다.
-------------------------------------------------------------------------- ▷ 2001년 2학기 때 제 친구(?)가 OCU로 수강했던 [성과 사랑]이란 강의의
텍스트입니다. --------------------------------------------------------------------------
[성과 사랑 14·끝] - 좋은 사랑을 위하여
안녕하세요? 박홍태 교수입니다. 오늘 주제는 좋은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공부하였는데, 이제 그 결론으로서 우리는 좋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해 볼 기회를 갖겠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련하여, 사랑이면 사랑이지 무슨 좋은 사랑인가 하고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최고의 가치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유 있는 반문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들은 그간 사랑을 사랑으로 수용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온갖 행동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미화되었으며, 사랑의 일부분이 마치 그 전부인양 정당화되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정신적 질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사랑이라 하였고 섹스와 헌신이 분명히 사랑의 한 요소이긴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곧 사랑의 전부인양 일방적으로 강요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 아닌 것이 사랑이 되고 또 사랑은 사랑 아닌 것이 되는, 이른바 사랑의 혼란에 우리는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부득이 사랑을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으로 구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사랑의 최악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사랑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을 사랑도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무작정 생각 없이 뛰어들다가 나중에 가서는 엄청난 인생의 비극을 결과하고 거기에 휩싸이는 광경을 우리는 보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언제나 우리 학생들이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강의는 그 때문에 준비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번으로서 마지막 강의가 되겠습니다만, 저는 아직까지 사이버 강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의도한 만큼 충분히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여러분과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좀 더 잘 해보리라고 다짐하면서 여러분들의 성과 사랑이 부디 여러분 인생의 아름다움과 참(眞實)을 탄생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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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에는 반드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그 점에서 결코 예외는 없다. 심지어 좋은 것들도 다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또다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되고, 나쁜 것들도 다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또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냐 아니면 상대적인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따름이다. 여기서의 관점은 기준이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즉, 기준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목적과 수단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또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준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기준은 이념으로 절대화된 공간에서나 가능할 뿐, 삶의 세계에서는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공간에서 적용될 절대적인 기준을 상대적 공간으로 끌고 내려와 무리하게 적용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우리는 과거의 엄격한 종교적 사회 등의 경우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기준의 상대성이 용인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문제되는 것은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다. 기준을 가장 높게 잡으면 모든 것들이 다 나쁜 것이 될 것이고 가장 낮게 잡으면 모든 것들이 다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는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매(愚昧)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준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점은 기준 자체의 유무도 그렇지만 정작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랑도 예외일 수가 없다. 즉, 우리는 사랑이면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환상이나 착각일 뿐, 사랑에도 분명히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로 더 이상 고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현실적으로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어떻게 구분하여 좋은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여하히 나쁜 사랑을 피해 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사랑에 관한 하나의 이론으로서 앞에서 살펴본 <Give & Take>의 12 가지 가치나 또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그 밖의 사랑의 다른 가치들을 사랑의 매 단계마다 차분하게 따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사랑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는 낡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일단 격정적인 감정으로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에,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이론적 접근이, 거기에 익숙해 있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제로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기에는 사랑은 너무나 절박하게 휘몰아치고 애절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의 간편한 실천적 전략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그럼 다른 관점에서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자. 사랑이란 하나의 단계가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면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 째 단계가 사랑에 대한 인식이라면, 마지막 단계는 사랑의 실천이고, 그 사이에 있는 중간 단계가 사랑에의 의지이다. 그런데 우리들 사랑의 현실에서 가장 위험스런 면은 대부분의 사랑이 인식이 없이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고 감정이 통하는 적당한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연습과 훈련을 반복하면서도 사랑하기 위해 어떤 연습이나 훈련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글쎄, 그렇게 해서 결혼하고 섹스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식은 행위의 나침반과 같은 것으로 인식 없이 행동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설사 나온다하더라도 우연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목표에 적중하지 않거나 좋은 결과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비만아의 경우가 그 좋은 실례가 될 수 있는데, 아이의 비만은 무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이 낳은 결과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강의가 주로 인식의 문제에 모아졌던 점도 한편으로 그러한 현실적 상황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식이 중요하더라도 사랑에서 핵심적인 것이 실천이라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식이 있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랑은, 즉 인식만의 사랑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표현은 단순한 인식적 차원을 뛰어넘는 실천적 차원의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의지이다. 사랑에의 의지가 작용할 때에 비로소 사랑의 실천이 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이 없으면 의지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의지는 작용하고자 하는데 정작 인식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본래부터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적 욕구가, 이른바 본능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들이 대체로 본능적 욕구를 발산하는 양태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굳이 의도된 인식이 없더라도 순수한 생명의 느낌으로 충만되어 있다면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삶의 현장에서 도대체 순수한 생명의 느낌이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네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데 생명이란 본디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노예가 되고 있는 남자들의 경우엔 애당초 어림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인식의 중요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 실천이고 그 실천이 의지라고 해도 인식이 없으면 사랑은 결국 이루는 것 없이 십중팔구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인식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상식적인 가치관으로서 굳이 체계화된 이론적 인식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건전한 상식에 바탕을 둔 인식이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좋은 사랑을 위한 첫째가는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이 인식을 바탕으로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좋은 사랑을 위해 "사랑의 기준을 가져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사랑을 점검하라는 것이 이 강의가 의도하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인데, 그것은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참여하는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 만든 우리의 상황을 동시에 편파적이지 않고 공평하게 살필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흔히 그 대신에 두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사랑의 기준을 상대방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치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랑이란 상대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고, 그 결과 그 이후의 모든 것이 상대의 반응 여하에 따라 전개되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자기의 감정에 따라 사랑의 양상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사태 진전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만 사실은 내 자신도 내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원칙이 없는 상태에서의 사랑은 일반적으로 격정적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격정이란 지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격정의 끝과 함께 사랑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한 때의 격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의 기준>이 요구되는 것은 사랑 앞에서 누구든 단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애걸복걸 구걸하거나 응석·투정을 부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위협하거나 애교 피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단호함은,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별리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내가 너를 만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너로부터 존중받고 그 존중을 통해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위반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세속적으로 생각해보자. 나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키워준 부모도 나를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존엄한 존재이다. 사실 이 세계의 어떤 것도 나를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만난 상대가 사랑의 이름 아래 나의 존엄성을 짓밟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호히 그 만남을 청산해야 되지 않는가. 나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하고도 헤어지고 종국에는 나 자신과도 헤어지는데 그 상대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예컨대, 갑순이가 갑돌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남성을 다 포기하고 (곁에 있는 아주 멋진 을돌이, 병돌이 등을 다 포기하고) 갑돌이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단은 얼마나 희생적이고 비장한가. 그런데 사랑한다면서 갑돌이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면 갑순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갑순이로부터 존중받지 않는다면 갑돌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럴 때 단호함은 자신의 인간다움의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예비할 때 삶이 성실하고 치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별리성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때때로 질곡이 되는 경향이 있는데 단호함은 그것에 대한 대비인 것이다. 말하다보니 사랑의 부정적 사태에 대한 단호함의 기능만을 말한 것 같은데 사실 단호함은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 그 미답의 세계로 나아가는 대 모험인 것이다. 심리적 두려움과 그것을 방해하는 현실적 장애가 없을 수 없다. 오히려 위대한 사랑일수록 그런 장애적 요소가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 사랑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 바로 단호함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헤어질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오직 그런 태도만이 좋은 사랑을 담보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나무와 같은 사랑
우리 말 중에 <나무>라는 낱말처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왜 좋은가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사랑이란 나무와 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 창밖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낙엽이 진 뒤 앙상한 줄기와 가지만을 보여주고 서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 나무의 전부는 아니다. 그 나무는 우리에게 보여지지 않은 부분을 자신의 진실한 한 부분으로 감추고 있는데, 그것은 뿌리이다. 누구든 나무를 보면서 그 뿌리를 생각하거나 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대단한 정신과 감성의 소유자이다. 여러분들도 나무를 보면서 일부러 뿌리를 생각하거나 보는 연습을 해보기 바란다. 꾸준히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정신과 감성이 열리면서 세계가 넓어진 것을 느낄 것이다. 각설하고, 그런데 여름철 활동기의 나무를 생각할 때, 잎은 태양을 향하는데 반해 뿌리는 물을 향하고 있다. 잎은 차기 때문에 태양의 불을 향하는 것이고 뿌리는 뜨겁기 때문에 찬 물을 향하는 것이다. 아마 잎이 차거운 것은 뿌리의 물기 때문이고 뿌리가 따뜻한 것은 잎의 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인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무에서 그 물과 불이 따로 떨어져 있는 아니라 그것들이 전체 속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훈은, 생명이란 이렇듯 물과 불과 같은 모순들이 하나로 통일되었을 때 생성된다는 것이다.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나무의 자태 자체도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의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성의 이원성에서도 언뜻 조금 언급한 적이 있다.
(여담이지만, 우리 몸도 물과 불로 되어 있고 지구도 물과 불로 되어 있다. 그 물의 구성 비율이 얼추 같다. 그래서 지구도 생명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대변하는 관점이 바로 풍수사상인 것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지구가 인간에게 저항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태계와 환경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생명 있는 것을 절대로 억압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물과 불이 따로 놀 때, 그것은 유기체에겐 곧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수승화강(水昇火降)해야지 그 성질대로 수강화승(水降火昇)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물과 불이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불인 심장 기운이 아래로 향하고 물인 신장 기운이 위로 향해야지 그 성질대로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절대로 성질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말한 바가 있다. 불기운이 위로 솟구치면 뇌혈관이 터지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니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화를 내어 잘 돼야 간이 손상되는 것이다. 권유하건대, 여력이 있으면 동양의학을 공부하기 바란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사랑도 그 본질이 생명이라는 것이고, 그 점에서 생명의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나무의 교훈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물과 불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함께 아우러진, 즉 水昇火降의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와 같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물과 불의 모순을 통합하는 일이 진정으로 어렵기 때문에, 생각컨대, 아마도 그런 사랑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이르면 인간이 자연보다 결코 위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리가 불의 사랑과 물의 사랑으로 분절하여 그것들을 따로따로 추구하는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젊은이들은 육체의 힘에 이끌려 격렬하게 자신을 태우는 정열적인 불의 사랑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차라리 재가 되어 피닉스를 탄생시킬 것이 아니라면, 그 능력이 없다면 물이 없는 불만의 사랑을 필히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무의 교훈인 것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흉내를 내다가는 불의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뿐이고, 그이는 그 상처를 보면서 평생 자신의 어리석음에 얽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과 불의 모순을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서로 가까이 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불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들에게 진정 좋은 사랑을 하고 싶은 의지가 다면 반드시 물의 사랑을 배우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강의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를 보내드린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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