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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키스 / Kiss

鶴山 徐 仁 2005. 12. 12. 09:14


 
1. 키스. 그것은 입과 입이 서로 열리면서 혀와 혀가 서로 자신의 것이기를 포기하고 스르르~ 상대에게 내맡기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혀를 통해 건네지는 상대의 체액은 질척거리는 느낌과 함께 성감대를 극도로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기에 키스를 하고 싶어하는 혹은 하길 원하는 필녀필남들은 이 점을 사전에 꼭,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키스는 리허설이 필요없어 보인다. 그 앞에서 사전연습이란 낱말은 공허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든 연인들의 키스는 일종의 돌발상황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2. 격렬한 키스는 상대의 몸을 오그라붙게 만들기도 한다. '오그라붙는'은 동사 '오그라들다'와 '붙다'의 합성어다. 말그대로 키스를 하는 연인들의 마음은 오그라든다. 안쪽으로 쪼그라든 마음은 오그랑오그랑 작아지거나 오목하게 되는데, 심장이 얼어붙는다,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쪼그라들고 오그랑하게 된 마음은 급기야 딱 들러붙어 도무지 인력으론 뗄레야 뗄 수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이 지경 혹은 경지를 가리켜 흔히 오그라붙는다,라고 표현한다. 격렬한 키스의 경우, 두번째 키스에 이르를 즈음이면 첫번째 키스에 비해 질감이 반으로 줄어들고, 세번째 키스에 다다를 즈음이면 두번째 키스에 비해 농도가 반의 반으로 희묽어지며, 네번째 키스에 안착할 즈음이면 세번째 키스에 비해 반응의 세기가 반의 반의 반으로 세감細減된다. 심지어 그것의 세기는, 만약 그걸 수치화 할 수 있다면, 음성반응을 보이면서 소숫점 이하로 결국 내려가고야 만다. 이곳에선 그걸 가리켜 더이상 키스라고 하지 않고 뽀뽀라고 부른다. 이 지경에 당도하게 되면 반응양상에 있어 농밀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이는데, 우린 그걸 가리켜 '친밀함'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반향증상反響症狀'-다른 사람의 몸이나 말짓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증상- 으로 불리울만한 친밀함에 대한 일차적 진단을 내린다면, 언제까지고 영원하리란 연애감정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라고, 맨 먼저 조언을 드리고 싶다. 왜냐면 롤랑 바르트의 말마따나,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Kiss VI> by Jean Cocteau
     
    3. 키스는 쇠락을 동반한다. 쇠락은 연인들의 빛바랜 한숨어린 키스에서 비롯된다. 키스는 하면 할수록 닳는다. 그리고 낡아간다. 색깔 또한 바래지며 추레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서일까? 악셀(Evelyn Axell)의 '키스'가 사랑에 감전된 연인의 모습을 농염스레 캔버스에 옮겨 놓은 거라면, 전방위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의 '키스'는 사랑에 눈 먼 연인의 모습을 다소 희화화戱畵化 하는 방식으로 무채색 백상지 위에 툭, 던진 형용이다. 지금 콕토는 사랑의 허구를 폭로하고 있다. 장 콕토의 키스는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희화화戱畵化의 최종 기착지가 블랙코미디이듯 콕토의 그림 역시, 씁쓰레한 사랑이 마지막 기착점이다. 가늘게 내려뜬 눈 아래, 게걸스러워 보이는 혀가 닿을락말락 서로를 탐하고 있다, (아니 탐한다기보단 희롱한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희롱하고 있다. 사랑은 진실하다,고 키스는 황홀하다,고 말하는 치들에게 콕토의 키스는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첫키스의 아릿함이; 알싸함이; 짜릿함이 두번째에도; 세번째에도; 네번째에도 재현될 수 있다면 콕토의 그림 앞에서 절망을 부르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세상의 화가들은 '키스' 그림을 수없이 그려왔다. 가령, 동물(말)과 여인이 뒤엉킨 피카소(Pablo Picaso)의 '키스'가 현실계를 가볍게 뛰어넘어 신화 속으로 날아갔다면, 콕(Renee Cox)의 '키스'는 상징성을 지닌 채  터부의 대상이 되어 현실계로 걸어 들어오고,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의 '키스'는 세속을 초월하여 종교적 심성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런가하면 로빈슨(Theodore Robinson)의 '키스'는 그저 시큼들큼한 기분을 풍기는데 농밀함을 자아내는 로댕(Auguste Rodin)의 키스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리고 클림트(Gustav Klimt)다. 황금색 옷과 황홀한 표정이 보색을 이루는 클림트의 '키스'는 (만인의) 키스의 원형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전율한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안다.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지는 것'이란 걸 잘, 안다. 우리가 '그려나가는 것'의 최대치 혹은 이룰 수 없는 바람,같은 것임을 속악스럽게도 너무나 잘, 안다. 아는 것의 크기에 비례해 '키스'를 향한 바람 내지 갈망의 모래성은 허망함으로 위태하다. 키스의 위태함이 장 콕토의 우스꽝스런 키스를 낳았다. 그렇다면 콕토의 키스는 사산아일까? 키스는 죽었다, 아니 키스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콕토가 그린 데생 속 연인의 눈망울이 애처롭다.

     
    출처 : 블로그 >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