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십대 아이들이 임신을 해서 상담실을 찾는 일이 갈수록 늘고 있다. 물론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산부인과를 찾아가 낙태를 할 것이다. 주로 동네 구석진 곳에 있는 산부인과에 간다.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6학년 남자아이와 성관계를 맺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아이들의 신체적인 성장이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담실을 찾은 청소년들도 또래 아이들의 성적 경험과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마’하는 눈치다. 특히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만삭이 되었거나 이미 아이를 출산해 미혼모 시설에 있는 십대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째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느냐, 임신을
하지 않으려면 피임이라는게 필요한데 피임을 해야 한다는 걸 몰랐느냐고 물었다. 막연하나마 피임을 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십대 여자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만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또는 ‘오빠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막상
피임을 하려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지 몰라서’라는 답변도 있었고 ‘상대에게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라거나 ‘피임 도구를 살 곳이 마땅치
않아서’라는 아이도 있었다.
‘피임’은 성적 행위의 상황에서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해 당당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잣대다.
이러한 태도는 하루 아침에, 혹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단 한 차례의 집단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피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려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임 도구에 대해서도 스스럼 없이 친숙해지도록 자녀와 부모가 함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요즘도 피임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면 ‘청소년에게 성관계를 허용하는 셈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교사와 부모들이 많다. 그동안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이런 이유로 정작 필요한 성교육을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식으로 방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손 놓고 있는 동안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건강한
성문화를 가꾸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다. 성적으로 무지한 것은 더이상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이명화/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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