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학자·서화가·금석학자(金石學者).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 본관은 경주(慶州).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판독하여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병조참판에 이르렀다. 40년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 만에 풀려났고, 51년에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관련되어 함경도 북청(北靑)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다. 이후 과천(果川) 관악산 및 선친의 묘역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경학·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의 서체는 옹방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작품에는
《세한도(歲寒圖)》 《모질도》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