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인천4

鶴山 徐 仁 2005. 10. 30. 02:36
  구 공화춘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38번지
ㆍ보전대상
ㆍ연대 : 1948년
ㆍ역사
공화춘은 외관으로 미루어 보아 1930년을 전후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 평인방을 사용하여 창들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점,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하여 외벽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하여 평 슬래브 건물처럼 보이게 한 점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 건물이 보존대상이 되어 수리를 하게 되면 상량문 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4쪽~315쪽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자료에서)
자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밝혀줄만한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화교들이 '청요리' 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 을 만들어 팔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청요리로 이름을 크게 날렸던 곳이다.
(인천 역사의 자랑 180쪽, 인천광역시 발간자료에서)

 
  선린동 중국인 연립주택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1-5번지
ㆍ보전대상
ㆍ연대 : 1939년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 촌에는 이런 주택들이 여러채가 있었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현재는 불과 몇 채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다른 주택들은
모두 가게로 사용되면서 많이 변모된 상태이다.
선린동 1-5에 위치하고 있는 이 주택은 오늘날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라 부르는 이 지역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건물로 원형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3가구 연립형 집합주택으로 전면에 폭은 좁으나 안쪽 깊이는 상당히 깊고 중간에 비워둔 부분이 있어 환기와 채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형 연립주택은 상해를 비롯하여 중국 남부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유형이다.
(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5쪽,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 자료에서)

 
 

해안 천주교 교육관 (여성연 영업점)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25-2번지
ㆍ보전대상
ㆍ연대 : 1939년

해안 천주교 교육관은 벽돌조 건축물인데 정면 외벽은 인조석 물씻기를 하여 석조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5쪽,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 자료에서)
정면은 창문과 출입문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여 다른 주택들과 달리 엄격한 모습을 띄고 있다. 또한 출입구 좌우에는 원형기둥 모양의 장식물을 설치하여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1층의 출입문과 창문에는 원형 아치를 틀었고, 2층 창문 위에는 인방을 두어 변화감을 연출하였다.

 

1차 변형된 계단
 

조계지 계단

조계(租界)란 개항이 되면서 개항장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생활할 수 있는 땅의 경계를 지칭한 것이다. 조계의 종류는 토지 취득 방법에 따라 컨세션(Concession)과 세틀먼트(Settlement)로 구분한다. 컨세션은 토지를 외국 정부가 토지 소유 정부와 계약에 의해 차용, 다시 자국민에게 분할 대여하는 것이고, 세틀먼트는 외국인 개개인이 토지 소유자와 직접 계약에 의해 토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천에선 두 가지 방법이 다 적용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계단의 최근 모습
 

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영국이 중국과 조계 계약을 맺고 1845년 상해에 외국인 조계를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1858년에는 일본이 미, 영, 불 등 서구 5개 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도쿄와 히로시마, 나가사끼 등 5개 지역에 조계를 설정했다. 우리나라는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1880년에 원산, 그리고 1883년에는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 일본인 조계를 비롯 청국 등 각국 조계가 설정됐다. 이 조계는 1914년까지 30여년간 지속되다 한일합방 후 모두 폐지됐다.(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 상권 59쪽, 경인일보 특별 취재팀 자료에서)


■ 일본인 조계
현 자유 공원 남쪽 언덕에서 해안에 이르는 관동 1, 2가와 중앙동 1, 2가 일대 약 7,000평에 달하는 지역. 개항 당시 348명에 불과했던 일본인들은 계속 증가, 1890년 말경에는 4,300여 명에 달했다. 따라서 조계지를 좀더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노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결국 1898년에는 현 해안동 일대 4,000여 평을 매립, 그들의 거주지를 늘렸다.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공동 조계와 한국인 거주지까지 파고들면서 그들의 거주지를 확보했던 것이다.

■ 청국조계
일명 청관(淸官)으로 불리던 지역.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서 현 선린동 일대 5,000여 평에 이르는 지역에 터를 잡았으나 일본지계처럼 현 내동 경동지역에 청국 조계지를 더 확장했다. 당시 청관에는 중국인 거상들이 왕래하면서 번성을 누렸으나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청국인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철수하고 소수의 청국인들 만 남게 되었다.

■ 공동조계
미, 영, 청, 독, 일 등 5개국이 1884년 10월 3일 조선정부와 제물포 조계장정협정을 맺으면서 생겨났다. 이 조계는 청국, 일본 조계의 외곽 지역인 송월, 송학, 북성, 관동에 이르는 14만여 평의 넓은 지역으로 각국의 외국인들이 거주했다.

 
출처 : 황금연못 |글쓴이 : 황금연못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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