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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강경읍은 젓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개발에서 배제된 후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모든 것이 뿌옇게 낡아가는 풍경 속에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환하고 번쩍이는 건물은 어김없이 젓갈가게들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젓갈축제는 강경읍 최대의 행사. 이 동네에서 돈 버는 곳은 젓갈가게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이마저 대부분 외지인 차지가 되고 있다.
금강이 흘러드는 내륙포구였던 강경은 평양,대구와 함께 조선말 전국 3대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성어기인 3∼6월에는 하루에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서해에서 나는 조기,갈치는 모두 이 곳으로 입하되었다. 젓갈이 발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강경은 일찌기 근대의 바람을 맞는다. 1899년 일본 상인의 수산물 도매상이 개설되었고,1902년에 도내에서 제일 먼저 우편취급소가 들어왔으며,1905년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호남지역 최초의 병원인 호남병원,호남지역 최초의 극장인 강경극장도 이 곳에 세워졌다. 논산문화원의 유제규 사무처장은 “강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면서 “이후 철로와 고속도로가 뱃길을 대신하고 금강 수운이 쇠퇴하면서 활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강경읍 중앙리는 ‘중앙’이라는 이름에서 말하듯 과거 번성했던 상업도시 강경의 중심가였다. 이 동네를 다니다 보면 눈에 띄는 목조 한옥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결코 크거나 화려하다고 할 순 없는데,1923년 건축 당시엔 보기 드문 2층 한옥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옛 이름은 ‘남일당 한약방’. 상가건물로 지어져서 그런지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실용성이 돋보인다. 한식을 기본으로 했지만 1층의 차양지붕과 지붕장식재 등에 일본 양식이 접목됐다. 또 단층 한옥 구조가 2층 구조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920년대 촬영된 강경시장 전경사진에 나오는 건물들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
사람들로 북적였던 강경 하(下)시장의 랜드마크였던 남일당 한약방은 지금 인적조차 드문 시골 소읍의 사랑방으로 전락했다. 강경의 융성했던 과거와 한의원에 밀려난 한약방의 사연을 함께 들려주는 이 건물은 시류에 밀려 쇄락해 가는 것들의 쓸쓸함을 잔뜩 풍기며 이 곳을 찾는 이들을 애잔한 느낌에 젖게 만든다.
남일당 한약방은 앞에서 보면 ‘一’자형 건물이지만 옆에서 보면 ‘ㄱ’자 건물이다. 문을 밀고 1층으로 들어서니 통로며 방이며 좀 비좁은 느낌이다. 1층에 방이 두 개,이층에 방이 세 개인데 다들 다섯 평이 안된다. ‘남쪽에서 제일 큰 한약방’이라는 뜻으로 붙였다는 ‘남일당(南一堂)’이란 이름은 허풍이었던가.
1943년부터 남일당에서 한약을 썰었다는 조병수(73·인근 삼진한약방 주인) 씨는 “이름 그대로 충청·호남 지역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한약방이었다”고 회고했다.
“천장에는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렸고,벽마다 약장들이 꽉 들어찼지. 바닥에는 나무상자가 수북이 쌓여 먼지가 날렸고. 보유한 약재가 2000종에 달했으니까 정말 큰 한약방이었지.”
현재 이 건물의 소유주인 유정근(47·논산시청 공무원) 씨도 “한약방을 한 할아버지 덕분에 그 시절에도 흰쌀밥을 먹고 살았다”고 추억했다.
“병원이 없던 시절이라서 한약방에 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어요. 보조인을 3명이나 두고 있었는데,할아버지는 종종 점심도 거르며 약을 지으셨죠. 이따끔씩 경찰서장이나 세무서장,교장 등 지역유지들을 불러 2층에서 기생파티도 열었다고 들었어요.”
남일당 한약방으로 출발한 이 건물은 주인이 바뀌면서 ‘동일당 한약방’으로,다시 ‘연수당 건재 대약방’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유씨의 조부는 연수당의 주인이었던 유진순 옹. 유 옹은 1966년 작고할 때까지 이 한약방을 운영했으며,이후 유씨의 작은 아버지가 이어받아 1973년까지 영업을 했다.
‘한약방 차리고 3년 안에 대전 시내에 집 하나 못 사면 바보라는 얘기가 돌만큼 경기가 좋았다’는 한약방의 호시절은 1960년대 후반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구한 세월 동안 유일한 의료기관 역할을 해온 한약방은 한의대가 생기고 한의사 제도가 본격화되면서 동네 골방으로 밀려났다. 그들에겐 ‘비과학’ ‘비위생’ 등의 낙인이 찍혔다.
“옛날에는 한약재를 한지로 만든 봉지에 넣어 매달아 뒀지. 그래서 약재가 숨을 쉴 수가 있었어. 그런데 그것도 비위생적이라며 못 하게 했어.” 조씨의 얘기는 과학의 이름으로 단행된 우리의 근대화 과정이 보존해야 할 전통까지 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다.
나무계단을 딛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천장 대들보에 적힌 상량문 중 ‘大正 12년(1923년)’이란 기록이 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한다. 남일당 한약방은 이 동네에서도 격렬했다는 6·25 폭격을 피하고 이후 불어닥친 개발 바람도 면하며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그러나 한약방으로서의 쓰임새를 잃고 난 후 창고로 방치되다 보니 목재는 썪고 지붕은 주저앉았다.
자칫 흉물이 될 뻔한 이 건물을 되살린 것은 문화의 역시 힘이다. 2001년 근대문화유산 등록과 함께 지난해 재단장이 된 것이다. 근대화와 경제발전,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가 밑받침된 2000년대 이후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면 이제부터는 근대화 과정에서 낙오한 유산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과 학생들이 가끔씩 찾아온다는 이 건물을 유씨는 조만간 숙박시설로 제공할 생각이다. 한약방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싱크대를 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나 와서 공짜로 묵어갈 수 있게 하겠다는 유씨는 “여기 와서 누구나 쉬면서 예전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고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강경=김남중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