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화동 옛 경기고교

鶴山 徐 仁 2005. 10. 30. 02:25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6) 화동 옛 경기고교


최고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고등교육에서 서울대가 있다면 중등교육에선 평준화되기 이전 경기고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중등교육의 시발점인 경기고는 1900년 조선조 명문 거족들이 몰려 살던 홍현(현 서울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에서 문을 열었다. 고종황제가 서구식 교육을 도입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교명은 ‘관립중학교’였다. 조선의 지상과제였던 ‘개화’를 꾀하고 침몰 직전의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인재양성 시설로 당시 철근 콘크리트로 짓고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최고급 건물이었다.

원래 경기고 터는 개화파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이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자 조선 정부가 집을 몰수해 학교 터로 삼은 것이다. 후 한성고-경기고보-제1고보-경기중의 교명을 거친 경기고는 1954년 고교 입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명문고로 부상했다. 1957년 졸업생부터 고교 입시 마지막 세대인 1976년 졸업생들까지는 10명 중 6명 이상이 서울대로 진학했다. 1970년의 경우 서울대 진학률은 무려 81.8%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강남 개발을 국정과제로 삼으면서 정부는 강북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1972년 문교부 장관은 명문고의 상징인 경기고 이전을 발표하는데,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사업비 6억9600만원을 들여 3만2000여평의 대지에 최신 시설을 갖춘 교사를 지어 옮긴다는 것이다. 바로 직전에 유신헌법 발표와 비상계엄령 선포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재학생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동문까지 합세한 강력한 반대여론이 일자 정부는 기존 교사를 그대로 유지해 지금의 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을 걸고 합의를 받아낸다. 당시 강북에 있던 숙명여고 서울고 경기여고 등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교사가 모두 헐린 것에 비해 경기고만 예외를 둔 것이다.

1976년 경기고가 현재의 삼성동 교사로 이전한 뒤 서울시 교육청 직속기관으로 운영되는 정독도서관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류승범,임은경,공효진이 출연해 1980년대 학창시절의 추억을 그린 영화 ‘품행제로’에도 나오듯 정독도서관은 지금도 중고생들이 공부는 물론 데이트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장지영기자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6) 공릉동 옛 서울공대


1975년 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까지 전까지 서울대는 이름뿐인 종합대학교였다. 1946년 일제시대 만들어진 기존의 경성제국대학과 서울 인근의 9개 전문학교를 합쳐서 만들었기 때문에,캠퍼스도 따로 떨어져 있고 학교의 설립이념이나 교육방향도 다른 일종의 이름공동체에 머물렀다.

현재 서울산업대가 자리잡은 서울 공릉동의 구 서울공대 역시 동숭동을 비롯해 곳곳에 흩어진 서울대라는 이름 안의 단과대 가운데 하나였다. 구 서울공대는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로 세워진 것이다.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해방 후 경성대학으로 잠시 이름이 바뀌었다가 국립서울대학교 추진 계획에 따라 서울대 공대로 개편된 뒤 1980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게 된다. 건물은 서울공대가 이전한 후 경기공업개방대학을 거쳐 현재 서울산업대가 사용하고 있다.

서울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서울산업대는 단과대 부지 치고는 상당히 넓은 교지(약 53만㎡)를 가지고 있다. 현재 건물 39개동 가운데 구 서울공대가 사용하던 건물이 20개동이다. 이중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시절 세워진 것이 11개동이며,60년대 서울공대 시절 세워진 것이 9개동이다.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일제시대 세워진 건물 중 가장 대표적인 서울산업대 생산정보관(본관)과 전기정보관 2개동이다.

교문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생산정보관은 경성제대 이공학부 본관 건물로 권위적인 건축물이다. 중정을 구성한 ‘ㅁ’자형 배치의 4층 건물에 정문을 마주보는 쪽으로 세운 4층 높이의 시계탑은 위계질서를 중시하던 근대건축 양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 반복되는 세로로 긴 사각형 창은 지루한 느낌을 줄 정도로 제국주의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 양쪽으로 방(연구실이나 실험실)이 계속되며 이것은 4개 층 모두 똑같은 구조다. 복도를 빠져나오면 네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을 만날 수 있고 여기서야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다.

좁은 복도를 가진 ‘ㅁ’자형 건물구조는 ‘一’자 또는 ‘ㄴ’자형 건물이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며 위아래로 길고 옆으로 좁은 창은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어져온 양식이다. 다만 벽체가 하중을 부담할 필요가 없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서 구태여 좁은 창을 넣은 것은 이전에 유행하던 디자인의 관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서울산업대 학생들은 건물의 구조와 배치를 놓고 재미있는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정에서 사방의 건물들을 연결하는 길이 자세히 보면 ‘本’자와 비슷합니다. 이 건물과 중정의 길을 높은 곳에서 연결해서 보면 ‘日本’의 모양이 되는 것이죠.”. 다소 억지스런 면이 있지만 조선총독부(구 국립중앙박물관)와 서울시청 건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사실 건축이 본질적으로 권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는 자가 피식민지를 자국의 건축 스타일로 바꾸는 것은 건축사에서 흔한 유형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본의 신건축 스타일을 수용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이 전쟁에 몰두하면서 보다 단순하고 실용적인 건물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이에 대해 근대건축을 연구하는 경기대 안창모 교수는 “구 서울공대,즉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튼튼하게 잘 지어진 건물로 당시로서는 돈이 많은 드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갖추고 있다”며 “이 건물의 양식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느낄 수 있다는 지적은 정서적인 것이지 학술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이 도심에서 먼 공릉에서 세워진 것은 일본 제국주의와 떨어져서는 설명할 수 없다. 1938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확대,도쿄 인근 도시인 서(西)치바에 제2공학부를 세운다. 넓은 대지를 확보한 제2공학부에는 군사시설도 함께 설치되었는데,이것은 제2공학부의 설립목적이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기술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역시 기존의 캠퍼스인 동숭동에서 멀리 떨어진 공릉에 만들었고,인근 현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곳에는 일제시대 일본군부대가 있었던 곳이다.

결국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전시체제에서 전쟁수행을 위한 식민지의 고급기술개발과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기술을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실험장이 함께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젊은 대학생들의 활기로 가득하지만 넓은 교정을 거닐다보면 식민지시대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장지영기자 jyjang@kmib.co.kr



출처 -   http://www.kmib.co.kr
 
출처 : 황금연못 |글쓴이 : 황금연못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