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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벌교 남도여관

鶴山 徐 仁 2005. 10. 30. 02:35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2)] 벌교 남도여관
기사입력 : 2005.05.03, 15:11


벌교를 찾아간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해냄)이 우리와 함께 하기 시작한 20년전으로. ‘태백산맥’은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에서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53년 휴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룬 대하소설. 최다 인쇄와 최다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1989년,10권으로 완간된 이래 지금까지 5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대작이다.

‘태백산맥’의 중심 무대가 바로 전남 보성군 벌교읍이다. 키 낮은 건물과 조악한 간판,한산한 거리 풍경에서 소설의 대목 대목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소설속 염상구가 잡상인들에게 텃세를 받던 차부,벌교 유지들이 모여 갖은 책략을 꾸미던 요정 남원장,정현동이 운영하던 술도가,포목 장사를 하면서 자 눈금을 속이고 쌀 장사하면서 됫박을 속여 돈을 번 광주상회 등등.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승주군 낙안읍에 딸린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했던 벌교가 읍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의 미곡 수탈기지가 되면서부터다. 고흥 보성 광주 순천과 인접해 사방으로 트여있을 뿐 아니라 포구를 끼고 있어 전남 일대의 쌀을 공출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 미곡 수송의 요지였던 벌교는 한때 인구가 5만명에 육박했다고 하니,2만이 채 안되는 현재와 비교할 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벌교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벌교는 옛 시절의 융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채 한산하기만 하다. 벌교의 명성은 이제 갯벌에서 채취한 꼬막이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도 입맛만은 여전하다는 듯,벌교 시내를 걷는 동안 꼬막집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벌교 역전에서 정면으로 쭉 뻗은 2차선 도로를 건너 5분 가량 걷자 고색창연한 일본식 목조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남도여관.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검은 빛 판자로 둘러싸인 집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면 저토록 까만 빛일까. 빨치산이 지주들을 잡아다가 총살한 현장인 남국민학교(지금의 벌교초등학교)와는 담 하나의 사이다.

소년 조정래는 읍내에 살았지만 논산에서 벌교로 전학왔을 때 남국민학교에 자리가 없어 후문쪽 10뻍 거리에 있는 북국민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현재는 북국민학교와 남국민학교가 통합해 벌교초등학교가 됐지만 북국민학교는 남국민학교에 비해 ‘똥통학교’였다고 한다. 하지만 ‘촌놈’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다닌 기억이 없었다면 조정래는 이 땅의 민중사를 빼곡히 복원한 태백산맥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차별을 받았기에 그는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까. 원래 ‘보성여관’으로 불리던 집을 그가 소설에서 ‘남도여관’으로 바꿔 부른 것에서도 더 큰 의미로서의 남도의 한을 짚어내려는 작가의 넓은 시야를 어림할 수 있다.

남도여관은 소설속에서 현부자네 집안 사람인 현준배의 소유로 그려놓은 장소다. 지금은 1층은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비어 있다. 1층에 방이 열 개,2층에는 좀 더 큰 다다미방이 네 개다. 요즘 숙박업소 규모에 비한다면 여인숙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무궁화 5개쯤은 되는 고급 숙박업소였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 대문을 들어서면 화단을 중심으로 좌우와 정면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고 안채로 쓰고 있는 오른편 한옥 위에 2층이 올려져 있었다.

집주인의 양해를 얻어 2층으로 올라가자 목조 계단이 삐그덕거리며 운다. 채워둔 열쇠를 풀어 방문을 여는 순간,세월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반세기전으로 퇴각하고 세월의 먼지만 다다미 위에서 푸석거렸다. 밀짚을 엮고 왕골을 씌워 만든 도톰한 다다미는 그러나 먼지만 뿌옇게 쌓였을 뿐 아직까지 숨도 죽지 않고 탄탄했다. 도르래에 새끼줄을 감아 여닫게 만든 창문을 열고 보니 고작 2층 높이인데도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다. 1층 지붕을 덮고 있는 낡은 기와,가는 문살,구식 창문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느낌이다.

여관에 진을 치고 있었던 토벌대들의 땀냄새,피 냄새,담배 연기가 왈칵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한켠에서 술추렴을 벌이고 한 켠에서는 벌렁 누워 곤한 잠을 자던 토벌대들의 모습. 그들은 자신도 모를 어떤 힘에 이끌려 동족상잔의 한 몫을 담당해야 했다.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대 명제 속에서,또는 육친을 잃은 복수욕에 불타서. 그러나 지금의 방 주인은 먼지일 뿐이다. 아무도 쓰지 않는 방. 창문 너머로 벌교국민학교 교정이 눈에 들어왔다. 소설속에서 양심적인 계엄사령관으로 그려지는 심재모가 이끄는 200명의 계엄군이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도열하던 교정의 굵은 모래들이 그 구령 소리를 기억이라도 한다는 듯 반짝거린다. 그 시절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계엄군의 질서정연한 도열 모습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누런 콧물을 훌쩍 빨아 삼키면서. 심재모는 부임하자마자 술에 쪄든 마구잡이식 토벌대를 선창 창고로 쫓아내고 남도여관을 차지했다.

하지만 역사를 지켜본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집이었다. 6·25때 벌교를 장악한 빨치산이 인민재판을 열고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총살할 때의 총소리에,그리고 심재모-백남식-양효석으로 계엄사령관이 바뀔 때마다 치러지던 열병식의 군화소리에 남도여관의 기왓장도 파르르 흔들렸을 것이다. 시절도,사람도 가고 없지만 집이 살아 있었다.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남도여관 지킴이 나종필·유보임씨 부부
기사입력 : 2005.05.03, 15:11


‘셋방 있음’이라고 손으로 써 붙인 남도여관 대문을 밀고 좁다란 회벽을 따라 들어가자 바로 네모반듯한 마당이 나온다. 이 집의 안채를 지키는 노부부 나종필(73·오른쪽)씨와 윤보임(72)씨는 벌교에서 8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다.

“남도초등학교에서 20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퇴직해 금은방을 냈는데 여관이 매물로 나왔길래 5만원을 주고 인수했죠. 그게 1979년의 일이니 이 집에서 26년간 살아온 셈이죠. 어린 시절부터 늘 보고 자란 집이라 친숙감도 있었지만 세 놓을 가게도 여럿이라 임대할 요량으로 건물을 사들인 거죠. ”

하지만 나씨는 이 일대가 학교 정화구역으로 묶인 1988년 여관 간판을 내렸다. 지금은 길가에 붙은 방에 수예점 세탁점 등이 세들어 있는 형편. 등기 기록이 없어 정확한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나씨의 선친도 이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대강 100년은 넘은 건물일 터다. 안주인 윤씨는 “80년대,작가 조정래씨가 ‘태백산맥’을 집필하면서 몇 차례 취재를 왔는데 낯이 익었다”고 회한에 젖었다.

“제 여동생(윤보영)이 조정래씨와 북국민학교 동창이거든요. 80년대 초 사라호 태풍의 강타 이후 재건축 바람이 일기 전에는 남도여관이 보성군 일대를 통들어 최고의 여관이었어요. 학교를 빼고는 가장 크고 넓은 집이었거든요. 한때 보성군 국회의원 후보들은 모두 우리 집 2층 다다미방에서 유세를 했지요. 2층 창문을 다 열어놓고 남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청중들을 향해 마이크를 잡으면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어요. 하지만 군에서 보상 구매를 해 보존한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합니다.” 나씨가 얼른 말을 받았다.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년이나 버텨온 것으로 봐서 꽤 튼실하게 지은 것 같아요. 집이 참 기특하지요.”

정철훈기자

출처 -   http://www.kmib.co.kr

 
출처 : 황금연못 |글쓴이 : 황금연못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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