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인천2

鶴山 徐 仁 2005. 10. 30. 02:37
  구 제물포구락부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
ㆍ지정 : 시지정유형문화재 사적 제 17호(1993년 7월 6일)
ㆍ연대 : 1901년
ㆍ역사
구락부라는 말은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 것이다. 인천항이 한창 풍요를 누
리던 1901년 6월에 세워진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거주하던 각국지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이었다. 제물포구락부는 인천에 몰려든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으로, 1892년 8월에 발족한 조직이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서 지붕을 양철로 덮었으며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마련되어 있었고 따로 테니스 코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건물의 특징은 별로 없다. 각국지계 제도가 철폐된 1913년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에 이관되어 정방각으로 불리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상륙한 주한미군에게 점유되어 장교구락부로 되었다가, 1947년 10월 미군 철수 후 대한부인회 인천지부 회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다시 미군사병구락부로 사용된 이 건물은 1953년에는 인천시립박물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90년에 인천시립박물관이 청량산 으로 신축 이전한 뒤, 지금은 인천시 중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우체국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6가 1
ㆍ지정 :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8호 (1982년 3월 2일)
ㆍ연대 : 1923년
ㆍ역사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우편제도가 도입된 것은 우정국이 낙성된 1884년부터이나 실질적으로 시행된 것은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이후 전국 각지에 우체사를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일본이 일본인의 우편사무를 취급하기 위하여 인천의 일본영사관내에 우체국을 처음 설치한 것이 고종 21년(1884년) 4월이고 한국정부가 인천우체사를 설치한 것은 고종 32년(1895년) 6월이다.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한국의 통신기관을 점유하려고 꾀하여 오다가 광무 9년(1905년) 4월 1일에 한일통신합동운영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의 통신기관을 일본의 통신기구로 합동 흡수하고 말았다. 인천우체사는 이해 5월 20일 일본의 인천우체국에 인계되었다. 광무 10년(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인천우체국은 통감부통신관리국 소관이 되었으며 190년에 조선총독부 체신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인천우체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ㆍ건축양식 : 1923년1924년에 건축된 현 건물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절충주의 양식을 단순화하여 건축한 것으로 입구 양족에 큰 기둥형식의 탑부를 세우고 그 사이를 주두없는 여러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외부는 하단을 화강석으로 2단을 쌓고 그 윗부분은 시멘트 몰탈로서 석조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홍예문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ㆍ지정 :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49호
ㆍ연대 : 1908년
ㆍ역사
중앙동에서 응봉산 줄기를 뚫고 송현, 인현동으로 통하도록 길을 만들었는데 (1905년 착공, 1908년 준공) 고개문의 형태가 마치 무지개문처럼 생긴 문 같아서 홍예문(虹霓門)이라 부른다.
홍예문이란 문 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의 형상처럼 반쯤 둥글게 된 문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인천을 상징할만한 대표적인 축조물의 하나인 홍예문으로 통하는 길의 건설은 각국조계와 축현역(동인천역)을 연결하기 위해 구한말, 시내 유지들이 출연하기 시작한 후 국고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였다. 일본은 자국조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인천항구와 한국인촌의 경계가 되는 응봉산 산줄기를 뚫어 문을 내는데 앞장 서 일본공병대를 동원하여 축조하였다.
화강암을 쪼아 올린 조형미가 수려한 추억의 건축물이며, 그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구 일본우선회사 사옥

ㆍ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동 1가 9번지
ㆍ보전대상
ㆍ연대 : 1895년
ㆍ건물면적 : 119평
ㆍ대지면적 : 120평
ㆍ역사
이 건축물의 건축연도에 대하여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신태범 선생의 “인천중구의 옛 풍물” 에는 1886년에 신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인천부사”
에는 일본우선회사가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를 189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내셔널 트러스트 홈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에는 1933년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건축연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므로 현재 일본우선주식회사에 이에 대한 정보를 문의한 상태이다.
이 건물은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가 1895년에 사옥으로 건립한 것으로 당시의 업무용 건축물로는 규모가 큰 편이며, 건축재료를 일본에서 반입하여 세웠다고 한다. 정면을 좌우대칭으로 처리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설치한 주 출입구 상부를 페디먼트로 처리했다. 현재 정면 출입구에 있는 기둥과 슬라브는 나중에 설치한 것이다. 세로방향의 창문을 두어 수직성을 강조했고, 정면부 지붕에는 패러핏을 설치하여 앞에서 보면 평 슬라브 건물로 보이지만 실제는 모임지붕의 건물이다.
실내공간은 높은 층고로 처리하였다. 현재 타일 및 철재 개구부, 목재 창호, 조명기구 등의 재료 및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이 일대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주로 은행이나 관공서로 건축되었던 건물인데 비해 이 건축물은 운수회사의 업무용 건물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사무소건축의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건축물이다. 건물 옆에 덧붙인 창고부분을 철거하고 이를 보수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일본우선회사는 1894년 10월 조선에서의 연안항업을 장악할 목적으로 조선정부와 접촉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895년 2월에 이운사의 항해업을 관리하면서 우리나라 연안의 정기항해를 시작했다. 그 후 여러 항운회사가 인천에 진출했지만, 일본우선회사는 인천에서의 항운업을 거의 독점하였다. 동화실업주식회사, 천신항업, 대흥공사 등 항만관련 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이다. 인천부사에 실린 사진에도 등장하는 건물 앞 화단의 향나무가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현재 이 나무는 넘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한편,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사방공사수종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그 왕성한 번식력으로 여러 가지 비난을 받다가 지금은 많이 사라진 아카시아 나무를 들여온 것도 일본우선회사와 관련이 있다. 즉 이러한 아카시아나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891년(明治 23년) 우선회사 인천지점장 사까끼가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구입하여 인천 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추정됨)에 식재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대한통운 창고

ㆍ보전대상
ㆍ연대 : 1948년
ㆍ이 창고는 적별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건물로 지붕은 목재로 트러스트를 짜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올려 마감했다. 처음 지을때 부터 창고용도로 지었고 지금도 창고로 쓰이고 있다.

 
출처 : 황금연못 |글쓴이 : 황금연못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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