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조선의 막사발- "개밥그릇"이냐 "발우"냐?

鶴山 徐 仁 2005. 9. 5. 17:32

 작년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청주에 있는 한국공예관 2층에서는 청주불교방송의 후원으로 조선 찻사발展이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특별전 형식으로 "오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주제를 달고 50여점을 전시하였습니다.

 

  귀향(歸鄕)이라는 말은 고향을 찾아 왔다는 뜻인데 결국은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시대에 수탈해 갔던 찻사발중 일부가 되돌아와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일겁니다. 50여점의 찻사발들은 나름대로 형태의 아름다움을 지녀 어떤것은 굽이 높다란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것은 아래와 위의 속지름이 같은것 등등 다양한 형태의 찻사발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16세기 일본의 무장(武將)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사용했다는 찻사발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백자가 유명한 지역은 동서무역의 교량 역할을 했던 이스탄불 지역이었습니다. 토프카피 宮에는 이런 도자기가 상당수 진열이 되어 있는데, 우리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고급스럽고 실용성이 배제된 형태로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등의 보석이 도자기에 박혀 있습니다. 주로 페르시안 도자기라고 알려진 도자기들은 우리 도자기와는 달리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도자기가 갖는 기능보다는 우선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여지를 담아 둔 서양인의 감상기준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하도록 도자기가 만들어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미적 기준이 내재된 심적 아름다움보다는 외재하고 있는 미적 아름다움에 우선하여 제작하였음을 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외적 치장에 상당한 노력을 해 온것이라 하겠습니다.

 

 <찻사발>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막사발>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리는것이 조선 백자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아닐까 합니다.

 조선백자가 분명함에도 아직도 그 용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결론이 난것이 없습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차(茶)를 다리기 위해 만들어 사용하던 사발이라는 주장과 이와 달리 스님들의 탁발에 사용되던 밥그릇인 '발우'라는 주장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일본에 있는 26점 모두가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귀하게 여기고 있음에 빗대어 우리 나라에서 개 밥을 담아주던 막그릇이 바로 <막사발>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너무 터무니가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렸을때 개나 소를 키우는 모습에서 보았듯이 깨어진 가마솥이나 찌그러진 냄비 등 더 이상 사람의 생활용기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것을 개나 소의 먹이통으로 사용하였었고, 이러한 금속제의 생활 용기 이전의 여물통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것에 여물을 담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막사발>을 오오사카 城(大阪 城)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고,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고 무가보(無價寶)의 위치에 우리의 <막사발>을 올려 놓았습니다. 심지어는 군주제도의 막부 시대에 상대방의 공격에 힘으로 버틸 수 없을 때 서로간의 유화를 목적으로 항복을 하며 가는 길에 소지했던 것이 바로 <막사발>이었고, 이 <막사발>을 받은 군주는 너그러이 용서를 해 주었었습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막사발을 구경을 하고자 하면 공개를 잘 안하는것은 물론이고 겨우 사정사정을 해서야  공개를 하게되면 그 소장자는 매우 번잡한 절차를 거쳐 공개를 합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막사발을 '이도자왕(井戶茶碗)'이라고 하는데 이 그릇들은 모두 오동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보관함 속에 다시 금이나 은으로 함을 만들고 그 속에 조선의 <막사발>을 넣어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우리가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도자기 하나에 이렇게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도예의 대가인 Bernard Rich는 이런 <막사발>을 보고 "이 막사발처럼 없으면서 있는것 같은 색과 투박한 촉감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남을 행복하게 할까?" 라면서 울부짖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함부로라는 의미가 강한 <막>이라는 접두어가 들어간 사발 하나가 왜 이렇게 일본인들을 사로잡고 도예의 대가가 울부짖을 정도가 되었나가 궁금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조선 <막사발>이 담고 있는 "내재적인 미"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도자기로서의 단아함을 잃지 않는 조선 백자 특유의 '멋' 때문일것입니다.

 

 조선의 백자는 서양의 백자처럼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골의 순박한 아낙네처럼 넓직한 낭군의 등 뒤에 숨어 다소곳이 지켜보는 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함부로 먼저 나서기를 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공도 모두 낭군의 공으로 돌리는 그런 서민적인 멋과 맛이 바로 조선 자기에 담긴 참 뜻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 도기가 바로 서민적 표출로서 만들어진것을 의미하며 백자이면서도 서양의 도자기 처럼 우유빛 광채(乳白) 를 내지 않는 소박한 회백(灰白)으로 그렇게 눈부시게 희거나 화려하지 않은 백색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막사발>의 모습을 보면 잘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은 어디에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만들어지는 대로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다 보니 형태가 각양각색이 아닐 수 없으며, 유약도 일정하게 곱게 발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유약이 덩어리지고 또 어떤것은 그저 유약이 슬쩍 묻어만 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이 <막사발>을 만들던 도공들은 단순히 도자기의 거친 면만을 없애려는 노력으로 무엇보다 서양의 도자기처럼 눈으로 보는 도자기가 아닌 실용적인 도자기로 생각하여 제작에 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다보니 <막사발>은 그저 뒤꼍의 장독대에서 간장을 퍼도 되고, 시원한 열무 김치를 담아 먹음직스럽게 차린 상위에 내 놓는다던가, 구수한 된장국이 담기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수수하고 꾸밈 없는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것이며,그나마 조금 고급스럽게 사용하는 경우라면 떨뜨름한 녹차잎 몇 개로 다려지는 녹찻잔으로 사용이 되었을 때 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본인들의 얍삽함도 없으며 구태어 궁중의 임금님 수랏상에나 올라가려고 노력했던 관요(官窯)에서 제작했던 도자기의 화려함을 닮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서민이 다루기에 어려울 정도의 거만함이 배어 있다거나 기생 오라비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기녀처럼 이쁘게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막사발>의 美는 제작자 보다는 사용자이며 약탈자인 일본에서 더 가슴깊이 담겨진 美를 먼저 읽고 간직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것은 우리의 짧은 심미안적 안목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아니면 모조리 쓸어가 버린 일본인에 의해 미쳐 두고 두고 감상을 하며 그 심연에 담긴 아름다움을 논할 기회를 갖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인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간송 전형필 선생은 고려 자기에 심취하여 어디서 어렵고 비싸게 구입한 고려 자기 찻잔이라도 손에 들어오게 되면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고려 자기에 술을 따라 마시며 흥에 겨워 대취했다는 일화도 있는데 감히 조상의 얼이 담긴 소중한 유물에 어찌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겠느냐는 질책도 있겠지만, 일본인의 손에 있던 우리의 보물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막사발>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이 되어 소중히 보관되고 있으며, 그외 일부의 <막사발>은 우리 나라의 수집가에 의하여 다시 우리 손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경북 예천과 지리산 자락에서 조선의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한 도공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막사발>이 주는 심적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막사발>이기에 함부로 나뒹굴었던 사발로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난번 청주에서의 전시회 처럼 서민과 가까이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만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보니 <막사발>이라는 용어는 아주 훌륭하게 이름 붙여진 용어인것 같습니다. 그 <막사발>이라는 용어에 담긴 의미야 말로 순수하고 꾸밈없는 우리네 서민적 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전시 기간은 작년 7월 8일로 종료가 되었지만  "5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던 <막사발>에 담긴 의미를 새겨보는것이 어떨런지요.....


 
가져온 곳: [수수께끼의 낡은 보물창고]  글쓴이: 가시나무새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