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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새 천년을 위해 아껴둔 보배로운 섬.."珍島"

鶴山 徐 仁 2005. 9. 5. 17:23
 


  새 천년을 위해 아껴둔 보배로운 섬... “珍島”


우리 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인 진도... 진도 관광안내소에서 구한 관광 팜플릿의 앞장에는 “새 천년을 위해 아껴둔 보배로운 섬” 이라고 진도를 칭하고 있는데 섬이 많아 그 이름도 多島海라고 붙여진 해역에 위치한 진도군은 자그마치 2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도가 섬에서 뭍으로 변하게 된 것은 1984년에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두 개의 빨간 기둥으로 이루어진 진도 대교가 개통되고 나서이다.



  이곳은 얼마전 TV드라마에서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명랑대전의 격전장으로 육지와 진도 사이에 있는 바다인 울돌목(鳴粱)의 빠른 물살과 조수를 이용하여 왜선을 유인, 대첩을 거둔 곳이기도 한데 진도 대교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물살이 빠르게 휘감기며 흘러가고 있었다.


南道가락이 파도와 더불어 넘실대는 珍島의 멋


  물살이 어찌나 세찬지 다리를 놓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은 양쪽 기슭에 기둥을 세우고 강철선을 매다는 공법으로 지금의 진도 대교를 건설하였다.

  진도를 가로지르는 18번 국도에 들어서면 이곳이 섬이라는 인식을 하기가 어렵다. 크게 높은 산이나 지역이 없기에 바닷가에 나 있는 지방도에 들어서기 전에는 바다를 구경조차 하기 어렵고, 한 겨울임에도 밭에는 싱싱한 배추와 양배추가 무성하게 자라고 논이며 밭이며, 심지어는 담장 주변에도 갓이 흔하게 자라고 있는 진도는 섬이지만 오히려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해산물이 귀한 “해변산중”의 특이한 생활수단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림을 비롯하여 굿, 놀이 등 무형문화재가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민속의 보고이며 예향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삼별초의 마지막 대몽항쟁의 숨가쁜 격전장....

                   “용장산성”


  진도대교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우측으로 군내면 용장리로 빠지는 길이 나타난다.

이곳에 있는 용장산을 둘러쌓고 지어진 성이 용장산성이다. 이 성은 고려 원종 때 몽고에 무릎을 꿇은 조정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켰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여 제주로 퇴각하기까지 9개월간 몽고군에 대항했던 곳이다.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출발했던 야별초에서 출발한 삼별초는 정부군보다 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몽고군과 싸웠으나 조정에서는 몽고와의 강화를 추진하고 무신정권의 몰락으로 해산 명령을 받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溫을 새 왕으로 받들고 조정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는 강화도를 출발하여 땅이 기름져 자급자족하며 오래 버틸 수 있고 특히 해전에 약한 몽고군을 방비할 수 있는 진도로 옮겨와 기존의 용장산성을 더욱 든든하게 보수하고는 이곳에 궁궐을 짓고 溫王을 황제로 칭하였다. 이곳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三別抄는 그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육지의 곳곳으로 세력을 넓히기도 했으나 김방경과 몽고군 홍다구가 이끄는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과 10여일간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다 溫王이 여몽연합군에 쫒기다 죽임을 당하고 배중손도 남쪽의 남도석성으로 퇴각했다가 전사하자 김통정은 남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로 건너가게 된다. 이로써 삼별초의 진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용장산성은 대부분 석성(石城)으로 이루어 졌으나 일부는 토성(土城)으로 지어 졌으며 지금도 행궁은 없으나 행궁터는 석축을 쌓았던 흔적이 계단식으로 남아있다.


  용장산성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벽파진이다. 이곳 앞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크게 무찔렀던 명량해전의 격전장으로 지금은 평화로운 모습이나 봉긋하게 올라온 바위 언덕의 이충무공 전첩비가 세워진 곳에 올라서서 명량해협을 바라보노라면 불타는 왜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머릿속에 그려진다.


 

  전첩비는 1956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으며 “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 라고 시작되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비문이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든 돌거북의 등위에 새겨져 있다.


   용장산성에서 패퇴한 삼별초가 섬의 남쪽 끝에 있는 남도석성으로 피신을 하여 최후까지 싸우다 배중손이 전사하자 삼별초의 진도시대는 끝을 맺게 된다.

  삼국시대 때부터 지어져 있었다는 남도석성은 높이가 4M, 성 위의 폭은 2~3M 가량 되는 둘레 526M의 아담한 성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수십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는 남도석성은 이곳이 과연 성으로서의 구실을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성안의 사람들은 예전의 성문을 통해 출입을 하고 있으며 성안에는 작은 텃밭도 일구어 채소 등을 생산하고 있었고, 성벽 위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어 이곳에 올라서면 성안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남도석성의 남문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는데 이곳에는 두 개의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단홍교와 쌍홍교로 불리는 이 다리는 언제 놓여진 다리인지 모르지만 자연석재인 편마암을 사용하여 만든 다리로 작지만 특이하고 아름답다.


 

 홍교란 虹蜺 즉 무지개처럼 다리를 만드는 것으로 석재가 서로 버티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보통은 커다란 화강암을 이용하는 경우는 많으나 남도석성 앞의 다리처럼 자연 편마암을 이용하여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자연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남종화의 본산 “雲林山房”


  진도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예술 魂... 그것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小痴 허 련은 일찍이 김정희와 교분을 가지고 조선말기의 선비화를 이끌었다. 원래 허 련은 진도 출생이었으나 서울에서 궁중 생활을 하였으며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운림산방에서 그림에만 몰두하였다. 산방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뒷산인 첨찰산과 어우러지게 하였으며 운림산방의 맥은 小痴 許 鍊, 그의 아들 米山 許 瀅, 그리고 손자인 南農 許 楗과 집안사람 毅齋 許百鍊 등을 통하여 남화의 전통이 계승되어 이어져 왔다.  운림산방의 벽과 새로 지어진 유물관에는 도자기를 비롯한 3대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림도 전시되고 있지만 전시되어 있는 그림은 모두가 복제품이며 진품은 한 점도 없다고 한다. 이곳이 우리 나라 남화의 성지임에도 진품이 한 점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진도에는 매년 음력 2월 그믐에서 3월 보름사이 바다가 갈라지는 회동마을의 靈登살(영등사리) 축제가 유명하다.

  옛날 호랑이의 피해가 심할 때 마을 사람들이 섬으로 피신을 하며 급하게 피신을 하느라 할머니 한 분을 못 모시고 갔는데 이 할머니가 ‘뽕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용왕에게 가족들과 만나게 해 달라고 매일 바닷가에 나와서 빌었는데 이 할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용왕이 받아들여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다.  그 길을 건넌 할머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고, 가족을 만난 할머니는 기진하여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바다가 갈라지는 날이 할머니의 영혼(靈)이 하늘로 올라간 날(登)이라고 하여 영등살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신비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큰 날 약 2.7Km 떨어진 모도와의 사이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매년 40만명의 관광객이 진도의 바다가 갈라질 때 해산물을 줍는 등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러 찾아오지만  1시간이 채 안되어 바다는 도로 그 신비를 덮어 버리고 만다.

 1970년대 후반부터 영등살에 때맞춰 진도군 주관의 영등축제를 벌이는데 이 때는 진도의 무형문화재인 씻김굿, 다시래기, 남도들노래, 진도만가, 북놀이 등 고유의 민속공연이 함께 펼쳐져 한꺼번에 진도의 모든 문화를 맛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문화는 소리 문화로 ‘진도아리랑’이 있다. 진도아리랑은 한이 많이 깃든 정선아리랑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이 주로 하는 것이 많고 생활 전반의 익살과 해학이 담겨져 있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 가냐”

    “십오야 밝은 달은 내 사랑 같고 그믐의 어둔 밤은 내 간장 녹이네”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애기 젖통은 몽실몽실”

    “서방님 오실까봐 꾀(속옷의 일종)를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났네”


  이러한 진도아리랑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도 씻김굿이 벌어지기 전에  걸지게 노래되어지고는 하는데 후렴구인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으응~응~ 아라리가 났네”를 신나게 부르며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순간을 이루며 앞절을 부르는 노래꾼은 특히 정해진 사람이 있기보다는 누구라도 끼어 들어 생활에 관계되는 익살과 해학이 담긴 노랫말로 군중의 후렴을 신명나게 돋구기도 한다.


   이렇게 문화가 많은 진도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진도에는 특별한 파수꾼이 있으니 천연기념물 제 53호인 진돗개이다. 진도를 돌아다니면서 보니 온통 진돗개다. 아니...실은 정통혈통을 받지 않은 강아지도 많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진도에 사는 개는 모두 진돗개처럼 보인다. 

  호랑이를 이기고 주인에게는 누구보다도 충직하다는 진돗개는 흰 것과 누런 것이 표준으로 되어 있으나 아직도 유래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그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움이 앞서지만 혈통을 고정시키고 개발해 나간다면 우리의 우수한 진돗개도 언젠가는 확실하게 우리 나라 진도의 명견임을 인정을 받으리라...


   진도의 밤은 까만 밤이었다. 해가 진 늦은 오후였지만 태양의 잔광에 의해서인지

구름의 윤곽이 한밤에도 보이는 것 같았다. 굴을 따는 아주머니들이 사진에서 처럼 길손을 불러 세우고 맛있는 굴을 먹어보라던 진도 인심...  


그 인심만큼이나 소박한 진도사람들과 이곳에서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던 삼별초의 용맹스러움을 생각하며 진도아리랑의 후렴구를 조용히 입으로 되뇌어 피곤한 몸에 흥을 돋운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으응~응~ 아라리가 났네”


 
가져온 곳: [수수께끼의 낡은 보물창고]  글쓴이: 가시나무새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