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航空 宇宙 관련

[스크랩] 비행기 일반

鶴山 徐 仁 2005. 8. 25. 23:09
1.글라이더 (glider)
동력 없이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

비행기에 의해 공중으로 견인되는 글라이더
 

 
 
 
 
 
 
 
글라이더 개발에 이바지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1848~96)로, 그는 1867년 동생 구스타프와 함께 부력(浮力)과 공기저항(空氣抵抗)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또 캠버(camber)와 날개 단면을 연구했고, 자신이 만든 글라이더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마침내 수평꼬리날개를 달았다. 그후 1891년 처음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글라이더를 만들어 내리막길을 달려 바람을 타고 나는 데 성공했다.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 5. 23 프로이센 앙클람~1896. 8. 10 베를린.

독일의 항공학 선구자.

옥타브 샤누트나 라이트 형제와 같은 후대의 항공공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포츠담에 있는 직업학교와 베를린 직업전문학교를 마친 뒤 새 모양의 펄럭거리는 날개가 달린 모형비행기와 글라이더를 가지고 시험했다. 새의 비행에 관한 그의 저서 〈항공술의 기초로서의 새의 비행 Der Vogelflug als Grundlage der Fliegekunst〉(1889)과 나는 기계에 관한 그의 논문들(1894)은 항공학의 기초가 된 연구결과로 인정되었다(→ 항공교통). 리히터펠더 근처의 인공 언덕에서 자신이 고안한 단엽 및 쌍엽 글라이더를 타고 2,000번 이상 비행했으며 리노프 근처의 슈퇴른에서 비행하던 중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1896년 프랑스 태생의 미국 공학자 옥타브 샤누트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글라이더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위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수평꼬리날개가 붙은 고정 수직꼬리날개로 제어하는 릴리엔탈식 방법 대신 방향타(方向舵)와 몇 부분으로 나누어진 날개를 썼다. 그가 만든 글라이더는 매우 안전하여 2,000회 무사고 비행을 기록했다.
 
샤누트[Octave Chanute]
  

1832. 2. 18 파리~1910. 11. 23 시카고.

미국의 항공기 조종사.

그의 연구와 관심 분야는 라이트 형제와 이들의 비행기 발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토목공학을 공부했으며, 학문적 관심을 항공학으로 바꾸기 전에는 철도와 철교를 건설했다. 글라이더 비행실험을 하고 있던 오토 릴리엔탈과 다른 유럽인들의 연구에 매력을 느껴 시카고 근처 미시간 호의 모래언덕에 글라이더 비행실험을 위한 야영 천막을 세웠는데, 그때 그는 60대였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직접 설계한 글라이더를 타고 약 2,000회 가량 사고없이 비행했다. 특히 조종과 평형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가 축적한 자료들은 라이트 형제가 초기에 했던 설계들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유용했다(→ 오빌 라이트, 윌버 라이트). 그는 라이트 형제와 지속적으로 편지왕래를 했으며, 그들이 동력비행에 성공하기 전에 활공 실험을 하던 기간(1901~02) 동안 키티호크(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북동부의 마을로서 라이트 형제가 1903년 이곳에서 인류 최초의 유인동력비행에 성공했음)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제작한 항공기,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근처의 ...

1902년 라이트 형제는 첫 글라이더를 성공적으로 만들었으며, 몇 번의 실험을 거쳐 비행중에도 조종 가능한 수직방향타(垂直方向舵)를 쓰기로 결정했다(→ 오빌 라이트, 윌버 라이트). 그뒤 수평승강타(水平昇降舵)를 달고, 조종할 수 있는 수직방향타에 날개를 구부릴 수 있는 장치를 결합시켜 날개 뒷전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조종장치가 완벽해져 글라이더는 안전하게 비행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그들은 동력 비행기를 만들게 되었다.
 

글라이더가 뜨기 위해서는 날개가 중력을 이길 만큼 충분한 양력(揚力)을 얻을 때까지 비행속도를 증가시켜야 한다. 대부분의 초기 글라이더는 비행속도가 매우 낮았다. 즉 보통 바람을 타고 날았기 때문에 실제 필요 가속도가 크지 않았다. 오늘날은 대부분 비행기나 자동차로 견인하여 띄우며, 견인 밧줄은 길이 60m로 양끝에 강철고리가 달려 있어 한쪽 끝은 글라이더의 앞쪽 갈고리에, 다른쪽 끝은 견인 비행기나 자동차의 갈고리에 연결한다. 글라이더를 견인하여 날게하는 방식은 2가지로 고무줄 새총의 원리를 이용한 고무줄 발사식이나 큰 낚시 릴에 물고기가 걸린 것처럼 글라이더를 끄는 윈치견인식이 있다. 행글라이더는 보통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발진하며, 세일플레인 글라이더는 오르막 지형에서 발생하는 상승 온난기류(溫暖氣流)로 양력을 얻어 여러 시간 활공할 수 있다.
 

1935년 이후에는 항공학과 기상학(氣象學) 연구에 쓰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무선 및 기록장치를 실어 뇌우(雷雨)의 중심부로 날려보내 적란운(積亂雲)의 세기와 성질에 대한 자료를 모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군대수송용으로 널리 쓰였다. 글라이더, 특히 세일플레인은 여가용이나 운동경기용으로 점차 사람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날개 wing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를 들어올리는 날개꼴.
 
 

동체(胴體)의 윗부분에 날개가 있는 고익(高翼)은 아래쪽의 시계(視界)가 제한되지 않고, 좌우방향으로 안정성이 뛰어나다. 수상비행기 동체 위의 비스듬한 버팀대(strut)에 설치된 파라솔 날개는 물보라로부터 기관을 보호한다. 동체의 가운데 부분에 날개가 있는 중익(中翼)은 폭탄이나 화물을 싣기 위해 동체 아랫부분에 부착되는 날개보가 필요없다. 동체 아래에 날개가 있는 저익(低翼)은 착륙장치의 높이를 줄일 수 있고, 기관정비가 간편하다.
 
날개꼴 airfoil
비행기의 날개·꼬리·프로펠러 회전날개와 같은 모양을 한 면(面).

 
 



공기 속에서 움직일 때 양력(揚力)과 항력(抗力)이 발생하는데, 날개꼴에서 공기흐름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양력과 공기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항력이 생긴다.

빠른 항공기는 얇고 유선형인 저항력·저양력 날개꼴을 주로 사용하고, 무거운 짐을 수송하는 느린 항공기는 항력과 양력이 큰 두꺼운 날개꼴을 사용한다.

단거리이착륙기 短距離離着陸機, STOL airplane
기존의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데 필요한 활주로에 비해 상당히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을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고정날개 항공기.
 
 
 

대부분의 이런 종류의 비행기들은 보통 활주로보다 1/10 정도 짧은 150m 정도의 활주로만 있어도 이착륙에 충분하다. STOL기는 덤불이나 황무지 같은 지역에서 비행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이런 지형에서는 급상승, 예리한 진입각도, 느린 착륙속도가 빠른 비행속도보다 더 중요시된다. 1980년대 초반에 도입된 보강날개(augmentor wing) 같은 공기역학적 장치들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기능이 가능해졌다. 보강날개는 날개의 앞쪽 가장자리에 전체 날개길이를 따라 설치된 슬랫과 날개 뒤쪽 가장자리에 전체 날개길이를 따라 설치된 2줄로 홈이 난 보조날개로 이루어졌다. 이런 장치들과 에어 덕트(air duck)를 조작하면 난류(亂流)와 프로펠러에 의해 유도된 바람을 통해 양력(揚力)과 항력(抗力)을 더 얻을 수 있다. 1954년 미 해군은 현대적인 STOL기의 최초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그뒤 미군과 영국군은 전투작전용으로 STOL기를 채택했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캐나다와 다른 나라에서는 수직이착륙기를 상업용 단거리정기항공으로도 사용했다.
 

롤링 rolling
항공기의 동체와 나란한 축에 대한 회전운동.
 

가로운동이라고도 불리며 피칭(pitching:선체의 앞뒤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현상), 요잉(yawing:선체의 앞이 좌우로 흔들리는 현상)과 함께 항공기의 3대 기본운동 중의 하나이다. 보조날개(비행기 주날개의 좌·우·뒤·가장자리에 있고 가로방향의 조정에 이용되는 날개)의 변위를 조정하여 제어한다. 변위를 만들어 오른쪽 양력(揚力)을 크게 하고 왼쪽 양력을 작게 하면 기체가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무인정찰기 無人偵察機, reconnaissance drone
조종사가 탑승하지 않고 전자장치를 이용한 원격조정 또는 자동조정에 의해 유도되는 정찰기.
 
보통 무인정찰기는 포사격 연습이나 가상 공중전의 표적으로 사용되던 무인기에 정찰에 필요한 전자장비를 장치한 것으로, 목표상공에서 기체 내에 장착된 자동 카메라로 목표를 촬영하거나 영상을 기지에 송신한다. 이 항공기는 군사목적 외에 기상관측에도 사용된다.
 
보이저 Voyager
미국의 실험용 비행기.
 

1986년 최초로 재급유(再給油)나 착륙을 하지 않고 세계일주 비행을 했다. 딕 루탄과 지나 이거가 조종한 이 비행기는 12월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동쪽으로 100㎞ 떨어진 에드워즈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9일 동안 4만 251㎞에 걸친 세계일주 경로를 비행한 뒤 같은 장소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는 1962년에 수립된 2만 167㎞의 직선비행기록을 쉽게 경신했으며, 세계일주비행을 할 때의 평균순항속력은 약 186㎞/h였다. 버트 루탄이 설계한 이 비행기는 그 뒷부분에 길이가 33.8m인 주(主)날개가 있고, 비행기의 기수에 수평안정날개가 있다. 이 비행기의 동체(胴體)는 탄소-섬유 테이프와 에폭시에 적신 종이를 층으로 쌓아서 조각들을 만들고, 이 조각들을 에폭시로 접착해 가볍고 강하게 제작했다. 출발할 때는 비행기 무게인 840㎏의 4배 정도 되는 양의 연료를 동체·날개 그리고 그외 구조의 내부에 완전히 채웠으나, 비행 도중에는 이 연료 가운데 몇 갤런만 사용했다.

 

 
 
보조날개 aileron
조종사가 제어하여 비행기가 길이 방향을 중심으로 회전할 수 있도록 하는 비행기 날개의 가동부분(可動部分).
 
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비행기가 선회할 때 사용한다. 비행기의 발달에 따라 보조날개의 모양은 변했으나 주로 날개 뒤 끝부분에 위치한다. 보조날개가 기체 횡축을 중심으로 한 기수의 상하 제어에 효율적이므로 라이트 형제가 사용했던 날개의 비틀림(warping) 장치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복엽기 複葉機, biplane
날개가 2개인 비행기.
 

1930플리트, 2인승 복엽기

한 날개 위에 다른 날개가 설치되며, 이런 형상은 1890년대의 몇몇 글라이더에 응용되었다. 라이트 형제의 복엽기(1903~09)는 동력비행(動力飛行)시대를 열었다. 복엽기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30년대초까지 군용 및 산업용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복엽기의 뛰어난 조종력에도 불구하고 속력이 빠르고 가벼운 단엽기의 장점을 따를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엽기는 단지 농약살포나 곡예비행(曲藝飛行) 등 특수목적에만 사용되었다. 1930년대 중반 아돌프 부제만은 양 날개 사이의 간격을 매우 좁게하여, 팽창파(膨脹波)와 충격파(衝擊波)가 상호작용함으로써 항력(날개단면의 두께 때문에 생기는 '형상항력')을 줄이도록 고안된 초음속(超音速) 복엽기를 만들었다. 한 날개(주로 아래 날개)가 다른 날개보다 훨씬 작은 복엽기를 세스퀴 비행기 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몇 대의 삼엽기(三葉機)가 설계되어 성공했으나, 4개 또는 그 이상의 주양력면(主揚力面:날개)을 갖는 동력비행기는 단지 실험용으로 그쳤다.

 

 

수상비행기 水上飛行機, seaplane
물 위에 떠 있거나 이·착륙할 수 있는 항공기.
 

미국해군 P5M-2 수상비행기

수상비행기의 동체가 배와 비슷하면 비행정(flying boat)이라고도 하며, 별개의 플로트(float)가 달려 있는 것은 플로트 수상비행기(float plane)라고 부른다. 최초의 실용적인 수상비행기는 1911, 1912년 미국의 글렌 H. 커티스가 제작·비행했다. 커티스의 발명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F-보트가 만들어졌으며, 이것으로부터 해상정찰·대잠수함전(對潛水艦戰)·기뢰(機雷)부설·항공 해상구조작업 등과 같은 해군의 항공임무가 유래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수상비행기의 상업용 기종은 항속거리와 항속시간에서 기록을 세웠다. 1919년 미해군의 수상비행기 NC-4는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최초로 북대서양을 횡단했다. 1920년대말까지는 수상비행기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빠른 항공기였다. 1929년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뉴욕 시까지 비행한 소련의 ANT-4기와, 1930년대 로마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그리고 로마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한 이탈리아의 비행기들로 인해 수상비행기의 유용성과 다용도성이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지상발진형 비행기의 항속거리가 늘어나고 지상기지 및 항공모함이 건설됨에 따라 군사적·상업적인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으며, 수상비행기의 개발은 소규모로만 유지되었다.
 

수상비행기는 물 위에 떠 있을 정도로 충분한 부력(浮力)을 가져야 하며, 비행속도에 달하는 속도로 수면 위에서 움직일 때 자체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조종사의 입장에서는 이착륙할 때 안정성 및 제어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즉 구조는 착륙할 때의 충격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야 하며, 짧은 활주거리로 이륙할 수 있도록 물과의 저항이 적어야 한다.
 

커티스는 이런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2가지로 제시했다. 근본적으로는 육상기이면서 착륙바퀴 대신 플로트를 부착한 플로트 수상비행기와, 비행기 동체가 한 척의 선체(船體)처럼 생긴 비행정을 개발했다. 두 경우 모두 이륙을 쉽게 하기 위해 플로트의 바닥을 계단식으로 설계했다. 속도와 양력(揚力)이 증가함에 따라 수상비행기는 단계적으로 상승하여 최소한의 저항으로 물을 살짝 스치며 지나가게 된다. 단일 플로트 수상비행기와 단일선체 비행정은 균형을 잡기 위해 측면이나 날개 끝에도 플로트가 설치되어야 한다. 쌍(雙)플로트 수상비행기는 보조 플로트가 필요 없으며, 쌍선체 비행정과 수면에 짧은 날개나 스폰슨(비행정 옆의 짧은 날개)이 부착된 단일선체 비행정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커티스는 플로트 수상비행기와 비행정에 접을 수 있는 착륙바퀴를 달아 지상활주로와 수면 중 어디서나 작동할 수 있는 수륙양용기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수면이나 눈·얼음·진창·잔디 등 활주로가 아닌 여러 지형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장치를 단 전천후, 또는 전기지(all-base) 비행기가 개발되었다.

 

커티스[Glenn Hammond Curtiss]
 

1878. 5. 21 미국 뉴욕 해먼즈포트~1930. 7. 23 버펄로.

미국 항공기 산업의 선구자.

그의 항공기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널리 사용되었다.

자전거의 기계장치를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04년에는 '캘리포니아 화살'(California Arrow)이라는 비행선용 기관을 설계·제작했다. 항공기 기관 제작의 성공으로 인해서 A.G.벨이 설립한 항공기실험협회(AEA)에 가입하게 되었다. 1908년에 AEA가 제작한 비행기로 그는 미국 최초로 1㎞ 비행에 성공하여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트로피를 받았다. 그는 최초의 수상 비행기를 제작했는데, 미국 해군에 군함과의 공동작전에서의 수상비행기의 실용성을 입증한 뒤 미국 해군 비행기를 제작하는 계약을 맺었다. 1917년에 공장을 크게 확장했으며,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에도 비행기를 판매했다. 그의 비행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널리 사용된 연습기인 JN-4(또는 제니)일 것이다. 또한 이 비행기는 전후 지방순회극단에서 인기 있는 비행기였으며, 로키 산맥을 넘는 최초의 캐나다 우편비행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회사는 특허 침해로 라이트사와 법정 소송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중지되었고, 그후 두 회사는 커티스-라이트사로 합병되었다.

 
수송기 輸送機, transport plane
자재·인원·화물 등의 항공수송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행기의 총칭.
 
군·민간을 통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항공기이며 가장 종류가 많은 항공기이기도 하다. 크게 군용과 민간용으로 나뉜다. 군용은 병력(兵力) 및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항공기로서, 이에는 활공기(glider)와 강습용 항공기 및 대형 병력 수송기가 포함된다. 민간용은 여객기, 화물기, 여객·화물 겸용 수송기 및 특수화물 전용기 등으로 구별되며, 항공로의 규모와 수송량에 따라 형식·크기·성능이 각기 다른데 대양 횡단이나 주요항로에는 4발대형기(四發大型機)가 표준이다. 여객기에 있어서는 극도의 안전과 쾌적이 요구되는 것 외에 저렴한 운항비, 많은 탑재량, 최단 지상정류시간 등이 각 기종(機種)을 통해 요구되는 특성이 있으며, 화물기는 특히 하역설비가 중요한 조건으로 되어 있다. 1919년 세계 각국에서 비행기에 의한 여객수송의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수송기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지만 근대수송기의 시초는 1935년 미국에서 제작된 DC-3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52년 제트 기관을 장착한 수송기인 영국의 DH 코멧기가 처음으로 정기항공에 취항한 것을 시발로 하여 1958년부터는 수송기의 본격적인 제트화가 이루어졌다. 프로펠러기에서는 음속에 가까워지면 효율이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에 시속 800㎞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으나, 제트기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으며, 군용기인 록히드 YF-12A는 이미 시속 3,332㎞(마하 3.1)의 속도 기록을 수립했다. 상용 수송기의 속도는 일반적으로 마하 0.85 정도이지만, 1976년 이래 SST(초음속 수송기) 콩코드는 마하 7.2로서 정기노선에 취항하고 있다. 오늘날의 수송기는 여객용으로는 약 5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화물용으로는 120t 이상을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대형화되었으며, 수직이착륙 및 초단거리 이착륙의 수송기도 개발되는 등 점보제트의 수송수단은 더욱 발전하고 있다.
 
찰스 A. 린드버그가 1927년 5월 20~21일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최초의 무착륙비행(無着陸飛行)을 한 비행기.
 

1927년 5월 20∼21일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루이스호는 뉴욕과 파리 ...

그는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사업가 모임의 지원을 받아 비행을 했다.
 

이 비행기는 리안 M2를 개량한 리안 NYP로서, 린드버그의 설계에 따라 단일(單一) 기관의 고익단엽기로 만들어졌다. 이 기종의 표준형은 5인승이지만, 이 비행기는 기실(機室) 대부분의 공간을 보조연료 탱크로 사용했다. 동체 앞부분의 기관덮개를 연장하여 바람막이로 이용했다. 옆창문으로만 직시(直視)할 수 있으므로 정면은 잠망경(潛望鏡)에 의존했으며, 라디오 수신기도 없었다. 공냉식 성형기관(成形機關)으로 작동되었으며 최고 237HP(마력)를 냈다. 이 비행기는 날개길이 14m, 전장 8.4m이다. 보조연료 탱크를 포함한 연료 용량은 450갤런이었다. 해수면에서 화물을 싣고 200㎞/h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으며, 항속거리(航速距離)는 6,600㎞이다.
 

이 비행기는 배에 실려 유럽에서 미국으로 되돌아왔으며, 린드버그는 항공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이 비행기로 아메리카 대륙 전역(북·중앙·남 아메리카)을 비행한 후 스미소니언 연구소에 기증했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
 

1902. 2. 4 미국 디트로이트~1974. 8. 26 하와이 마우이.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

린드버그(1929)

항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27년 5월 20~21일에 뉴욕에서 파리까지 최초의 대서양횡단 무착륙단독비행을 했다.

 

어린시절은 미네소타 주 리틀폴스와 워싱턴 D. C.에서 보냈으며, 그의 아버지는 10년 동안 미네소타 제6선거구를 대표하는 의회의원을 지냈다. 매디슨의 위스콘신대학에서 2년 동안 정규교육을 받은 뒤, 비행술에 관심이 높아져 네브래스카 주 링컨 비행학교에 입학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비행기인 '커티스 제니'를 구입했다. 그는 이 비행기로 남부와 중서부 주에서 곡예비행을 했으며, 텍사스의 육군비행학교에서 1년(1924~25)을 보낸 뒤, 항공우편 조종사가 되어(1926)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했다. 이 기간에 세인트루이스의 한 사업가 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2만 5,000달러 상금이 걸린 뉴욕-파리를 횡단하는 최초의 무착륙단독비행에 참여했다. 단엽기(單葉機)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 루이스'(Spirit of St. Louis)로 1927년 3월 20~21일에 33시간 30분 동안 비행했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대서양 양쪽 국민들의 영웅이 되었으며, 전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호의에 보답하는 일련의 비행을 했다.
 

그는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드와이트 모로의 딸인 앤 모로를 만나 1929년 5월에 결혼했다. 그녀는 많은 비행에서 그를 위해 부조종사와 항법사의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함께 세계 여러 나라를 비행했다. 이 기간 동안 린드버그는 트랜스콘티넨탈항공운송회사와 팬아메리칸 항공의 여러 항로를 개인적으로 개척하는 기술고문으로 활동했다. 1932년 3월 그의 2살된 아들 찰스 오거스터스 2세가 뉴저지 주 호프웰 근처 그들의 집에서 유괴·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세계적인 인기 때문에 1930년대의 가장 유명한 범죄가 되었으며, 브루노 리처드 하우프트만이 유괴살해범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처형된 1936년 4월까지 신문의 주요 기사거리였다. 그는 명성이 싫어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1936년 독일의 항공시설을 방문한 이후에는 나치 독일의 공군력 성장을 계속해서 경고했다. 1938년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을 때와 그가 미국에 돌아온 뒤인 1940~41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중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을 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의 공개성명서를 비난했기 때문에 1941년 4월 육군항공대 예비역위원회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했을 때는 민간인이었으며, 포드 자동차회사와 유나이티드항공기회사(United Aircraft Corporation)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전쟁에 적극 참여했다. 유나이티드항공기회사의 고문 자격으로 태평양에서 임무여행을 하는 동안 50회의 전투비행을 했으며, 그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독일 항공학의 발전을 조사하기 위한 유럽에서의 해군기술사찰단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가족들과 함께 코네티컷과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는 팬아메리칸 항공과 미국 국방부의 자문역을 계속했다. 미국항공자문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수많은 다른 항공관련 단체에서도 일했다. 1927년 의회의 특별결의를 통해 수여된 명예훈장 이외에도 많은 훈장과 상을 받았다. 정부에 대한 공로로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공군 예비역준장으로 임명되었다.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 루이스 The Spirit of St. Louis〉(1953)에 파리까지의 비행을 묘사하여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우리들 We〉(1927)·〈비행과 인생 Of Flight and Life〉(1948), 그리고 프랑스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알렉시 카렐과 공동으로 연구한 주제와 관련된 〈기관(器官)의 배양 The Culture of Organs〉(1938)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출판하지 않으려고 했던 〈전쟁일지 Wartime Journals〉(1970)에는 1938~45년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다.
 
연습기 練習機, trainer
조종사가 고성능 항공기의 효과적인 조종을 준비하기 위해 설계된 비행기.
 
복잡한 현대식 군용기를 조종하기 위해 조종사는 고도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군사훈련 계획에 따르면, 주로 초등단계에서는 단발기(單發機)를 이용하며, 중간단계에는 쌍발 제트기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초등 연습기는 복잡한 장비를 최소한만 갖춘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중간단계의 연습기는 상당히 복잡하다. 이 비행기들은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전투에 사용되는 여러 복잡한 장비를 설치할 수도 있다. 비행훈련은 주로 학급단위로 학생들이 직접 관측·계산할 수 있는 조정석이 여러 개 마련된 쌍발수송기가 사용된다. 고속·고성능 군용기를 훈련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렵고 위험해 조종사와 승무원 훈련은 많은 경우 모의비행장치(模擬飛行裝置)로 한다.
 
모의비행장치[模擬飛行裝置, flight simulator]
 
비행기와 우주선의 조종사나 승무원들의 훈련을 위해 실제와 비슷한 비행상황을 만드는 전자·기계 장치.
 

모의훈련의 목적은 실제비행훈련을 완전히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들고 만일의 경우 위험할 수도 있는 실제비행훈련을 하기 전에 훈련생들이 비행기에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 있다. 모의훈련은 조종사들이 기존 항공기의 개조형(改造型)을 조사하고 익숙해지는 데에도 유용하다.
 

모의비행장치는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이 있은 지 10년이 못 되어 영국에서 2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장치는 조종사가 기수(機首)를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기체(機體)를 좌우로 기울이고,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간단한 항공기 조종술을 입체적으로 모의훈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효과적인 모의비행장치는 뉴욕 빙엄턴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공부한 비행사이자 발명가 에드윈 링크가 1929년에 발명한 계기비행연습기(Link Trainer)였다. 링크는 비행기의 모든 움직임을 실제상황처럼 꾸미는 계기판(計器板)과 조종장치를 갖춘 비행기 조종실의 모형을 만들었다. 조종사들은 이 장치로 계기훈련, 즉 일정한 높이로 곧장 날아가거나 상승·하강하기 위해 계기판에 있는 인공수평의(人工水平儀)를 제외하고는 수평에 대한 아무런 시각적 참조도 없이 계기판독을 바탕으로 하여 조종장치를 조작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항공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계기비행연습기도 개량되었다. 민영 항공회사들도 계기비행연습기로 조종사를 훈련시키기 시작했으며, 1934년 6대의 계기비행연습기를 구입했던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수천 대를 더 구입했다.
 

전쟁기간에 이루어진 기술발달 가운데 특히 전자공학의 발달로 모의비행장치는 점차 실제에 더 가깝게 만들어졌고, 1950년대초에는 효율적인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하여 성능이 더욱 향상되었다. 이무렵에는 비행기 조종실·조종장치·계기표시판이 각기 개별화되어 있었으므로 아주 단순한 경비행기 외의 다른 비행기를 조종하도록 조종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일반화된 계기비행연습장치의 사용은 더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미공군은 A-4D 공격기와 F-4 전투기의 조종실과 똑같은 모의비행장치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1960년대초에는 전자 디지털 컴퓨터와 복합형(hybrid)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컴퓨터의 속도와 융통성이 모의비행장치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컴퓨터를 사용하여 우주비행에서 직면할 수 있는 복잡한 실제상황을 재현할 수 있었다.

 

계기비행연습장치[計器飛行演習奬置, link trainer]

조종사의 비행훈련을 지상에서 할 수 있도록 비행기의 모든 계기와 조종장치를 똑같이 만든 비행기 조종실.

조종실은 조종장치에 따라 실제 비행기가 비행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계기비행연습장치는 최초의 실용적인 모의비행장치였다.

 
 
연식비행선 軟式飛行船, blimp
내부 기체압력으로 모양을 유지하는 연식(軟式) 또는 반경식(半硬式) 비행선.
 
미국 해군의 ZPG-3W 연식비행선

'blimp'라고 하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영국의 B급 비행선'(British Class B airship)과 '단단하지 않은'(limp), 즉 연식(nonrigid)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행선은 제1차 세계대전중 해군에서 함대호위와 대잠초계용(對潛哨戒用)으로 사용되었으며, 박람회에서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 광고용으로 이용되었다. 미국해군의 ZPG-3W 비행선은 길이가 123m, 지름이 26m, 부피가 4만 2,475㎥ 이상인, 세계 최대의 연식비행선이었다. 이중 4대는 1958년 배치되었으나, 2년 뒤 하나가 폭발해 추락했으며 1962년에는 나머지 비행선들도 폐기되었다.

 

 
오토자이로 autogiro
회전날개를 이용한 항공기의 일종.
 
autogyro라고도 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헬리콥터로 대체되었다. 이 항공기는 전진운동을 위해 프로펠러가 사용되고 양력(揚力)을 얻기 위해 구동력 없이 자유롭게 회전하는 회전날개가 사용된다. 비행 도중에 감속이 가능하고 수직으로 착륙할 수 있는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 실험가들은 많은 원형(原型)들을 제작했으나, 모두 비행중 제어가 힘들었다. 1923년 스페인의 후안 데 라 시에르바는 회전날개를 허브에 관절이음(돌쩌귀이음)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회전에 관련된 공기동역학적 힘과 원심력에 대해 회전날개가 다르게 반응하도록 했다. 이 발견으로 오토자이로는 최초로 비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뒤에 헬리콥터의 개발로 이어졌다. 오토자이로는 이륙하려면 활주(滑走)해야 하며 회전날개를 구동시키기 위해서는 전진대기속도가 필요했다. 반면에 헬리콥터에는 기관으로 구동시키는 회전날개가 있어 수직이착륙이 가능하다. 자이로글라이더(gyroglider)는 견인하다가 이를 분리시킨 뒤 회전날개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공하도록 설계된 무동력 오토자이로이다.
 
콩코르드 Concorde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SST).
 
1962년 양국이 공동개발에 들어가 1967년 시작기(試作機)가 완성되어 1969년 첫 비행을 했으며, 1970년 마하 2를 기록했다. 1976년 1월 21일부터 영국항공이 런던-바레인 선에, 그리고 1977년 런던-뉴욕 선, 에어프랑스가 파리-리우데자네이루 선에 취항시켰다. 고도 약 2만m에서 마하 2의 속도로 비행하며 좁고 긴 3각날개 밑에 4개의 기관이 있다. 항속거리는 약 6,000㎞이며 최대승객수는 128명이다. 취항 전부터 소음과 배기 가스에 의한 대기오염이 문제되었고, 취항 후에는 과다한 연료소비와 높은 운임 등으로 다른 여객기와의 경쟁에서 채산을 맞출 수 없어 1979년 생산이 중단되었다.
 
항공기 航空機, aircraft
사람이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탈 것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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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Hurricane
영국의 호커항공사가 제작한 단좌전투기(端坐戰鬪機).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세계 각지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날개가 동체 밑부분에 부착된 단엽기(單葉機)로서 1935년 설계되었으며, 수평비행에서 시속 483km 이상인 영국 공군 최초의 비행기였다. 20가지 이상의 개량형들이 전폭기, 공습기, 함선의 사출기용(射出機用) 비행기, 함재기 등으로 이용되었다. 1944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만 4,000기 이상의 변형이 제작되었다. 원래는 최고상승고도 1만 980m, 최고속도 시속 약 530km이며 양 날개에 구경 0.303in(인치) 기관총 8개로 무장한 형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첫해에 영국 조종사들이 이 비행기의 최초 모델을 타고 1,500대 이상의 독일군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독일 공군). 다른 모든 영국 연합 비행대가 격추시킨 수도 이 기록을 넘지 못한다. 나중의 개량형에는 40㎜포 등 더 많고 더 무거운 포와 포탄과 로켓을 싣는 랙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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