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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가야의 변천과 멸망

鶴山 徐 仁 2005. 8. 25. 13:51

가야가 일정한 정치체성립 이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의 건국은 백제․신라와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6세기까지 그 세력이 존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가야제국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족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우선 가야사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자세가 삼국시대라는 개념의 틀에 맞추어 가야를 단순히 신라와 백제의 부수적인 존재로서 결국 신라에 의해 병합되어 버린 소집단으로만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물론 가야에 대한 사료가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더욱 《삼국사기》에 보이는 가야 관계 기록 역시 신라의 정복과정에 따른 피동적인 위치로서 단편적인 기술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가야사에 관한 연구가 부진했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일제의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임나일본부가 가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가야사 연구가 금기시 되었다.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가야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가야지역의 유적발굴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이에 관한 연구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삼국사기》상대기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日本書紀》에서의 소위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사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영성(零星)한 가야사료의 보충을 가능케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료들을 근거로 종래의 소극적인 연구자세를 지양하고 왜곡된 일본의 고대사를 바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고대의 한일관계를 인식하기 위해 적극적인 가야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가야 지역의 개관에는 문헌적 자료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의 연계가 매끄럽지 못한 관계로 지역적 경계나 위치, 국명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으나 대체로 삼한에서 즉 마한에서 백제, 진한에서 신라, 변한에서 가야가 성립이 인정되고 있다.
가야의 성장을 파악하기 위해서 변한 세력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면 변한은 철기 보급이전에 청동기를 바탕으로한 여러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연의 동방 침략과 진한(秦漢)교체 및 고조선계인 준왕집단․역계경집단 등 북방으로부터의 부단한 유이민의 남하에 의해 충격을 받아 점차 가야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수로왕의 천강신화도 이런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중에서 김해 금관가야은 한군현과의 접촉과정에서 점차 성장하여 향후 전기가야연맹체 형성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진문물의 유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대외교역의 구심체가 등장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漢문화의 침투이후 농공구와 함께 무기가 출토되고, 철기의 본격적인 재지생산(在地生産)이 이루어지는 등 선진적인 철기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삼국지》에 가야지역에서의 철의 화폐로서의 기능(판상철부)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수공업의 발달과 중앙정부에 의한 일정한 행정력이 있었음을 상정한 것이기 때문에 우월집단에 의한 지배력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이상에서 초기 가야지역연맹체의 중심세력으로서 등장한 김해 금관가야의 정치적 성장은 철기가 확산되고 대외교역의 효용성이 크게 부각되는 서기 1 - 2세기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낙동강 하류와 경남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전기가야 연맹체는 서기 400년 전후한 시기에 광개토왕남정에 의해 타격을 받기 전까지는 가야세력을 주도해 나갔다.
우선 이 시기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가야와 백제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는데, 백제는 4세기에 고구려와 대립 경쟁하고 있었기에 지지세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후방에 대한 군사력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서 가야와 친선을 도모하였다. 한편 가야는 중국 군현의 소멸이후 북방 선진지역과의 교류가 축소되자 이를 타개할 필요성에 의해 4세기에 이르러 아라, 가락, 탁순 등의 가야제국이 백제와 우호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면, 신라가 3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변 소국을 통합하거나 연맹관계를 이루었고, 4세기 후반이 되면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의 전진에 알려질 정도로 진한 지역의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가야제국 가운데 김해의 금관가야는 신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양국의 세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접촉이 많았다.
하지만 양국의 세력 팽창과 경쟁관계는 3세기 후반부터 문화적인 특성이 달라지고 양산을 경계로 한 점 등에서 보면 양국의 관계는 친선보다 경쟁이나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여진다.
가야와 왜와의 관계는 일찍부터 활발한 교섭을 전개하였는데 남해안 지역에서 왜인계 유물이, 일본열도 서부지역에서 한반도 남부계통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점이 그 증거이다. 일본열도의 왜는 한반도와의 교섭을 통하여 철 등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려 하였고, 가야나 신라에서는 일본열도를 통하여 남방물자를 입수하기 위하여 교섭하였다.
4세기 중반 이후 남해안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백제와 가야제국사이의 교섭체계에 왜도 가야의 협조를 매개로 참여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국제정세 아래 백제는 북방 고구려와의 경쟁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한반도 남부지역 및 왜와의 교섭을 적극 시도하였고, 가야제국은 북방선진문물을 입수하기 위하여 백제의 해상기반을 활용하려 하였다. 한편 가야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북방에 접경한 고구려와 친선을 도모하였다.
서기 400년 전후의 가야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고구려의 팽창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왕이었다. 그는 재위시기에 적극적인 북방경영으로 영토를 확산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방향을 돌려 그 지역의 강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이남의 충주지역까지 진출하고 동해안 방면으로는 강릉까지 나아가 신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팽창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은 이에 여러 가지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와 친선을 유지하였던 신라의 요청에 응하여 400년대 일어난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에 의한 가야남정이다.
고구려 남정의 결과 가야제국 내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가야제국 가운데 가장 우세한 세력이었는데, 고구려군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나 패퇴하여 그 타격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갔다. 아라가야는 금관가야에 버금가는 세력이었는데, 고구려의 예봉을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국력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여 남정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국력을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경 국력을 유지한 아라가야가 그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가야지역에서 양국이외의 유력한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고령의 대가야이다.
영남내륙의 함안 이서 지역은 각 소국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 중에서 대가야가 광개토왕의 남정이후 갑자기 부각되었다.
전기가야연맹은 4세기 국제관계 변동의 기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5세기 초에 일단 해체되었다. 이는 가야가 그 후 신라와 백제보다 정치적 발전이 뒤쳐지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고령의 대가야는 안정적인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영남해안 지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도입하면서 5세기 후반 합천, 거창, 산청, 하동, 사천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후기가야연맹체를 형성하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축조세력으로 보이는 그들은 후기가야연맹체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하였는데, 전단계의 맹주인 김해 세력으로부터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대가야시조 설화를 표방하여 옛 가야연맹의 판도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대가야는 또한 철산지인 ‘야로’라는 지역을 개발하여 한층 강화된 모습을 띄게 되었고 국제사회에도 등장하여 479년에는 가라왕의 이름으로 南齊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報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기도 하고, 481년에는 백제,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 침입에 대한 구원병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성장한 대가야도 백제가 가야지역에 대한 영토확장을 꾀함에 따라 도전을 받게 된다. 백제는 섬진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513년 이들 지역을 확보한다. 이에 대가야는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동맹도 곧 깨지고 백제․신라의 영향권내로 포섭되어 갔다.
이 시기 국제상황을 보면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백제는 그 세력만회를 위해 가야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에 대처하고자 하나 신라와의 결혼동맹도 오래 가지 않아 깨어져 결국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541년부터 550년까지의 약 10년간에 걸쳐 가야연맹은 안으로는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남북으로 갈라진 패권을 하나로 모으려는 내부경쟁을 계속해 왔으며 밖으로는 백제, 신라, 왜, 고구려 등의 사이에서 상호간의 경쟁관계를 이용하여 독립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외교적으로 모색해 왔다. 그러나 백제 성왕이 신라와 외면적인 화친을 유지하면서 선진문물을 이용하여 가야연맹체 및 왜를 포섭하는 외교전략을 펴 나감에 따라 결국 가야연맹제국은 그에 휘말려 내부의 독립적 움직임이 거의 소멸된 채 백제의 부용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가야연맹의 운명은 그들을 다루는 백제의 의도에 의해, 또는 백제 자신의 성패와 그대로 운영되어 움직이는 신세가 되었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 귀족사회의 내분과 서북부 국경의 압박으로 인한 주의의 분산으로 신라와 함께 북진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신라가 백제의 한강하류 유역을 빼앗고 신주까지 설치하였다. 이에 백제는 가야와 왜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백제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은 단번에 무너져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선점권을 상실하였고 가야연맹제국은 큰 피해를 입은 채 멸망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이라 보인다. 550년을 전후한 시기 백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기득권들을 지키지 못하였으며, 신라는 이를 빼앗아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가야지역에 대한 패권을 넘보게 되었다. 아라가야를 대표로 하는 가야 남부지역은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對왜교역의 중심지였다. 南部諸國의 멸망 뒤 백제의 영향을 받고 있던 아라가야는 신라가 한강유역 경영을 일단 끝낸 558년 이후 일련의 강압과 회유를 시도하자 저항없이 이에 응함으로써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북부지역은 교역보다는 자체의 제철능력이나 안정적인 재지농경에 기반을 두고 말기에 백제측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비교적 자발적으로 친백제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에 대해 좀더 독자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가야는 당시 독자적으로 신라에 정면 대항할 만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못했으며 562년 백제의 신라변경 침략 이후 대가야는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멸망하자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연맹체국은 대세에 눌려서 거의 일시에 신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고 추측된다.


가야제국은 변한 12국을 모태로 형성되었으며, 질 높은 철자원의 확보와 교역상의 잇점으로 초기부터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 신라처럼 중앙집권화된 즉,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정치사회체제를 확립하면서 국가영역으로 화한 옛 진한 영역 전체와 낙동강에 인접한 변한 일부지역을 문화적으로도 하나로 묶어나간데 비해, 가야사회의 영역은 서서히 줄어들고 제한된 영역 안에서조차 기존의 김해․함안 외에 고령이 또하나의 지역중심으로 등장함으로써 가야지역에 세 개의 정치․문화권이 병립․경쟁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가야 사회가 지역연맹을 넘어서는 정치제를 성립시키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야사회가 지역연맹 수준의 정치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동안, 고구려․백제․신라는 중앙집권국가를 성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가야 중심의 교역체계에 간섭하고 이의 재편을 기도하였으며 나아가 가야사회의 해체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백제․신라는 마지막까지 정치적․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했던 금관․아라․대가야 등 가야의 지역세력들을 그 주변에서부터 압박해 들어가 562년 고령 대가야의 신라로의 병합을 끝으로 가야사회의 해체작업을 완결시켰다. ‘철의 왕국’ 가야는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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