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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고대사] 삼국사기의 가야사 1

鶴山 徐 仁 2005. 8. 25. 13:48

70-80년대 이후 학계의 대부분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하여 신뢰하는 입장이나 아직도 학계 일부에서는 이를 불신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자신의 전공분야와도 관련이 있다. 전공별로 따지면 고구려사 전공자 가운데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사람이 가장 많고, 가야사 전공 가운데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사건은 물론이고 아예 기년부터 신뢰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많은 가야사를 통하여 왜 신뢰하지 않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내가 쓴 글에서 무엇이 잘못인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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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가야기록은 신라본기에만 다음처럼 18개가 나온다.

 

(1) 탈해 21년(77); 秋八月, 阿?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 賞功也

(2) 파사 15년(94);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吉元 將騎一千擊走之

(3) 파사 17년(96); 秋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 拒之 爲賊所殺 王怒 率勇士五千 出戰敗之 虜獲甚多

(4) 파사 18년(97); 春正月, 擧兵 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罪 乃止

(5) 파사 23년(102);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謂 金官國首露王 年老 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陀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6) 파사 27년(106);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7) 지마 4년(115);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薄 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8) 지마 5년(116);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 以繼之 加耶?城固守 會久雨 乃還

(9) 내해 6년(201); 春二月, 加耶國請和

(10) 내해 14년(209);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加羅 勿稽子傳皆作阿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1) 내해 17년(212);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기록의 공백기>>

 

(12) 소지 3년(481); 春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 加耶 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13) 소지 18년(496); 春二月, 加耶國送百雉 尾長五尺

(14) 법흥 9년(522);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

(15) 법흥 11년(523);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16) 법흥 19년(532); (달이 없음)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17) 진흥 12년(551년); 春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18) 진흥 23년(562년); 秋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 先馳入?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고고학]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가야지역은 1-2세기에는 신라지역과 비슷하거나 약간 우월한 수준의 유물을 보이다가, 3세기 들어서면 신라지역을 압도하기 시작하며, 3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북방계 철기 기마문화의 유물이 출토되는 등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 신라지역을 양과 질에서 단연 압도한다.

 

[삼국사기] 하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는 신라지역과 엇비슷한 유물수준인 1-2세기에는 신라와 경쟁하지만 우세한 존재로 나오고, 가야지역 유물이 강해지는 3세기 초반이 되면 오히려 신라에 의지하는 약한 존재로 나오다가, 중반이 되면 아예 사라져 고고학과 완전히 반대다. 3세기 후반이 되면 고고학적으로 강력해지는 가야를 묘사하지 못한 사서의 기록은 인정할 수 없다. 어떤 사료도 고고학과 모순되면 신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가야부분은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모순에 찬 거짓 투성이다.

 

[삼국지] 반면에 삼국지를 보자. 3세기 중부에 변한지역은 철교역의 중심지라고 해서 철제품이 대거 출토되는 가야지역의 고고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금은보다 구슬을 선호한다는 기록도 실제로 금은제품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구슬제품이 대량 출토됨으로써 고고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3세기 중반의 삼국지를 보면 가야가 없다. 그런데 3세기 후반에 가야지역에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는 유물의 격변이 일어난다. 이는 가야제국이 3세기 중후반에 건국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따라서 가야가 1세기 중반에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논리적 모순이다. 3세기 기록을 약 2백년을 당겨 1세기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다.

 

[광개토왕비] 삼국사기에는 3세기 중반부터 4세기 중반까지 가야가 아예 없다. 이것이 사실인가? 우리는 그 가운데 존재하는 특급사료를 가지고 있다. 4세기 말을 기록한 광개토왕비다. 그런데 여기에 엄연히 가야가 나온다. 신라 같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고 고구려와 당당하게 맞서는 강력한 임나가야가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가야가 없다고 하고 있다. 이런 거짓이 어디 있는가?

 

[삼국사기] 가야지역의 유물은 5세기 중반이 되면 신라지역에 우월성을 상실하고 점차 약해진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그때 고구려와 전투하는 강력한 모습의 가야가 다시 나온다. 고고학과 완전히 반대이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6세기 중반에 가야제국은 신라에게 정복당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6세기에 들어서면 가야는 신라와 치열한 전투를 하지만 밀리다 멸망당해야 상식에 맞는 것이 아닌가? 6세기의 삼국사기는 마지막 기록을 제외하고는 신라와 별다른 충돌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멸망해 버린다. 이런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사건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이 어디 있는가?

 

[고고학] 3세기 후반에 신라지역을 완전히 압도하던 가야지역의 유물은 4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는다. 그런데 이 시기는 삼국사기에 가야가 없는 시기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사서도 4세기에 전성기를 보여야 맞는 것이 아닌가? 신라지역을 압도하던 가야지역의 유물은 5세기 중후반에 점차 역전되기 시작하여, 6세기가 되면 완전히 신라지역의 우세로 돌아선다. 그래서 6세기 중반에 신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이다. 유물만 보아도 아주 명확하다. 그런데 가야지역의 유물이 약해지는 5세기 후반에 삼국사기에는 오히려 2백여년의 공백을 깨고 강력한 가야가 나타나 고구려와 전투하는 등 완전히 모순덩어리다. 이런 엉터리 사료가 어디 있는가?

 

[일본서기] 6세기에 가야는 신라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아야 타당한데 삼국사기는 6세기에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반면에 일본서기를 보면 5세기에 임나는 신라에게 공격받지 않아서 고고학과 일치한다. 또한 6세기에는 임나가 신라에게 무차별 공격받고 있어서 역시 고고학과 일치한다. 그렇게 공격받다가 신라에게 망하는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가야사에 관한 한 일본서기는 삼국사기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우월하며 합리적인 기록이다. 적어도 가야사는 고고학과 모순되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고고학과 일치하는 일본서기를 보고 연구해야 한다.

 

끝으로 삼국유사(가락국기)를 보자.

 

1. 수로왕 (42-199) ----- 157년 재위

2. 거등왕 (199-253) ----- 54년 재위

3. 마품왕 (253-291) ----- 38년 재위

4. 거미질왕 (291-346) --- 55년 재위

5. 이시품왕 (346-407) --- 60년 재위

6. 좌지왕 (407-421) ---- 14년 재위

7. 취희왕 (421-451) ---- 30년 재위

8. 질지왕 (451-492) ---- 41년 재위

9. 겸지왕 (492-521) ---- 29년 재위

10. 구형왕 (521-562) --- 41년 재위

 

초반의 왕들은 150년 재위하는 것 외에도 거의 평균 50년 정도 재위하여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한마디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엉망의 기록이다. 반면에 후반의 왕들은 그런 대로 재위기간이 합리적인데, 이는 3세기에 즉위한 수로왕을 1세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 발생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부자상속으로만 이어진다는 10명의 왕이 무려 5백년을 재위하는데 이는 불합리하며 3백년 정도가 합당하다. 그런 면에서도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처럼 약 2백년(3세기 건국을 1세기 건국으로)을 늘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삼국유사의 가야기록도 초기기록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올바른 가야기록이란 다음과 같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다.

 

'3세기 중후반에 강력해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4세기에 전성기를 맞다가, 5세기 중후반에는 약해져서, 6세기에 신라에게 공격당하다 멸망하는, 그런 나라의 역사가 진정한 가야사다. 그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가 있다면 나는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도로서 그 앞에 무릎을 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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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럴듯한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삼국사기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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