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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삼국사기의 가야사 3.

鶴山 徐 仁 2005. 8. 25. 13:50

삼국사기의 가야사 2.에서

6세기 초 지증왕대를 끝으로 왜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신라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지증왕대는 신라가 강성해져 공격적이 되는 시기로서 바다 건너 우산국까지 점령한다. 또한 이 직후인 법흥-진흥왕대는 신라가 가야제국을 합병하고 한반도 동남부를 석권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신라본기에서 왜의 사라짐은 신라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가 멸망당하는 과정이 신라본기에 없는 것은 어떤 이유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의 멸망과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 법흥왕조 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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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이상 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야사의 마지막 부분을 마저 쓰겠다.





(16) 법흥 19년(532);(사건의 달이 없는 唯一한 기록) 金官國主 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가야기록 중에 가장 길고 자세한 기록이 전기에는 수로왕의 기록이고, 후기에는 김무력이 나오는 이 기록이다. 한마디로 이 기록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위하여 존재하는 기록이다.

모든 가야기록이 달이 나오는데 이 기록만 달이 없다. 이 기록은 金庾信과 문무왕의 정통성과 관련되는 기록으로서 삼국사기에서 가장 정확하고 중요해야 할 기록이다. 건국 초의 가야기록도 모두 달을 아는데 여기만 모른다.

국가가 멸망하는데 마지막에 저항 한 번 않고 나라의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였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훗날 고려에 나라를 넘길 때 신라조차도 왕자들이 저항하였다. 자국인도 진골이 되기 어려운데 항복한 적국의 지배층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도 있는 왕족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록은 가짜다. 하지만 의미없는 기록은 아니다. 이 무렵의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가 법흥왕의 신라에게 공격받아 점령당해 간다.

훗날 金庾信을 내세운 신라본기의 왜인(임나가야인)들이 신라를 장악하고 그들의 혈통을 받은 문무왕이 즉위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金庾信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출신을 미화할 필요가 생겼다.

기록을 보니 법흥왕 19년(532)에 신라가 임나가야를 공격할 때 많은 임나인들이 신라에 항복하였는데 그 중에 김무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야인들이 신라사관을 위협하여, 김무력이 항복하고 신라에 들어온 해에, 여러 가야제국 중에 그래도 덜 잔혹하게 정복당하여 신라인들에게 인상이 괜찮았던 금관가야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한 것처럼 꾸미도록 하였다. 구형왕이 3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태자인 첫 번째로 하면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남아있어서 들킬 가능성이 더 크므로, 뒤에 있어서 잘 모르는 세 번째 왕자를 빼고, 그 자리에 김무력을 집어넣게 하였다.

하지만 신라사관들이 일부러 달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가야인들의 칼이 목에 들어와 있는 상황 속에서 신라 사관이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었다. 만고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후 신라를 장악한 가야인들은 모든 공식문서를 고치고, 백성들에게고 김무력이, 5백년 동안 신라를 공격했던 왜인출신이 아니라, 마치 금관가야 왕실출신인 것처럼 선전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법흥왕 19년에 금관가야가 항복하고, 진흥왕 23(562)년에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는 것처럼 나온다. 이것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532년이 아니라 562년에 금관가야가 항복했던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희석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다 금관가야는 562년에 멸망한 것이 아닌가?" 하고 물으면, "금관가야는 532년에 멸망하였고, 562년에는 부흥군이 진압당한 것이었다"하고 피해가는 것이다.

즉, 신라본기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진흥왕 23년에 대가야 멸망기록을 가져다 놓아, 마치 가야는 법흥왕 19년에 금관가야가 항복하고, 진흥왕 23년에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는 것처럼 혼동하게 하였다. 이는 금관가야가 김무력이 들어온 법흥왕 19년이 아니라 대가야가 멸망한 진흥왕 23년에 멸망했다는 신라본기의 증언이다.  

*삼국사기의 열전은 본기와 다르게 김부식이 쓴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본기 중 신라본기의 뒷부분만 썻다. 본기의 나머지 대부분은 구삼국사에 있는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쓴 후삼국시대 부분을 제외하고는 조작했을 가능성이 없다. 초기기록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문무왕의 수중릉은 역시 출신을 지나치게 따지는 신라사회의 편견에 대한 오버액션의 성격이 짙다. 한마디로 수중릉 설화는 문무왕 자신의 혈통이 왜인 출신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도 공격하는데 왜로부터는 수백년 동안을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기록만 있어서 상식적으로 보아도 부자연스럽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 대개 백년을 못 버티고 망하여 공격한 나라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4세기 이전 한의 영역에서 가장 잘 무장된 곳이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인데, 한강유역은 말갈의 공격을 방비해야 했기 때문이고 낙동강유역은 신라의 공격을 방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임나가야인을 왜로 불렀는지, 아니면 기록을 정리할 때 임나는 왜로 고쳐쓰기로 원칙을 정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본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한 숫자와 비슷한 숫자로 신라가 왜를 공격한 기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 삼국사 편집시 또는 그 이전 어느 때에 신라가 왜를 공격한 기록들은 모두 탈락된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6세기 전반에 신라가 임나가야를 일방적으로 공격한 기록들이 신라본기에 없는 것들도 같은 이유다. 다행히 김무력이 신라에 들어오는 기록 하나가 살아 남았다.





삼국사기의 가야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네티즌 고대사'에서 설명한대로이다. 자신들을 정복하였던 신라를 삼키고, 신라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혜공왕 이후 모두 몰락하였으나, 후삼국시대에 반신라의 선봉에 서서 궁예를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궁예가 중앙집권을 하려 자신들을 누르려하자, 궁예를 퇴출시키고 대신 왕건을 옹립하였다. 그리고 후백제를 누르고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왕건이 자신들(충청북도 중원경 세력)이 아닌 나주 세력에게 왕권을 넘기자, 왕건 사후 이들을 축출하고 자신들 계열인 정종과 광종을 즉위시켜 고려 발전의 토대를 완성한다.

누가 뭐래도 << 신라본기의 왜 >>는 한국사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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