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신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라는 어디인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라면 다 웃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바이킹이 안 나온다. 당연하다. 북유럽은 신라에서 아주 멀다.
마찬가지다. 신라사를 가장 잘 기록한 사서가 삼국사기이고, 그 삼국사기에 신라가 가장 많이 만나는 나라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같은 동네의 나라가 자신의 기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일부러 삭제하지 않은 다음에야 당연한
이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가 가장 많이 만난 나라는 고구려도 백제도 가야도 아니고 왜이다. 뿐만 아니라 왜는 신라본기가 가장 먼저 기록한 외국이기도 하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의 기록은 단 3개(열전포함 4)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는 특이한 기록들이다.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의 기록은 그 주 표현양식이 왜인이냐 왜병이냐에 따라 3기로 나뉜다.
(1)혁거세 8년; 왜인이 쳐들어오려다 시조가 神德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내 물러갔다. - 최초의 외국기록
《전기왜에서 중기왜로의 전환기》 (12) 조분 3년(232); 여름 4월, 왜인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여 이를 격퇴함.
제2기: 중기왜 - 왜병 (미추이사금대에는 왜의 침범이 없음.)
《중기왜에서 후기왜로의 전환기》
제3기: 후기왜 - 왜인 (35) 자비 2년(459); 여름 4월, 왜인이 병선 100척으로 동변을 습격. (40) 소지 4년(482); 여름 5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
신라본기의 왜 기록은 무려 43개인데 이 기록들의 특징을 사료적으로, 또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가. 사료상으로 살펴본 신라본기의 왜
1. 6세기 이전의 신라가 가장 많이 만난 나라가 왜이다. 분량에 있어서 왜의 기록은 가야 전체의 기록보다 2.5배 이고, 남가야(금관가야) 기록만 따지면 거의 3배에 이른다. 기록의 분량은 보통 두 나라의 접촉 빈도와 비례한다. 한반도의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를 가장 많이 만나야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있었던 국가를 가장 많이 만난다면 이상하다. 이것이 자연스러우려면 신라와 왜가 모두 한반도에 있었던가, 아니면 모두 일본열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6세기 이전의 신라인을 구성한 요소 중에 가야인보다 왜인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2. (1)번을 보면 신라가 가장 먼저 만난 나라가 왜인데 이는 가짜기록이다. 사건의 달이 없을 뿐 아니라 신라왕의 신덕에 감복하여 돌아갈 적이라면 아예 쳐들어오지도 않는다. 더구나 신라는 이제 막 건국한 신생국이다. 이 기록은 구 삼국사 편집자들이 일부러 끼워 넣은 것이다. 그만큼 왜는 신라에게 중요한 나라였다. 또한 (신라는 몽골초원에서 시작하여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므로) 신라가 국초에 만난 나라들은 북쪽에 위치한 나라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나라 순으로 나타나는데 이 기록만 예외다. *머지않아 신라 혁거세 건국전 백년사가 어떤 역사학도에 의해 책에 나올 것이고, 그러면 혁거세-남해-유리의 3대 기록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임.
3. 43개의 왜 기록 중 신라본기에서 사람의 실명이 거론되는 기록이 딱 3개인데(비미호, 미사흔, 박제상) 이 3개의 기록만 다른 사서와 일치한다. 그리고 다른 기록들은 동양의 어느 사서에도 안 나오는 기록들이다. 이는 이들이 백제본기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도 아니고, 일본서기를 쓴 왜도 아닌 다른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참고로 백제본기에 나오는 왜는 모두 일본서기와 해는 물론 달까지 일치하는 것으로부터 일본열도에 있는 왜임을 알 수 있다.
4. 왜는 가야보다 훨씬 강한 나라이다. 가야의 기록에는 약 270년에 이르는 기록의 공백이 있어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뉘는데 비하여, 왜의 기록에는 그런 공백 따위는 없고 오히려 가야의 기록이 없는 시절에 왜는 倭兵, 倭國, 倭王이라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전기가야는 신라보다 약간 우세하고, 후기가야는 신라보다 약간 열세로 전체적으로 신라와 비슷한 세력이나, 왜는 신라보다 일반적으로 강하며 특히 중기왜는 훨씬 강력한 세력이다.
5. (2)번을 보면 2천년 전에 왜는 병선 백척이라는 대규모 해상군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열도의 고고학적 출토물로는 한일간을 항해할 수준의 배 100척을 가지지 못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구주가 선단을 이용한 자유항해가 가능한 것은 3세기 이후이나, 일본에 병선 100척을 운용할만한 군사적 배경의 고고학적 유물이 등장하는 것은 대규모 대륙계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5세기 이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심지어 장보고 시대에도 일본은 중국에 가는데 자신들의 배가 아닌 신라 배를 이용하였다.
6.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은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섬멸을 시도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전혀 바다를 모르는 내륙국이라고 할지라도 해양세력과 수 백 년 전쟁하다보면 그들로부터 해양전술을 배우는 법이다. 그런데 신라와 倭는 5백년 싸우는 동안 단 한번도 해전이 없고, 왜인이 신라를 공격하는데 배를 타고 온 경우도 5백 년 동안 단 2번뿐이다. 신라와 왜 사이의 전쟁은 모두 陸戰이며, 그것도 주로 城을 두고 싸우는 攻城戰이다. 또한 바다를 건너온 왜가 단 한번도 부산지역에 상륙했다는 말이 없다. 그리고 신라에 올 때는 배를 타고 오는 경우가 있으나, 돌아갈 때 배를 타고 돌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7. (6)번을 보면 왜인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아 백성들이 대거 산으로 피신하는 혼란이 생기는데 이는 왜가 신라에서 아주 가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왜가 바다 건너에 있었다면 소문만으로 신빙성을 가지기 어렵고, 또 바다를 건너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급하게 산으로 피난 갈 이유도 없다.
8. (8)번을 보면 한반도 중남부의 요소인 죽령을 개통하였는데 백제인이나 가야인이 아니고 왜인이 온다. 이는 한반도 중앙 내륙에 존재한 죽령의 개통이 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일 일본열도에 있는 세력이라면 한반도 내륙에 어떤 고개가 개통되었건 이해가 걸릴 리 없다.
9. (10)번을 보면 여름에 왜국에 큰 기근이 들어 천여명이 걸식하러 온다. 그리고 해적이 아니고 빈민이다. 이 왜인들이 일본에 있었다면 일본에서 식량을 구하지, 무리하게 바다를 건너 그것도 적국인 신라에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굶어죽기 직전에 찾아간 신라는 가까운 곳이었고 도와줄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11.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지형을 잘 몰라 매우 당황하였으나 우리는 이 지형에 대한 정보를 잘 이용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런데 신라본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지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실수하는 일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신라도 지형의 숙지를 이용하여 왜를 격퇴하는 경우는 없다. 즉, 왜는 신라 못지 않게 한반도 동남해안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사료검토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고고학적으로 살펴보자(더 보고 싶은 사람은 '삼한사의 재조명'을 보기 바람).
1. 가야지역은 3세기 후반에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갑자기 출토되는 등 혁명적 변화를 맞는다. 이 때문에 가야의 건국을 3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견해까지 나왔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가 사라진 3세기 중반 무렵에 왜는 왜인에서 왜병으로 바뀌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다, 3세기 후반 중기왜가 되면 강력한 국가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중기왜는 倭兵의 兵, 倭國의 國, 倭王의 王(이하 본기), 그리고 외교기관을 뜻하는 倭使의 使(열전)자가 집중적으로 나와 강력한 국가의 존재를 전재하지 않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2. 신라본기의 왜 기록이 3세기 중후반에 중기왜로 전환될 때, 삼국지는 변한지역이 동북아 철문명의 중심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3세기 후반에 가야지역에 북방 철기 기마민족의 유물이 나타날 때 신라본기의 왜는 중기왜로 완전히 바뀐다.
3. 3세기 후반에 가야지역의 유물이 급변할 때 신라본기의 왜는 강력해지나 중국사서의 왜는 사라진다. 이후 중국사서에 150년 동안 왜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사이에 신라본기의 왜는 전성기를 맞는다.
4. 중국사서에서 왜가 사라지는 3세기 후반은 일본열도의 구주지역에 가야계 유물이 대거 출토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전의 일본열도는 구주지역은 동경(청동거울)문화, 기내지역은 동탁(청동방울)문화인데, 중국사서에 왜가 사라지는 시기에 기내지역의 동탁이 파괴되고 구주지역의 동경으로 대치된다.
5. 가야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4세기가 전성기인데 신라본기의 왜 역시 4세기가 전성기이다. 특히 4세기 전반에는 왜가 신라를 속국으로 둔다.
6. 중기왜 시기에 중국사서에 가야가 없으며 삼국사기에도 가야가 없다. 그런데 4말5초의 광개토왕비에는 임나가야 하나가 있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내해이사금 32년=227년)를 보면 가야 7국이 망하는데 임나가야는 망하지 않고 오히려 중기왜 시기에 임나 10국이나 하면서 가야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부상한다. * 흠명천황이 즉위할 때 소아도목이 대신이 되고, 흠명천황이 죽을 때 소아도목 대신도 죽는다. 흠명천황 시기의 왜국은 소아도목이 실세로서 모든 국사를 소아도목의 뜻대로 처리한다. 소아도목 대신은 흠명천황과 그 정치인생을 함께 한다. 나는 일본서기 쓸 때 흠명천황의 기록은 없고 소아도목의 기록만 있었다고 생각한다.
7. 삼국사기를 보면 4말5초에 가야는 없으나 왜는 존재하였다. 광개토왕비를 보면 가야는 오직 한 나라 임나가야만 존재하는데 신라보다 강국이다.(비문의 '안라인술병'은 아라가야 술병이 아니라, '안 라인 술병'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임)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당시에 신라는 왜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하는 나라로서 왜보다 약소국이었다.
8. 5세기 초 광개토왕의 낙동강유역 정벌 이후 신라본기의 왜는 점차 약해지다, 5세기 중후반이 되면 후기왜로 모습을 바꾸는 데 이때는 신라가 왜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격퇴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맞추어 신라지역과 가야지역의 유물의 수준에 역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신라지역이 점차 우세해지기 시작한다.
9. 신라지역의 유물이 가야지역을 완전히 압도하는 6세기가 되면 왜는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못한다. 이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사라져버린다.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6세기 초에 왜와 신라의 관계는 신라가 우세해야 옳다. 일본서기를 보면 6세기 전반에 신라가 임나가야를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더 보고 싶은 사람은 '삼한사의 재조명'을 보기 바람).
[요약] 가야-신라 사이의 고고학적 유물의 우월은 가야-신라 관계를 따라가지 않고 신라본기의 왜-신라 관계를 따라간다. 가야지역과 경주지역의 유물이 비등할 때는 왜와 신라도 비등하며, 가야지역의 유물이 경주지역보다 우월할 때는 왜가 신라보다 강성하다. 그리고 경주지역 유물이 가야지역 유물보다 훨씬 우월해지자 신라본기에서 왜가 사라진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보면 신라본기의 가야가 가야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왜가 가야사를 반영한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9)번을 보면 비미호의 사신이 오는데 이 2-3세기에 일본열도에 있었던 비미호의 왜국도 가야냐?
2-3세기에 있었던 야마대국은 가야인들이 건설한 나라다. 따라서 비미호의 왜국은 가야사의 연장인 것이다.
또 이렇게 묻는다. (27)번을 보면 미사흔이 왜국에 가는데 이 왜국도 가야사와 관련이 있는냐?
미사흔이 왜국에 가게 된 것은 영락 10년에 고구려군이 낙동강유역을 초토화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영락 11년 왜국 정부는 군대(한반도에 있는 왜국 군대임)를 보내 신라 내물이사금(파사 매금)을 위협하고 자국민(궁월군의 백제 120여 현민들과 아지사주의 백제 17현민들이 그들이다)들의 무사도해를 요구하는데 이의 보증으로 미사흔을 데려간다. 따라서 미사흔 기록은 변진한 지역의 수많은 가야인들이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간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가야사의 연장이다.
6세기 초 지증왕대를 끝으로 왜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신라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지증왕대는 신라가 강성해져 공격적이 되는 시기로서 바다 건너 우산국까지 점령한다. 또한 이 직후인 법흥-진흥왕대는 신라가 가야제국을 합병하고 한반도 동남부를 석권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신라본기에서 왜의 사라짐은 신라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가 멸망당하는 과정이 신라본기에 없는 것은 어떤 이유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의 멸망과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 법흥왕조 등에 있다.
결론적으로 신라본기의 왜기록을 이해하는 것이 가야사를 이해하는 것이지 가야기록을 이해하는 것이 가야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이곳에 올린 기록 2개만 소개하고 끝을
맺는다.
얼마 전에 어느 분이 다음 기록을 아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송서 왜국조, <451년> ○송서 왜국조, 462년
<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世修貢職. <高祖><永初>二年, 詔曰: [<倭讚>萬里修貢, 遠誠宜甄, 可賜除授.] <太祖><元嘉>二年, <讚>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 <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 詔 聽. 二十年, <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二十八年, 加使持節〈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將軍如故. 幷除所上二十三人軍·郡. <濟>死, 世子<興>遣使貢獻. <世祖><大明>六年, 詔曰:[<倭王>世子<興>, 奕世載忠, 作藩外海, 稟化寧境, 恭修貢職. 新嗣邊業, 宜授爵號, 可安東將軍·<倭國王>.] <興>死, 弟<武>立, 自稱使持節〈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중기왜에서 후기왜로의 전환기》: 왜병-왜인의 혼합기
《후기왜》: 왜인으로 기술되는 시기
삼국사기를 보면 444년과 459년 사이에 중기왜가 후기왜로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송서에서 임나에 가라가 추가되는 451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후 가야가 270년의 공백을 깨고 나타나 군사활동을 합니다.
이전에는 임나가 가야를 대표하다 가야가 따로 독립하여 임나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임나에서 가야가 분리되며 임나는 약해지고
중기왜가 후기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신라인이 가야지역의 정세변화를 자신의 입장에서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송서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여 연도까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질문] 일본서기 윤공천황 대는 5세기 중반인 신라 눌지마립간 시대로 비정됩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시기의 신라-왜 관계를 보면,
삼국사기/신라본기/눌지마립간>
보시다시피 전쟁 중으로 관계가 아주 나쁩니다. 이번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왜 관계를 보면,
신라와 왜의 관계가 이처럼 좋은 것은 일본서기에 아주 예외적입니다. 반면에 윤공조에는 백제는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이것도 예외라면 예외적입니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 고사기에도 나오는데 金波鎭漢紀武라는 신라인의 인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면 눌지마립간조에 나오는 왜가 일본서기의 왜입니까? 두 왜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 ooo
[답변] 신라본기의 왜는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의 일파이고, 일본서기의 왜는 일본열도에 있었던 백제의 일파이니 전혀 무관하지요. 구태여 관련을 따지라면 신라본기의 왜는 백제본기의 왜가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백제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을 때 이들의 지배를 받았지요. 한반도 시절 백제본기의 왜가 신라본기의 왜를 지배했던 것이 일본서기가 기록한 임나일본부설의 기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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