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고대사는 참으로 수수께끼로 가득찬 것 같습니다.
제가 일본고대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일본고대사가 한국의 삼국과 관련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신라사, 가야사, 백제사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일본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점차적으로 이쪽부분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대 일본사에 최대 쟁점은 고대 일본의 정치적중심지가 축자(筑紫)지방이냐 야마도지방이냐라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김석형, 조희승, 한은택등의 북한 사학자들은 고대 일본의 중심지를 축자로 보고 있고 많은 일본 학자들은 야마도로 보고 있어 평행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김석형님의 의견처럼 정치적 중심지는 축자에서 야마도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고대사 공부를 일본서기를 한 부분 한 부분씩 읽어가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있는중입니다.
공부의 순서는
1.일본서기를 통해서 본 일본고대사
2.고분을 통해서 바라본 일본고대사
3.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바라본 일본고대사
4.신대사연구
로써 처음에는 문어발씩으로 여러 책들을 무작정보았지만 지금은 일본서기만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중이고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문정창님께서 주석을 다신 일본서기를 보고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올리는 글은 정리가 대체적으로 30%정도 되는 글로 전역후에도 계속 이 부분은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지난 휴가시 글을 조금 올려봤는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올리는 글또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회원여러분들의 많은 지도 편달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부족한 글을 써보겠습니다.
==============================================================================
현 일본서기는 1467년 응인대란으로 많은 부분이 불타 없어진 것을 겨우 복원해 유지시킨 것으로 많은 이종(異種)이 있다.
현재 일본서기의 완역본은 전용신님이 번역하신 일본서기와 문정창님의 고대 일본사(1970)에 주석을 붙인 일본서기가 있으나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기에 전용신님의 일본서기 번역본을 참고로 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의 역사는 신들의 역사인 신대사와 제 1대 신무천황시부터 시작된다. 원래는 신대사부터 논의를 해야 옳지만 신대사는 이견이 많은 부분이라 뒤로 미루고 신무천황때부터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이글에서는
신찬성씨록 右京皇別에는 신무천황의 출저에 대해 《是出於新良國者祖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新良을 신라로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될 문제이다.
만약 新良을 신라로 해석하게 된다면 신무천황 원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 되어야 하겠다.
물론 현 일본에서도 신무천황을 기원전 660년 사람으로 보는 학자도 없다고 '나'는 알고 있다.
기원전 660년은 죠몽시대(신석기)로 과연 청동기시대도 아닌 때에 국가를 성립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되는가... 아직까지 나타난 일본 最古의 논 유적인 '가라쯔시 나하다께'유적의 편년도 기원전 3세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외곽시설이 발달되고 200여명정도가 거주했다고 생각되는 '히에 유적'또한 기원전 100년정도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급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외부의 적을 막기위해 설치한 고지성집락의 最古유적인 '오우기다니' 유적또한 기원전 1세기의 편년이 나와 기원전 660년의 연도는 일본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무의 6년간의 동정(東征)또한 어느 다른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일본서기 그 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제2대 수정(綏靖)천황(기원전 587년 -)때 부터 제 9대 개화(開化)천황(- 기원전 98년)때까지의 일본서기 기록이라고는 도읍을 옮기고 궁을 세로 지었다는 이야기로 650여년간의 기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기록뿐이다. 그러므로 2대부터 9대까지의 8명의 천황은 일본역사의 시작을 높게 올리기 위해 지은 가공의 천황이라고밖에는 판단할 수 없다.
제 10대 천황의 이름을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고 한다.
천황의 어머니는 '伊香色迷命'으로 '物部' ' 大綜麻杵'의 딸이라고 한다.
천황의 외가를 部일원에서 뽑았다고 하는 것은 物部가 이미 이 시기부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物部는 5세기 일본황실의 대표적인 호족가문으로 葛城, 平群, 大連, 蘇我, 和珥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세있던 씨족이다.
여기서 주목해볼것은 蘇我는 갈성에서 갈라진 가문이고 和珥,葛城는 백제계로 일본의 대표적 호족가문들이 친 백제세력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소아씨가 불교논쟁에서 승리하고 의식을 거행할때 모든 대신들이 백제의 의복을 입었다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숭신조에는 또 하나 주목해볼수 있는 기록이 있다.
바로 倭의 존재이다.
숭신조에 倭라는 지역이 처음등장한다.
숭신천황은 재위 6년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제사를 倭大國魂에게 맡겼는데, 倭大國魂은 天照大神의 제사를 倭의 ■縫邑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왜란 어느 한 지명을 뜻 하는 것이라 보여지고 이 기록 이후에도 倭라는 지명이 자주보이는 것으로 보아 천황의 통치아래 있던 땅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숭신천황은 畿內(천황의 직할지로 大和, 山城, 河內, 和泉, ■津을 말하는 것인데, 이 시기 기내는 단순히 천황의 직할지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는 평정되었으나 먼곳은 천황의 영향권아래 들지 않았다 하여 四道에 각각 장군들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였다고 한다.(일명 四道將軍의 설화)
숭신조 임나와의 대외무역, 선박의 건조, 호구조사, 조세부과등 전대와는 다른 일본이라는 정치적중심지를 천황아래 두기 위한 노력이 엿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기원전후에 일어났느냐는 것은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제가 일본고대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일본고대사가 한국의 삼국과 관련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신라사, 가야사, 백제사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일본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점차적으로 이쪽부분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대 일본사에 최대 쟁점은 고대 일본의 정치적중심지가 축자(筑紫)지방이냐 야마도지방이냐라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김석형, 조희승, 한은택등의 북한 사학자들은 고대 일본의 중심지를 축자로 보고 있고 많은 일본 학자들은 야마도로 보고 있어 평행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김석형님의 의견처럼 정치적 중심지는 축자에서 야마도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고대사 공부를 일본서기를 한 부분 한 부분씩 읽어가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있는중입니다.
공부의 순서는
1.일본서기를 통해서 본 일본고대사
2.고분을 통해서 바라본 일본고대사
3.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바라본 일본고대사
4.신대사연구
로써 처음에는 문어발씩으로 여러 책들을 무작정보았지만 지금은 일본서기만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중이고 잘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문정창님께서 주석을 다신 일본서기를 보고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올리는 글은 정리가 대체적으로 30%정도 되는 글로 전역후에도 계속 이 부분은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지난 휴가시 글을 조금 올려봤는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올리는 글또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회원여러분들의 많은 지도 편달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부족한 글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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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일본서기는 1467년 응인대란으로 많은 부분이 불타 없어진 것을 겨우 복원해 유지시킨 것으로 많은 이종(異種)이 있다.
현재 일본서기의 완역본은 전용신님이 번역하신 일본서기와 문정창님의 고대 일본사(1970)에 주석을 붙인 일본서기가 있으나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기에 전용신님의 일본서기 번역본을 참고로 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의 역사는 신들의 역사인 신대사와 제 1대 신무천황시부터 시작된다. 원래는 신대사부터 논의를 해야 옳지만 신대사는 이견이 많은 부분이라 뒤로 미루고 신무천황때부터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이글에서는
신찬성씨록 右京皇別에는 신무천황의 출저에 대해 《是出於新良國者祖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新良을 신라로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될 문제이다.
만약 新良을 신라로 해석하게 된다면 신무천황 원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 되어야 하겠다.
물론 현 일본에서도 신무천황을 기원전 660년 사람으로 보는 학자도 없다고 '나'는 알고 있다.
기원전 660년은 죠몽시대(신석기)로 과연 청동기시대도 아닌 때에 국가를 성립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되는가... 아직까지 나타난 일본 最古의 논 유적인 '가라쯔시 나하다께'유적의 편년도 기원전 3세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외곽시설이 발달되고 200여명정도가 거주했다고 생각되는 '히에 유적'또한 기원전 100년정도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급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외부의 적을 막기위해 설치한 고지성집락의 最古유적인 '오우기다니' 유적또한 기원전 1세기의 편년이 나와 기원전 660년의 연도는 일본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무의 6년간의 동정(東征)또한 어느 다른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일본서기 그 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제2대 수정(綏靖)천황(기원전 587년 -)때 부터 제 9대 개화(開化)천황(- 기원전 98년)때까지의 일본서기 기록이라고는 도읍을 옮기고 궁을 세로 지었다는 이야기로 650여년간의 기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기록뿐이다. 그러므로 2대부터 9대까지의 8명의 천황은 일본역사의 시작을 높게 올리기 위해 지은 가공의 천황이라고밖에는 판단할 수 없다.
제 10대 천황의 이름을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고 한다.
천황의 어머니는 '伊香色迷命'으로 '物部' ' 大綜麻杵'의 딸이라고 한다.
천황의 외가를 部일원에서 뽑았다고 하는 것은 物部가 이미 이 시기부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物部는 5세기 일본황실의 대표적인 호족가문으로 葛城, 平群, 大連, 蘇我, 和珥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세있던 씨족이다.
여기서 주목해볼것은 蘇我는 갈성에서 갈라진 가문이고 和珥,葛城는 백제계로 일본의 대표적 호족가문들이 친 백제세력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소아씨가 불교논쟁에서 승리하고 의식을 거행할때 모든 대신들이 백제의 의복을 입었다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숭신조에는 또 하나 주목해볼수 있는 기록이 있다.
바로 倭의 존재이다.
숭신조에 倭라는 지역이 처음등장한다.
숭신천황은 재위 6년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제사를 倭大國魂에게 맡겼는데, 倭大國魂은 天照大神의 제사를 倭의 ■縫邑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왜란 어느 한 지명을 뜻 하는 것이라 보여지고 이 기록 이후에도 倭라는 지명이 자주보이는 것으로 보아 천황의 통치아래 있던 땅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숭신천황은 畿內(천황의 직할지로 大和, 山城, 河內, 和泉, ■津을 말하는 것인데, 이 시기 기내는 단순히 천황의 직할지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는 평정되었으나 먼곳은 천황의 영향권아래 들지 않았다 하여 四道에 각각 장군들을 보내어 평정하게 하였다고 한다.(일명 四道將軍의 설화)
숭신조 임나와의 대외무역, 선박의 건조, 호구조사, 조세부과등 전대와는 다른 일본이라는 정치적중심지를 천황아래 두기 위한 노력이 엿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기원전후에 일어났느냐는 것은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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