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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초고왕의 잃어버린 20년; I. 백제인의 증언

鶴山 徐 仁 2005. 8. 25. 19:44
근초고왕의 잃어버린 20년; I. 백제인의 증언

[1] 서론

삼국사기 근초고왕조를 보면 30년 재위기간 중에 앞의 20년이 비어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2년째에 신하를 욕한 후, 기록의 공백에 계속되다 왕이 되면 하는 행위, 즉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일을 21년째야 처음으로 한다.

이를 두고 근초고왕이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를 들기를 그 기간에 중국사서에 요서백제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요서에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또 왜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를 들기를 일본서기에 초고왕으로 나오는 인물이 왜국에 칠지도를 보내는데, 왜국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고왕이 근초고왕이라고 보면, 그 공백기에 왜국을 통치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서에 물어볼 것 같으면 뭐 하러 멀리 중국이나 왜국까지 가는가? 그렇게 물어볼 바에야 차라리 가까이 있는 신라인에게 물어보면 안 되는가? 신라보다 백제에 더 잘 아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근초고왕조에는 요서가 안 나오며 왜국도 안 나온다. 이를 두고 김부식을 욕하는 사람은 史盲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확하기 때문에 안 나오는 것인데, 설명이 길므로 생략한다. 이제 신라인이 하는 말을 들어보기 전에 몇개만 보고 가자.

[2] 근초고왕조의 왕후

신라는 왕비의 기록을 대부분 남기고 있고, 고구려는 남기기도 하고 안 남기기도 하였다. 반면에 백제는 왕비의 기록이 거의 없다. 심지어 왕통을 만든 건국자 마저 왕비의 기록이 없다. 백제본기에 나오는 왕비의 기록은 다음 정도인데, 근초고왕조의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王后라 부르지 않고 夫人으로 부른다.

책계왕조; 대방왕녀 보과 위 夫人
침류왕조; 아이(미)夫人
근초고왕조; 王后
전지왕조; 팔수夫人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를 들어 왕후로 삼았기 때문에...' 라고 쓰지 못하고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보과부인의 아들이 분서왕이고, 아이부인의 아들이 침류왕이고, 팔수부인의 아들이 구이신왕이듯이 夫人이 왕자를 생산한 왕비에 붙이는 호칭이다. 오히려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왕은 이 왕후의 아들이란 말은 전혀 없는데, 이 王后는 도대체 누구에게 붙이는 호칭인가?

그리고 이 왕후는 여타 夫人으로 불리는 다른 왕비들에 비하여 비정상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정도인고 하니, 각료가 왕후의 친척이란 것만을 가지고도 왕권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왕이 신하를 욕한다는 것은 신하가 왕보다 더 큰 권력자라는 뜻이다.

신라는 여왕을 3명이나 배출하였는데 이는 삼국 중 여성의 지위가 가장 높았고, 상대적으로 성이 개방된 사회였다는 뜻이다. 힘있는 여자라고는 건국자의 어머니인 소서노를 제외하고는 단 1명도 안 나오는 백제에 왜 이렇게 막강한 왕후가 나와야 하는가?


[3] 중시조로서의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삼국사기가 백제왕이라 부른 사람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1세기 온조왕과 그 다음인 다루왕에 대해서는 백제왕이라 부른다. 삼국사기가 다시 삼국사기의 백제왕을 백제왕이라 부르는 것은 3백년이 지난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부터이다. 신라본기를 보면 그 사이에는 백제에서 사신이 온 것이지 백제왕의 사신이 온 것이 아니다.

(그 3백년 동안에는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에서 백제왕을 칭했다. 근초고왕때부터 진사왕때까지는 여러 지역이 백제왕을 칭하며 서로 경쟁한다. 중국사서를 보면 요서백제는 본래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의 통치하에 있었다. 요서백제의 통치권이 삼국사기의 백제에게 넘어오는 것은 5세기 말이다. - '네티즌 고대사').

삼국사기가 말하는 백제왕의 칭호는 영토와도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가 경기북부를 통치하는 것도 북쪽의 말갈을 격파하던 온조왕 시절이며, 그리고는 3만대군을 이끌고 황해도를 통과하여 고구려를 격파하던 근초고왕 이후이다.

삼국사기의 백제가 금강유역을 통치하는 것은 온조왕 이후 백제본기에 최초로 금강유역이 등장하는 475년인데, 문주왕이 신라에서 데려온 1만 기병대로 금강유역을 석권하면서부터이다.

삼국사기의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통치하는 것 역시 백제본기에 최초로 영산강유역이 등장하는 498년인데, 동성왕이 탐라국 정벌을 핑계로 대군을 이끌고 나주평야에 진주하면서부터이다.

삼국사기의 백제가 왜국을 통치하는 것은 무령왕이 계체를 파견하여 왜국의 구 왕통을 쓸어버리고 백제의 지방정권으로서 새 왕통을 설립하는 6세기 초이다. 외교권을 백제에게 넘겨준 왜국이 중국사서에서 사라지는 것도 이때다.

이로써 삼국사기의 백제는 6세기 초 무령왕 시기에 전 백제연합을 통일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 양나라로부터 받은 寧東大將軍이란 칭호 속에는 그런 백제사의 복잡한 사연이 다 압축되어 있다.

武寧王-21年, 冬 十一月, 遣使入梁 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 百濟 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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