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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초고왕의 잃어버린 20년; II. 신라인의 증언

鶴山 徐 仁 2005. 8. 25. 19:45
근초고왕의 잃어버린 20년; II. 신라인의 증언

[3] 신라인의 증언

신라인에게 물어보려면 기본적인 신라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의 사서는 신라가 진한의 1국이었다고 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진한의 1국이었을까? 신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한의 1국이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신라사 중에 진한의 1국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진한의 1국이 되었을까? 또 어떻게 해서 진한의 1국이 안 되었을까?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변진한 24개국이라 해 놓고 26국을 적었는데, 가야는 없으며,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은 25번째에 있어서, 사로국이 변진한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중국사서 역시 진한은 12국이라고 하고 있어서 이 숫자는 틀림없다. 즉 사로국은 당시에 변진한 근처에 있었으나 26번째 나오는 우유국과 마찬가지로 변진한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를 보면 한반도는 70여국으로 이루어진 韓과, 2국으로 이루어진 非韓의 대결양상인데, 동시대인 3세기 중반의 삼국사기 역시, 가야는 없으며, <백제-왜>와 <신라>의 양대 세력이 대립하고 있어서 두 사서가 기록한 한반도 형세가 일치한다. 결국 삼국지는 초기신라인 사로국을 한 70여국과 맞서는 대단한 존재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가 이미 2세기에 2만8천명의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신빙성을 준다.

3세기 후반은 마한왕과 진한왕이 서진에 사신을 보내는 시기이다. 그리고 그 사신은 아주 평화로운 사신이다. 반면에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후반에 신라는 백제-왜 양쪽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는데 특히 왜병의 공격이 계속된다. 그러다 유례이사금 14년인 297년에 이서고국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거국적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를 막지 못한다. 이후 신라가 진한의 1국으로서의 신라다.

3세기 이전에 신라본기에 출현하는 수만 대군의 규모는 모두 3번이다.

첫 번째는 2세기 중반인 167년에 2만8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강유역을 공격한 아달라이사금의 경우이다. 당시 한강유역의 마한 소국들은 아달라 왕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세에 눌려 감히 나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닫고 공포에 떨며 신라군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마치 먼 훗날 5세기에 아틸라 왕이 이끄는 훈족의 군세에 눌려 나와 싸우지도 못하고 공포에 떨던 로마와 유사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3세기 초반 내해이사금때 포상팔국이 가야를 공격할 때 나타난다. 신라가 도와서 겨우 방어하는데 가야포로가 6천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포상팔국의 군사력 규모는 수만 대군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상한 대로 포상팔국으로부터 공격받던 가야는 내해이사금 17년(212년)을 끝으로 삼국사기에서 사라진다. 가야가 삼국사기에 다시 출현하는 것은 무려 2백년도 더 지난 소지마립간 3년(481년)이다.

세 번째가 3세기 말인 유례이사금 14년(297년)으로, 신라가 이서고국의 공격을 받아 거국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그것이다. 군사의 규모를 적지 않았으나 신라 같은 대국이 거국적으로 군사를 일으켜도 막지 못할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이서고국의 군대뿐만 아니라 다른 진한지역의 여러 소국들 군대도 이에 합세하여 신라로 쳐들어왔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신라를 공격한 이서고국을 비롯한 군대 역시 수만 대군 이상의 규모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패한 후 신라는 급격히 변한다.

일찌기 중국인치고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어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한국의 역사학도치고 기림-흘해조를 읽어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주옥같은 기록들이다.

基臨尼師今-元年 ○<基臨>[一云<基丘{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用 {伊 }.[一云: <乞淑>, <助賁>之孫也.] 性寬厚, 人皆稱之.
- 기림왕은 선왕인 미추왕의 아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조분왕의 손자라고 하고 있다. 왕위의 부자상속이 안 되고, 구 왕족 중에서 적당한 사람의 후손을 선택하여 신라왕에 임명한다는 뜻이다.

基臨尼師今-02年, 春正月, 拜<長昕>爲이찬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祀始祖廟.
- 재위 2년째 되자마자 <정월>에 장흔 이라는 실세관료가 등장한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맡긴다. 이전에도 이런 군사 일을 담당하는 관료가 등장하기는 하나, 이번에는 실세라는 것 외에도 군사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기림-흘해(34년) 사이의 신라는 일체의 군사와 관련된 행위가 없다. 즉,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인데, 이는 4세기 전반에 신라지역에서 제철유적이 작업을 중단하여(무기를 생산하지 않아)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다. 왕은 이후 제사지내거나 구휼사업 같은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가 하는 일만 한다.  마치 일본의 천황제도가 생각난다. 기림왕은 실제로는 즉위 직후부터 허수아비였을 것이나, 체통을 생각해서 즉위 첫 해는 그냥 두고, 그 다음해 <정월>에 정식으로 권력을 뺏는 것이다.

망해서 한에 들어가면 군대를 갖지 않는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은, 후한서를 보아도 韓 70여 국이고 삼국지를 보아도 韓 70여 국이어서, 시간이 지나도 韓의 소국 수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만일 소국들이 각기 군대를 가지면 내전이 발생하고, 그러면 통합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韓내부에서 군사력을 가진 곳은 고구려를 비롯한 북쪽을 방비하던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를 방비하던 <신라본기의 왜국>을 비롯하여 몇몇 나라들 뿐이었을 것이다.

基臨尼師今-03年, 春正月, 與<倭國>交聘.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
- 그동안 싸워왔던 왜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다. 이 기록은 삼국지가 한전에 70여 국을 늘어놓았지만 그 내부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당사자의 기록이다. 또 황해도와 평안도에 있었던 낙랑국과 대방국이 경북내륙까지 올 수 있다는 기록을 통하여, 일단 韓에 들어오면 국경이 없어진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즉, 3세기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한강유역의 백제는 韓의 영역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신라를 공격하는데, 신라는 韓의 영역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본기는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군이 진한지역을 더 이상 통과하지 못하는 2세기 후반(한예강성의 시기)이 진한이 韓(마한)에 들어간 시기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가야가 한(변한)에 통합되는 것은 내해이사금 32년(신공 49년)이다.

우리는 삼국사기만 읽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하여 3세기 중반에 삼한 78국 체제가 확립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삼국지와 삼국사기가 그린 3세기의 한반도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사람은 사서분석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자세한 설명은 '삼한사의 재조명'을 참조할 것)

基臨尼師今-10年, 復國號<新羅>.
- 나라가 망해서 진한에 들어가자 국호를 변경하였다는 내용인데, 3세기 초 이전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변진한 지역의 여러 소국명이 왜 3세기 중반의 한반도를 그렸다는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에 안 나오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기록이다. 3세기 초 이전에 망해서 韓에 들어간 후 국호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3세기 중반의 삼국지 변진한조에 나오는 국명은 삼국사기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전에 나오는 소국들의 이름인 <실직국>, <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소문국> 등이 삼국지 변진한전에 나오지 않는다. 또 일본서기를 보면 3세기 초에 韓에 망한 가야 7국의 이름이 <비차발>, <남가라>, <훼국(연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인데, 이 직후인 3세기 중반의 삼국지에 기록된 변진한에는 나오지 않는다. 신라본기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韓의 소국이 되면 국호를 변경하므로 국호가 반드시 달라야 양쪽의 기록이 정확해진다. 결론적으로 이 국호변경 기록에 의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지와 일본서기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다.

訖解尼師今-元年○<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千老{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 <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 乃奉立之.
- 신하들이 왕을 임명하고 있다. 기림이사금과 마찬가지로 왕위의 부자상속이 안 되고, 몰락왕족의 후손 중에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여 허울뿐인 신라왕으로 한다는 뜻이다.

訖解尼師今-02年, 春正月, 以<急利>爲아찬 委以政要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杞{祀}始祖廟.
- 역시 기림이사금이나 마찬가지로 재위 2년째 <정월>에 권력을 급리라는 실세에게 정식으로 양도하게 된다. 국정을 일임하고(委以政要) 싶어서 일임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訖解尼師今-03年,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아찬<急利>女送之.
- 신라를 통치하던 급리가 상국이던 왜국 왕과 혼인관계를 맺어서 상국 왕의 인척이 되었다는 뜻이다. 즉 중앙 왕의 종친이 지방을 맡아서 통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왜국의 지방통치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원시적인 통치제도는 왕족을 지방에 봉하는 것인데,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왕족이 수백명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왕족만으로 통치가 어려우므로, 지방의 권력자가 중앙의 왕실과 혼인을 하여 왕의 자제종친 자격으로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다. 이 제도를 이름하여 담로제도라고 부르는데 <신라본기의 왜국>이 가진 통치제도이다. 그리고  여자가 가는 방향이 담로국에서 종주국으로 가는 것이다. *백제본기의 왜국도 이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건국서문을 보면 공손연의 통치자이던 공손도가 딸을 백제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일본서기를 보면 금강유역으로 시집보냈음)을 본 중국사가가 백제를 <東夷强國>이라 부르고 있다. 왜 공손도 딸과 결혼하면 동이강국이지? 하고 이상해하는 어리석은(?) 후손들에게, 이 신라본기의 기록은 당시 요동의 공손연이 백제의 담로국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위와 고구려 양쪽에서 압력을 받던 공손연이 백제의 담로국이 되어 안전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본 중국사가는 백제를 <東夷强國>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여의 경우는 이와 다름. '삼한사의 재조명'을 참조할 것.

3세기의 공손연은 중국사인가? 고구려사인가? 아니면 누구 말대로 고구려와 함께 요동사인가? 중국인에게 물어보니 다음처럼 중국사가 아니라 해외의 일이란다.

“公孫淵이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삼대에 걸쳐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방을 절역으로 여겨, 해외의 일로 위임시켰다.”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 天子爲其絶域 委以海外之事 - 삼국지 동이전 서문

그러면 당사자에게 물어보자 공손연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에 포함되는지? 백제의 담로국은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 바로 공손연의 역사는 백제사의 일부인 것이다.

신라본기는 또 왜 대방국이 한성백제로 딸을 시집보냈는가도 가르쳐 준다. 다 담로제도인 것이다. 즉, 백제란 70여국의 소국이 주로 그렇게 혼인으로 얽혀진 관계이다. 훗날 구삼국사 편집시 삼한사를 삭제할 때 이 기록이 대부분 빠지다보니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왕비의 기록을 제대로 적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온조왕의 왕비가 없는 이유도 바로 삼한사가 삭제될 때 함께 빠져나간 담로기록 때문이다. 그러면 왕비의 기록 대부분이 사라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건국서문을 물론이고 온조왕조부터 전체가 담로제도의 흔적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6세기 초 무령왕대에 백제가 22담로를 가졌다는 기록도 검증이 가능하다.(어떻게 검증하는가는 '삼한사의 재조명'에)

訖解尼師今-21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 신라가 김제지역과 경주지역의 2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는 韓이 진한지역에 대해서는 소국이 항복하게 되면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켜 분리통치를 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진한소국들은 마한소국들에 비하여 크기가 컷을 것이다.

"진한은 처음에는 여섯 나라였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다." - 삼국지 동이전의 한전

따라서 우리는 삼국지를 제대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면 소국이 통합되는 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분할된다고 썼으니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삼국사기가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다. 내 책은 삼국사기 앞에 중국사서를 하나씩 불러다 놓고 이것들이 얼마나 제대로 썼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또 벽골지 쌓는데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벽골지를 완공한 흘해 21년은 서기 330년으로 신라가 망하고 진한에 들어간 지 약 30년 이후이므로, 우리는 이 토목공사가 최장 30년 정도라는 것도 알 수 있다.

訖解尼師今-28年, 春二月, 遣使聘<百濟>.
- 여기도 상국에 조공하는 것을 기록하여 삼국지가 평면적으로 늘어놓은 韓 70여 국 내부에 위계질서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신라가 당시 한강유역 일부를 통치하던 나라에 이렇게 조공하는 것을 볼 때,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 등 한반도의 다른 지역을 통치하던 나라에게는 얼마나 조공해야 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가 떠오른다.

*이 외에도 진한시대가 되면 달라지는 것은 많지만 생략함. 자세한 것은 '삼한사의 재조명'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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