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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김부식에 대하여

鶴山 徐 仁 2005. 8. 25. 19:46
김부식은 『삼국사기』편찬을 끝내고 편찬자들을 대표하여 왕에게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인
'진삼국사표'와 중요한 사건에 대한 논을 썼기 대문에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곧 김부식의 사관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모화사상에 찌든 사대주의자라는 평가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당시의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여 후세에 전해준 양심적인 사관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김부식에 대한 비판은 그가 고의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 즉 고조선이나 가야, 부여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는 비판인데, 이 비판은 정당하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이나 가야, 부여의 역사가 철저히 빠져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이 성립하기 전의 마한,진한, 변한의 역사도 전혀 언급이 없다. 전체적으로 김부식은 발전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을 하나의 커다란 민족국가로 규정하였고 , 이런 민족국가의 역사적 정통성이 삼국→통일신라→고려로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만주와 요동의 지배자로서 우리 대륙의 역사는 실종되어 버렸고, 이 점 또한 김부식이 비판받는 중요한 구실이 되고 있다. 김부식은 왜 그랬을까? 『삼국사기』편찬의 총책임자로서 그가 고려시대 이전에 씌어졌던
각종 사서들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김부식은 당시의 고려가 삼국의 역사를 정통으로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여 거란침략기의 민족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그는 고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삼국의 계승에서 찾았다. 당연히 그의 관심은 삼국의 역사에만 집중되었고, 그 앞시대의 역사인 부여나 고조선의 역사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김부식은 유교적 사관에 입각해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논평했다. 이 역사관은 어떤 반역행위가 있을때에, 그것에 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다음,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는 방식을 취했다. 김부식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런 유교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한반도 역사를 중국적 시각에 맞춰 서술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신라중심의 역사로 서술하였다는 점도 김부식이 비판받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비판은 김부식이 신라의 후예로서 신라중심의 역사를 쓰기 위해 암암리에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축소하였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실 『삼국사기』를 단순 비교해 보면 신라의 역사가 월등한 분량을 차지한다. 『삼국사기 』의 내용을 단순 비교해보면 고구려나 백제의 기술 내용이 신라보다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백제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여 신라의 후예인 김부식이 원수지간이었던 백제의 역사를 축소 왜곡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도 하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자주 인용된 '백제삼서'같은 사료가 있었음에도 신라 측 사서를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신라 입장에서 서술하였다는 혐의는 특히 신라 하대의 경우에는 정도가 심하다. 이것은 김부식을 비롯한 신라계 세력들이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면서 자신들의 출생과 직결되는 신라말의 사료 가운데 일부를 신라 중심으로 윤색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가져온 곳: [ⓒ에스페란토]  글쓴이: 푸른소나무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