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영웅 동성대제
우리는 최고의 정복군주를 꼽으라면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을 꼽는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이야 말로 우리 역사상 다시 볼 수 없는 불세출의 영웅이요, 한민족의 기상을 외국에 드높인 위대한 군주의 표상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광개토태왕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정복군주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백제 24대 임금인 동성왕(479~501)이다.
동성왕은 백제 21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이름은 마모대(摩毛大)이다. 백제 23대 임금인 삼근왕 때 해구의 난이 일어나자 백제 초기의 귀족세력인 진씨세력이 그를 토벌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삼근왕이 불과 1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곤지왕의 아들인 마모대가 진씨 귀족 세력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 때 나이는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삼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처를 취했다. 우선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하고 있던 신진세력들을 대거 중앙귀족으로 흡수하여 한성에서 이동해 온 구 귀족세력들과 세력 균형을 꾀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귀족 세력으로는 사씨, 연씨, 백씨 등이 있다. 이들 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하여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나 진씨 등 남하해 온 옛 귀족세력들을 대체하여 백제 지배층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동성왕 초기에는 진씨 세력에 의해 조정이 움직여졌다. 해구의 반란을 진압한 진남이 병권을 쥐고 병관좌평에 올랐고, 해구의 목을 친 진로가 덕솔로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성왕 6년 내법좌평 시약사를 남제에 사신으로 보내고,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했으며, 19년에는 달솔로 있던 연돌이 병관좌평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동성왕이 진씨 일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 신라, 북위가 한 동맹을 형성하고 백제, 왜, 남제가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동성왕은 이러한 기존 국제관계의 틀을 깨고, 백제, 신라, 가야의 새로운 동맹결성을 주도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그는 485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고, 493년에는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였으며, 신라가 고구려와의 살수벌 싸움에서 패해 견아성에 포위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등 신라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게다가 고구려 수군에 의해 서해의 해상교통로가 막혀 국제적 고립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중국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이 밖에도 동성왕은 웅진에 궁궐을 다시 짓고 나성을 축조하여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우두성, 사현성, 이산성 등을 축조하여 웅진의 방어망을 강화하고, 가림성 등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동성왕은 탐라국이 조공을 바치지 않자 이를 벌하기 위해 친히 무진주까지 정벌을 단행하여 개로왕 피살 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업적으로 동성왕이 과연 정복군주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중국사서를 보면 동성왕이 북위와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동성왕의 중원 대륙 정벌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를 보면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기사가 동성왕 즉위 10년조에 보인다. 바로 백제와 북위간의 전쟁이 그것이다.
"위나라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침입하였으나 우리 군사에게 패했다"
그런데 만약 북위가 친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에 있는 백제였을까? 그렇다면 북위는 바다 건너 백제를 쳤다는 얘기인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북위를 세운 종족은 탁발선비족으로 곧 유목민족이다. 그런데 유목민족에게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위서』, 『남제서』를 보면 북위가 10만 기병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북위는 선단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기병을 일으켜 평원에서 백제와 싸운 것이다.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북위는 바다를 건너는 원정을 할 수 없었다. 북위는 북으로는 유연, 서로는 토욕혼, 남으로는 남제, 동으로는 고구려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수도를 비우고 대규모 선단을 운용하여 바다를 건너는 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혹자는 고구려의 길을 빌려 공격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고구려와 북위가 친했다고 해도 고구려가 길을 빌려주었을까? 이는 무식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임진왜란만 해도 일본이 조선에 명을 칠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했지만, 조선은 그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과 전쟁을 하였다. 당시 막강했던 고구려가 북위의 눈치나 살피며 길을 빌려주었을까? 그리고 길을 비켜준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기밀사항, 지리를 적에게 노출시키는 것인데 고구려가 그런 바보 같은 행위를 하였을까? 오히려 당시 고구려와 북위는 서로 대등한 강국이었다. 동북아의 강국인 고구려가 북위에게 길을 빌려주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동성왕 10년조는 대륙에 있는 백제와 북위 간의 전쟁 기록이다.
중국사서와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했음을 나타내는 기록들이 대거 보인다.
"엎드려 아뢰건대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으니 (중략)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제6 ‘최치원전’
"월(越)왕 구천의 고도(古都)를 둘러싼 대략 수천 리가 모두 백제땅 이니라" 홍봉한의 『문헌비고』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 소유하였다." 『송서
· 양서』 「백제전」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통전』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월주(양쯔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구당서』
「백제전」
"부여가 처음에 녹산에 웅거하고 있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 가까이
옮겼다." 『자치통감』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백제는 진(晉)대부터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치통감』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사』 「백제전」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 대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는 중원을 차지했다. 『주서』 「백제전」
"금주, 의주, 애훈(중국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다." <<만주원류고>>
이처럼 백제는 진나라 때 5호의 침입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졌을 때 중원에 진출하여 백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중국대륙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비롯한 백제의 식민지를 설치하였다.(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백제 근구수왕 때 해외 경략을 하였으나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빠졌음을 한탄하였다.)
488년 북위가 대륙에 있는 백제의 식민지를 공격해왔다. 당시 백제는 하북성과 산동반도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위는 자기들 코 앞에 있는 백제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급보를 접한 동성왕은 젊은 군왕 답게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해를 건너 출전하였다. 백제는 남제와 연합하여 북위와 맞아 싸웠다. 이 같은 상황을 『위서』 권7 하 「고조기」는
"태화 12년(488) 여름 4월, 소색(남제의 무제를 낮추어 부른 말)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하였다."
고 하였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10년 위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쳤으나 우리에게 패했다"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상의 하’에
"영명 6년(488) 위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하략)"
488년 백제 · 남제 연합군 대 북위와의 전쟁은 대규모 전투였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동성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하였다.
건위(建威)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長史) 신(臣) 고달(高達)을 용양(龍?)장군 대방(帶方)태수로 명하다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司馬) 신(臣) 양무(楊茂)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명하다
선위(宣威)장군 겸 참군(參軍) 신(臣) 회매(會邁)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위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포함되어, 남제측 역사서에 채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대방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백제건국의 고토인 대방고지로, 오늘날 하북성 일대를 말한다.(평남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도 진이 관할하는 13 태수 중 대방태수가 있다) 광릉군은 양자강 좌안으로 능무진현을 말하고, 광양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상곡지방이다. 청하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 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논공행상에 따라 식민지의 태수로 삼은 것이다.
488년 백제, 남제 연합군에 크게 패한 북위는 489년 8월 고조의 특사 형산과 후영소를 남제의 무제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고, 남제의 무제가 이를 받아들여 남제의 건국시조 소도성 이래 백제와 맺어왔던 동맹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490년 4월과 11월 북위와 남제는 서로 사신을 파견, 다시 한 번 화평관계를 확인한다.
북위가 남제에게 화평을 제의한 것은 하북성 · 산동성 지구의 백제군을 멸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백제와 남제의 동맹관계가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북위 고조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산동성 지구의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동성왕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반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퇴하였다. 이 상황을 『남제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위나라가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 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지난 경오년(490)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동성왕을 지칭)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꺾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위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다. 남제서를 편찬한 중국 사가들이 동성왕을 臣으로 표현한 것은 자국 중심적 역사관인 춘추필법의 표현일 뿐이다. 남제는 사직 24년 동안 7명의 임금이 있었으므로 평균 재위 3년의 불안한 왕조였다. 그러니 국가 간의 역학관계로 말한다면 오히려 백제가 남제보다는 훨씬 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남제의 무제가 북위와 화해를 했다고 앞에서 보았다. 북위로서는 백제와 남제의 동맹을 깨기 위함이었지만, 남제의 무제로서는 백제의 영향권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무제의 재위기간 중에 백제의 젊은 정복왕 동성왕이 오랫동안 산동반도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산동반도의 요충인 성양과 청하군 일대와 제남, 서주 지방이 백제의 확고한 식민통치하에 있게 되었으므로 남제로서도 북위보다는 백제에 더 큰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제의 친위정책은 남제의 대외정책과 다른 것이라, 자국 내에서도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492년 무제가 죽자, 아들 소소업이 왕위를 이었으나, 즉위 11개월 만에 무제의 당숙 소란이 쿠데타를 일으켜 소업의 아우인 15세 소문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전권을 행사하다가 3개월 후 소문을 폐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라 명제라 칭하고 연호를 건무라 하였다.
이러한 남제의 혼란과 국력약화를 계기로 백제는 남제에 대해서 더욱 지배적인 외교자세를 취하게 된다. 495년 동성왕은 남제에 외교문서를 보내 490년 경오년의 백제와 북위 간의 전쟁 전말을 알리면서 그 전쟁의 일등공신인
사법명(沙法名)을 정로(征虜)장군 매라왕(邁羅王)으로 봉하고
찬수류(贊首流)를 안국(安國)장군 벽중왕(?中王)으로 봉하고
해례곤(解禮昆)을 무위(武威)장군 불중후(弗中侯)로 봉하고
목간나(木干那)를 이전에 군공이 있고, 또한 높고 큰 배를 깨뜨렸으므로 광위(廣威)장군 면중후(面中侯)로 봉했음을 통보하였다.
여기서 동성왕이 왕을 작위로서 하사했다는 것은 그가 제(帝:황제) 또는 대왕(=太王)으로서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통보하기를
용양(龍?)장군 모유(慕逾)를 낙랑(洛浪)태수 겸 장사(長史)로 임명하고
건무(建武)장군 왕무(王武)를 성양(城陽)태수 겸 사마(司馬)로 임명하고
진무(振武)장군 장새(張塞)를 조선태수로 임명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동성왕 12년(490) 전쟁에서 패한 북위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북경 부근)에서 백제의 대륙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기게 된다.(493) 이 전쟁의 승리로 백제가 차지한 산동반도와 제남지역은 70여년 간 백제가 보유하게 된다.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 전열을 정비한 위는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정남(征南) 장군 설진호(薛眞號), 대장(大將) 유창(劉昶), 서주자사(徐州刺史) 원연(元衍), 평남(平南)장군 유조(劉藻)를 4방면으로 나누어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남제군은 영주자사(寧州刺史)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위군은 개전 21일 만에 위문제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군의 반격으로 4일 만에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호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 등, 위군은 총 퇴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15일 후 환궁하여 남정실패를 종묘에 고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태화 21년(497) 다시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 · 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에 다시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 · 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 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위는 이로써 제남, 회수 지방을 완전히 백제에게 상실하고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498)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에 1/3을 축소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으로 북위는 국세가 약화되었다. 그런데 오랜 외국 정복전쟁으로 백제 내부에서도 염전사상이 자라게 되었다. 중원의 최강국 북위를 패퇴시키고 하북성과 산동반도 양자강 일대를 연결하여 거대한 백제 식민지를 건설한 대륙의 영웅 동성왕은 한반도 곰나루(웅진)로 돌아가기보다는 중국대륙 내에서 왕업을 확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산동반도의 고도(古都) 래주에 수도 거발성을 세우고, 500년 이 곳에 높이가 5장이 넘는 임류각이라는 호화로운 새로운 궁궐을 지었으며, 궁 내에 연못을 파고 진귀한 새들을 길렀으며 아름다운 여인에 취해 지냈다.
왕이 도읍을 10년 이상 비우자, 곰나루의 귀족들은 불안해했다. 동성왕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곰나루는 시골도시로 전락할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왕실과 멀리 떨어진 곰나루 귀족들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한다. 이에 곰나루 귀족들은 상소문을 올려 임류각의 생활을 그만두고, 곰나루로 돌아올 것을 간하였으나, 동성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그러자 귀족들은 위사좌평(衛士佐平) 겸 가림성주(加林城主) 백가를 대표로 동성왕에게 보냈다. 그는 동성왕에게 곰나루로 돌아갈 것을 간했으나, 동성왕이 이를 거절하자 칼을 들어 동성왕을 시해했다.
북위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중국 대륙에 대식민지를 건설하려던 동북아의 영웅 동성왕은 어이 없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37세로 재위 23년 만이다.
비록 그는 말년에 자만에 빠져 신하에 의해 암살을 당한 비운의 군주였으나, 중원에 대백제국의 기상을 드높이고, 해양대제국 백제를 건설하려던 위대한 정복군주였다. 우리는 북위를 격파하고 중국대륙에 대식민지를 건설한 그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산호, 『대쥬신제국사』
박영규, 『백제왕조실록』
신채호, 『조선상고사』
임병주, 『삼국왕조실록』
최진, 『다시쓰는 한일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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