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중국은 남북통일 이후 국경 등 영토문제를 공고히 하거나 통일이 동북지구의조선족에 미칠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등의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앞으로 신라 이북지역에 대한 중국의 연고권까지 주장할 것으로 분석됐다.
9일 한국고대사학회가 교육인적자원부 위탁 연구과제로 지난해 12월 발간한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문제 대처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역사 왜곡 사건은 검인정 교과서의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된 반면 중국의 역사 왜곡은 중국의 정부기관이 나서서 진행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훨씬 크다"는 것. 보고서는 "더구나 고구려사 뿐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어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천년 밖에 되지 않고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광식(고려대,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임기환(경희대,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실장).여호규(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국내 한국고대사 전문가 9명이 작성한 보고서는 이어 중국측의 주요 8개 왜곡 사항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남북 역사학계의 협력대응,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처 등을 대책으로 내놨다.
다음은 보고서 요약. ◆동북 고대 종족 및 고조선 = 중국학계는 고조선을 중국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단군신화를 고대 동북지구 4대 종족 가운데 하나인 화하-한족계(華夏-漢族系)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기자조선, 위만조선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갖고 논리를 펴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는 다른 이 지역의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 족속기원과 건국 =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족원을 중국 화하족의후예로 설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막연히 상인의 후예라는 가설만 설정하다 최근에는 `일주서'<왕회해편(王會解篇)>의 고이를 고구려의 선인으로 설정하고는 이를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전욱 고양씨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노합하~대릉하 유역의 홍산 문화를 이 집단의 산물로 설정한 다음 고구려 선인이 이곳에서 연원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 경내에서 건국했으며 건국 이후 중원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었다는 것. 그러나 고구려의 적성총 문화와 홍산문화는 3천년 가량의 연대 차이가 있는 문화로, 이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 집단은 중국에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본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하던 예맥족의일원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집단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침략한 한(漢)의 군현을 물리치면서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국가체제를 완비해 나갔다.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 중국학계는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신속한존재, 즉 건국 깆후에는 현토군의 일개 현후급 국가로 출발한 뒤 현토군과 요동군에 소속된 지방국왕으로 승격한 것으로 파악했다.
고구려 왕이 중원왕조에 조공을 하고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며 이는 고구려 왕이 중원정권의관리로 중원정권을 대신해 고구려 지역 백성을 다스렸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책봉과 조공제도를 중앙정부와 지방관의 내부적 정치질서로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조공과 책봉은 당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나타난 외교형식의하나였을 뿐이다.
고구려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집단을포용하고 있었으며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백제, 신라,왜(倭)의 역사도 모두 중국의 역사가 될 것이다.
◆고구려의 영역과 평양천도 = 중국학계가 고구려사를 파악하는 기본적 논리인`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국, 북한에 각각 있는 고구려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문제점을 드러냈다.
중국학계는 현재 북한의 영토에 있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포함시키기 위해 수백~수천년 이전의 역사적 상황을 소급해 대입함으로써결국 북한영토의 고구려사까지 중국사에 편입시켰다.
즉, 현재 중국영토의 고구려사는 중국 영토에서 건국했기 때문에 중국 지방할거정권이 세운 지방사이고, 북한영토에 있는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사는 과거 고대중국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 결국 중국학계는 역사인식의 근본적 바탕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논리적 근거를 스스로 폐기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는 현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과거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게 우리 학계의 분석이다.
◆고구려의 대(對) 수.당 70년 전쟁 = 중국학계는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을 국제전이 아닌 내전으로 주장하고 있다. 수.당이 고구려를 정벌함으로써 중국 고유 영토를 회복, 전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라든지, 수.당이 고구려에 대해서는 영토의식, 수복의식, 통일의식이 있었던 반면 백제, 신라에 대해서는 종번 관계만있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군사적 팽창정책과 대륙정책을 추진했고 수.당은동아시아를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에 두려 했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당간 전쟁은 각자의 국익을 추구하려는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수.당의 세계정책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고구려 붕괴 후 유민 거취 = 중국학계는 고구려 멸망 후 주민 상당수가 중국으로 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돼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의 고구려인이 중국으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로내려와 한국사의 흐름 속에 융화된 수많은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망국민인 그들이 자의적으로 택한 길이 무엇이었던가와 고구려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이다.
◆발해의 고구려 역사계승 = 중국학게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지 않고말갈국으로 파악한다. `신당서'에 발해 건국세력 다수가 말갈족이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 또 발해라는 국호를 중국에서 받았고 발해 왕은 당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했다.
`구당서'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다. 발해가당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거나 당의 한자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당의 문화에대한 적극적인 수용의지를 보인 것일 뿐이며 자주국으로서 외교행위를 한 것일 뿐이다. 발해는 황제를 자칭하거나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비슷한풍속과 주거문화 등을 유지.계승했다.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적 계승성 = 중국학계는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세운 고려는 족속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계승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국가인 반면 고려는 조선역사상의 국가로 오늘날 조선족의 선인이세웠다는 것. 그러나 왕건은 선대가 고구려 또는 발해의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한 것도 고구려 계승의식에서 나타난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고려인 스스로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고 있었고 중국인들도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서희 장군이 거란족을 물리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가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을 적극적으로받아준 것도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용처: 연합뉴스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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