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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시대유감 - 고구려 유적지의 수난

鶴山 徐 仁 2005. 7. 31. 11:57

흙으로 되덮일 위기에 처한 고구려 유적에 부치는 哀歌


 

  1500년만에 드러난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주변 홍련봉 1보루
고구려사 지킨다면서 유적은 발굴도 끝나기전에 흙으로 되덮나..

 

 

1500여년만에 실체를 드러낸 귀중한 고구려유적이 발굴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은 커녕, 흙으로 되덮일 위기에 처했다. 발굴을 의뢰한 서울시나 우리 문화유산 보존을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화재청은 “발굴비가 없다”며 발굴도 마치지 않은 유적을 흙으로 되덮자고 주장(서울시)하거나, 수수방관(문화재청)하고 있다.

 

고구려사를 지킨다며 수십억원의 예산을 쓰는 것은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작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귀중한 고구려 군사 유적에 대해서는 발굴비 부족으로 복원은 커녕 발굴도 마치지 않은 채 흙으로 되덮으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무슨 일만 터지면 ‘우’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몰려갔다가 일순 관심이 사라지는 우리 사회의 냄비근성과 문화적 역량을 보는 것 같아 창피하고 한심스럽다”며 한숨만 내쉬고 있다.


▲ 1500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된 고구려 보루인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홍련봉 1보루 발굴 현장 모습. 30~50㎝ 되는 돌을 높이 4m 정도로 쌓아 만들었다. /이기원기자

문제의 유적은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 주변 홍련봉 1보루(사적 455호 지정 예정)이다. 보루는 둘레 300m 이하의 조그마한 성으로, 산봉우리 등에 400~500m 거리로 쌓아 서로 유기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도록 한 고구려의 특징적인 군사 시설이다.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근(近) 20개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南進) 정책으로 서기 475년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가 한강 유역 방어를 위해 서기 5세기 말~6세기 초에 쌓은 성이다. 한강변 고구려 보루는 서기 551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사상 네번째로 정식 발굴 중인 홍련봉 1보루는 ‘한강 유역 고구려 역사의 발굴과 복원’을 목표로 한 서울시의 의뢰로, 지난 5월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고구려 고고학의 최고 학자군(群)에 꼽히는 최종택 고려대교수에 의해 발굴 중이다.

 

지난 8월 23일 최 교수가 홍련봉 1보루 발굴 현장에서 발굴지도위원회를 했을 때 문화재전문가들은 “악 소리가 날 정도로 경악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연꽃무늬를 새긴 수막새(건축물에서 가장 높은 용마루나 처마 등에 놓이는, 장식성이 강한 기와)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서기 6세기 전반, 수막새는 왕궁 등 격이 무척 높은 건물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홍련봉 1보루에 고구려의 최고위 군사 지휘관이 주둔했음과, 이곳이 한강 유역 고구려 방어선의 중심기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기 6세기 전반, 한강 유역에 주둔했던 고구려의 군사적, 국가적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기에 홍련봉 1보루는 학계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발굴 사상 유례없이 열린우리당 의원 네 명이 동시에 발굴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발굴책임자인 최종택교수가 한껏 고무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요즘 최교수는 풀이 죽어 있다. 발굴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홍련봉 1보루를 흙으로 도로 덮어야 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발굴단인 고려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전체 길이 145m에 이르는 홍련봉 1보루는 9월 6일 현재 60% 정도 발굴을 마친 상태다. 지난 5월 발굴에 들어간 홍련봉 1보루는 당초 8월 중순 발굴을 마칠 예정이었지만, 보루 내부에서 건물터가 중첩돼 나오는 등 두 시기에 걸친 문화층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쉽게 말하면, 서기 500년 무렵인 6세기 전후한 무렵에 지었던 건물을 6세기 전반기에 부순 뒤 다시 건물을 짓고 사용하는 등 건물이 중첩된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발굴 도중 장마가 겹쳐 발굴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애초 발굴 시한은 지난 8월 13일이었지만, 10일을 더 연장해 8월 23일로 발굴을 마치기로 했지만 현재까지도 발굴을 마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홍련봉 1보루 발굴비 2억원은 이미 다 발굴단에 집행했고,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 발굴을 중단하고 유적 위로 흙을 되덮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서울시 문화재과의 한 관계자는 “홍련봉 1보루 발굴을 완료한 뒤 복원을 하자는 지적도 많지만 올 가을 발굴할 수락산 고구려보루와 내년에 발굴할 홍련봉2보루, 아차산 3보루의 발굴 결과를 토대로 아차산 일대 고구려보루의 전체적인 복원 계획을 검토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 역시 “올해의 긴급 발굴비 4억원은 이미 다 사용한 상태”라며 “서울시가 추진한 사업이니 서울시가 일단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남한에서는 실체를 쉽게 접할 수 없는 귀중한 고구려유적, 그것도 고구려사의 실체를 놓고 중국과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에, 홍련봉 1보루는 복원은 커녕, 발굴도 마치지 못한 채 흙으로 되덮일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 문화재위원은 “홍련봉 1보루는 흙속에서 1000여년 이상 안정된 상태로 퇴적돼 있다가 노출된 셈인데 이를 흙으로 되덮는다는 것은 신생아를 모태로 되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유적이 훼손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1997~1998년 발굴한 아차산 4보루는 발굴을 마친 뒤 복원시키지 않고 흙으로 덮었다. 그러나 되덮은 흙은 1000여년 이상 다져진 채 퇴적됐던 흙(=발굴 이전의 흙 상태)과 밀도가 달라 비 등에 쉽게 깎여 나갔다. 결국 아차산 4보루는 부분적으로는 20㎝ 이상 깎여 보루 안에 있던 대장간 시설의 유구(遺構·건축물 등의 남은 흔적)가 아무런 보존 대책이 없이 지표 위로 드러난 상태다.

 

그나마 아차산 4보루는 발굴과 실측을 모두 마친 뒤 흙으로 덮었지만, 홍련봉 1보루는 발굴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흙으로 덮이는 탓에 보존이나 복원이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사를 지킨다며 고구려연구재단 등에 수십억원의 예산 집행도 마다 않으면서 정작 귀중한 고구려 유적이 남한에서 발굴됐는데도 복원은 커녕 발굴조차 끝내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라며 “어떻게 고구려사를 지켜낼 지 한심스럽다”며 혀를 찼다.

 

필자는 서울시와 문화재청에 진정으로 묻고 싶다. 우선 서울시에 묻는다. 발굴을 다 마칠 것도 아니면서 왜 홍련봉 1보루는 발굴하려고 했는가? ‘발굴도 파괴’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불문율이다. 때문에 진정한 고고학자라면 개발 사업으로 인해 파괴를 피할 수 없는 곳에 대한 긴급한 발굴(이를 ‘구제발굴’·rescue excavation이라고도 한다)이나 복원을 전제로 한 학술적 발굴 이외에는 발굴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만약 연간 13조원 이상의 예산을 집행하는 서울시가 발굴비가 모자라 발굴을 중도에서 포기해야만 한다면, 애초 서울시는 홍련봉 발굴에 나서지 말았어야 한다. 앞으로도 서울시는 구제 발굴 이외에는 어떠한 발굴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혹 서울시는 발굴을 영화 ‘인디아나 존스’류의 ‘보물 찾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21세기 문화 르네상스’를 외치는 서울시에 지극히 실망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 아차산 홍련봉 1보루 발굴현장. 이곳에 최고의 군지휘관이 주둔했음을 입증하는 고구려 연꽃무뉘 수막새가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김창종기자

문화재청에도 묻는다. 문화재청은 발굴 도중 흙으로 되덮일 위기에 처한 홍련봉 1보루에 대해 ‘1차적 책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중앙정부로서 전국의 문화유적의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청이 “올 해 긴급 발굴비 4억원을 다 집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시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문화재 행정의 ‘지침’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가?

 

만약 서울시가 문화재행정과 관련해 계획하고 집행한 일은 모두 서울시 책임으로만 떠넘길 수 있다면, 문화재청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서울시 등 광역지자체가 앞으로 발굴허가를 문화재청에서 받을 이유도 없다. 서울시에도 문화재과가 있고, 경주시에도 문화재업무 담당 부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이 차관청으로 존재하는 것은,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한 ‘행정적 벼리’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람에서가 아니었을까?

 

예산과 일손이 부족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고, 그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1998년까지만 해도 2급 기관장이 이끌던 곳을 1급(1999년)기관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차관청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다른 정부조직이 축소되는 가운데서도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제만 터지면 “지자체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문화재청이 서울시에 ‘행정적 지침’을 내리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차관청이 되고, 소위 ‘스타급 문화재 전문가’가 신임 청장이 되면 뭐하나! 진정으로 바뀌어야 할 것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로 있는데….

 

발굴도 마치지 못하고 흙으로 되덮일 위기에 처한 홍련봉 1보루는 결국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지키고 보존하려는 우리의 역량이 여전히 수준 미달임을 슬픈 목소리로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용처: 조선일보 2004.9.7)


 
가져온 곳: [북경이야기(北京故事)]  글쓴이: 지우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