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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생존 맞바꾸는 북한 주민

鶴山 徐 仁 2005. 7. 9. 18:25
이상과 생존 맞바꾸는 북한주민

 2005.07.06 
LA타임스, 주민들은 조만간 정권붕괴 믿어
기아와 집단수용소로 변모한 ‘인민의 낙원’


“북한주민들이 이상과 생존을 맞바꾸고 있다.”(Trading Ideals for Sustenance). 7월 5일자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기사 제목이다. “주체사상”이 “돈”으로 대체되었다는 타임 지 기사를 연상케한다. 북한주민의 이상은 “인민의 낙원“ 건설이었다. 그 낙원은 이제 기아와 집단수용소로 변모했다.

이 신문은 바바라 데믹 여성 특파원이 쓴 장문의 기사에서 북한의 참담한 실상을 소개하면서 김정일 정권의 어설픈 자본주의 실험으로 철권통치는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많은 주민들은 조만간 정권이 붕괴될 것으로 믿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신문은 한 탈북자의 말을 인용, 갹?지??중국 개도 북한 노동당 간부보다도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풍자했다. 다음은 기사 요지.

김희숙씨가 김일성의 말을 되뇌면서 한 순간도 의심을 품어 본 일이 없었던 건 자본주의자들은 원수이고 개인주의는 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 동해안 끝에 위치한 그녀의 고향 청진에 재난이 왔다. 공장엔 연료가 떨어졌고 식량배급은 중단됐다. 가족들이 서서히 굶주림 속에 빠져 드는 것을 본 그녀는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한때 법을 잘 지켰던 그녀는 아파트를 팔 수 있도록 한 관리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런 다음 주산 외에는 사업기술이 없었던 그녀는 암거래에 뛰어 들어 비스킷 행상과 옥수수로 빚은 밀주 판매를 시작했다.

김 여인의 행위는 종신유배형에 해당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규를 준수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명령을 따르는 단순하고 마음씨 고운 주민들이 맨 먼저 굶어죽었다”고 한국에 정착한 한 할머니는 회상했다.

1990년대 중반 200만 명의 아사자를 낸 기근과 1994년의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폐쇄주의 공산 북한 전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버려진 공장 곁에 시장이 들어서고 외국 바람이 들어 왔으며 인플레가 치솟고 부패가 만연했다. 소규모 신흥부자가 생겨났다.

이것은 북한 제3의 도시인 청진을 등진 30여 명의 탈북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생활상이다. 이들의 일부는 한국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중국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들은 일거리를 찾아, 또는 구걸하러 중국에 불법 입국했다.

<명령 따르는 마음씨 고운 주민들부터 굶어>

▲ 쓰러져 있는 북한주민
청진에서 온 이들은 주민들이 정부의 말을 점점 잘 듣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정치적 반체제로 부를 수는 없지만 주민들은 대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환멸감을 토로하고 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중국을 방문했던 작년 말 인터뷰에 응한 청진 출신의 39세 탄광인부의 말이다. “우리 자신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작년 여름 한국에 입국한 공장노동자 출신의 김선복씨(32)는 북한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하고 있으며 이름만 빼고는 더 이상 예전의 북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십년 전만 해도 청진시민들은 새 바지가 필요할 땐 대부분 어두운 갈색 혹은 짙은 청색 바지를 파는 국영상점으로 가야 했다. 식품과 기타 생필품은 배급물품이었다. 가끔 정부가 집에서 기른 채소를 팔도록 허용했으나 심지어 머리빗조차 국영상점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오늘날 주민들은 당국이 마지못해 허용한 상행위의 번성으로 청진 전역에 들어선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다. 중국제 막대아이스크림에서 해적판 DVD와 자동차, 성경책, 컴퓨터, 부동산, 심지어 섹스까지 거의 없는 게 없다. 단 값이 비쌀 뿐이다.

소매상품의 메카는 수남 시장이다. 문 닫은 두 공장 사이에 비좁게 들어선 양철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일본 오사카 소재 인권단체 북한주민구호회가 작년에 찍어 온 비디오를 보면 시장통로에는 신선한 오이, 토마토, 복숭아, 부추, 수박, 양배추 등이 즐비하다. 그밖에 벨트, 구두, 우산, 노트북, 접시, 알루미늄주전자, 칼, 삽, 장난감자동차, 세제, 샴푸, 로션, 핸드크림, 화장품 등 모든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다.

청진시의 7개 행정구에는 각각 정부허가를 받은 시장이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수남 시장은 점점 팽창하고 있다. 이곳의 물건이 평양의 시장보다도 더 다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행상들은 오른쪽 가슴에 면허증을 달고 있다. 의무적으로 달아야 하는 김일성배지가 여전히 가슴 복판에 달려 있긴 하지만.

시장들이 10년 남짓 팽창과정을 겪어 왔지만 정부가 경제개혁을 시행, 금지조치 일부를 해제한 것은 겨우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의 일이다. 행상들 대다수는 김희숙씨 같은 나이든 여성들이다.

파마머리에 정결한 옷차림을 하고 체구가 작은 60세의 이 탈북자는 90년대 초 섬유공장의 탁아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공장이 멈춰 섰다. 남자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공장 내 노동당간부들은 기혼여성, 즉 아줌마들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업이라도 해야 할 것이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줌마들?집으로 돌아가 돈을 벌지 않으면 식구들이 굶을 판이었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그녀는 처음 돼지를 기르려 했다. 시내 아파트건물 밖의 우리 속에 돼지들을 가둬놓고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먹였다. 그러나 전기와 물이 부족해 그나마 일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1995년 입지가 좋은 시남구의 아파트를 팔아 대신 싼 아파트를 사고 남은 돈으로 시골에서 쌀을 구입하려 했다. 그러나 등을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돼 그것조차 실패했다.

식구들의 형편은 비참해졌다. 남편을 고용했던 지방라디오방송국은 봉급지불을 중단했고 식량배급도 끊겼다. 1996년 시어머니는 굶어 돌아갔고 남편도 이듬해 뒤를 따랐다.

“남편은 처음엔 마르다가 나중엔 퉁퉁 부었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 포도주 한 병 사갖고 식당에 가서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다.” 김씨의 회고담이다.

레슬링과 체조 선수였던 26세 아들은 1998년 굶주림으로 점점 쇠약해져 폐렴에 걸렸다. 시장에서 페니실린 한대를 사려면 40원이 필요했는데 그 돈이면 그녀와 세 딸의 1주일 분 양식이 될 옥수수가루를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옥수수를 선택했고 아들이 폐렴으로 숨지는 것을 목도했다.

하지만 김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파트를 다시 바꾸고 남은 돈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비스킷을 굽고 옥수수를 원료로 한 농주를 밀주하는 것이었다. 현금이 없는 구매자에게서는 고춧가루나 그밖에 필요한 물건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끼니를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청진에서는 아직도 상행위의 상당부분이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아 즉흥적 수준에 그친다. 단속자들이 나타날 때 급히 도망갈 수 있는 목제수레 너머로 돈이 오간다. 수레를 장만할 수 없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방수천을 깔고 그 위에 물건을 늘어놓는다.

나무기둥과 빨랫줄을 얽어 매 만든 옷가게들은 야한 분홍색 등으로 단조로운 풍경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라벨을 도려 낸 옷들도 있는데, 장사꾼들은 이것이 남한을 뜻하는 “아랫동네” 것이라고 속삭인다. 북한에서는 남한상품 거래가 금지돼 있다.

소비자들은 미국깃발이 선명하게 찍힌 88파운드짜리 쌀 포대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청진공장에서 제조한 옥수수국수와 비스킷을 구입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인도적 지원으로 북한에 제공된 것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 직업인 이발이나 자전거수리 같은 일을 몰래 하기도 한다. “그들은 시장에 의자와 거울을 내다 놓고 영업을 하는데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김희숙씨는 말했다.

<김정일이 ‘아버지보다 나쁠 것’ 불길한 예감>

또 하나 새로운 직업은 PC방 영업이다. 인터넷 카페 비슷한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인터넷접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개는 청소년들이 비디오게임을 하는데 사용한다.

물건은 예전보다 많아졌으나 인플레가 심해 대부분 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쌀값은 2002년 경제개혁 이후 거의 8배나 올라 파운드 당 525원이나 한다. 노동자 평균월수입은 2,500원, 비공식 환율로 계산하면 약 1달러이다.

북한주재 WFP관계자들은 북한주민 대다수, 특히 공장노동자들과 공무원들, 퇴직자들, 그리고 고정수입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경제개선조치 이후 더 나빠졌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청진시민들은 이들을 돈벌레로 멸시한다.

“일찌감치 장사에 나서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도 있지만 국가를 믿고 충성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다“고 시장에서 토끼를 팔던 한 퇴직 수학교사는 말했다.

청진의 경제중심이 수남 시장이라면 그 정치중심은 높이 25피트의 김일성 동상이 내려다보는 포항광장이다.

이곳 잔디밭은 말끔히 다듬어져 있고 관목은 전지가 돼 있으며 포장은 잘 돼 있다. 시내 다른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동상만큼은 휘황한 조명을 받고 있다. 길 건너 작은 분홍색건물에는 나라꽃으로 지정된 교배종 베고니아 ‘김정일화’가 늘 전시되고 있다.

북한에선 예배가 금지돼 있어 포항광장은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 최고의 옷으로 치장한 신혼부부들이 여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두 사람의 결합이 상징적으로 축복받도록 동상에 절을 한다.

김일성이 94년 7월 8일 사망하자 50만 명이 포항광장에 운집, 폭우와 폭염을 무릅쓰고 김일성동상을 참배했다.

그 중 한사람이 김희숙씨 장녀인 옥희씨였다. 옥희씨는 충실하게 자리를 지켰으나 그녀가 느낀 슬픔은 김정일이 아버지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하는 대로 광장으로 나갔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가족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 39세의 옥희씨는 회상했다.

그녀는 건설회사 선전반에서 일했다. 트럭을 타고 다니며 메가폰을 들고 노동자들에게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종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설교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 부친은 정권을 의심하라고 가르쳤다. 기자이며 당원이었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외부세계를 잘 알고 있었고 북한이 남한과 중국에 크게 뒤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밤늦게까지 우리 집에 모여 김정일이 도둑이라고 말했다”고 옥희씨는 회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믿음은 여전했다. “나는 원수(元帥)님만을 위해 살았고 달리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고 김희숙씨는 말했다. “심지어 남편과 아들이 죽었을 때도 나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장교들 반역으로 부대 전체 해체된 사건도>

모녀는 자주 싸웠다. “왜 나를 이 비참한 나라에 태어나게 했느냐”고 옥희씨는 어머니에게 대들었었다고 회상한다. “닥쳐! 넌 국가에 대한 반역자야”라고 어머니는 되받았다.

“엄만 누굴 더 사랑해? 김정일이야 아니면 나야?” 딸도 지지 않았다.

청진 사람들은 아마 북한 다른 지역보다 정권을 덜 사랑했는지 모른다. 식량은 다른 지역보다 함경북도에서 더 일찍 동이 났고 청진의 기아비율도 북한에서 가장 높았다.

청진시민들은 북한에서 독립심이 가장 높기로 유명하다. 널리 알려졌던 소요사태도 이 도시에서 일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1995년 청진 6군단 소속 고급장교들이 반역행위를 이유로 처형됐고 40,000명으로 추산되는 부대 전체가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봉기였는지, 부패사건이었는지 여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청진은 악질 패싸움으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정치소요와 일반범죄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악에 바친 공장노동자들이 기계를 해체하거나 동선(銅線)을 훔쳐 식량과 바꾸기도 했다.

수남 시장 외곽이나 한때 연인들의 산책로로 이름났던 청소년공원 잔디밭에서 공개처형이 시행되기도 했다.

청진 교외 이현리 라는 마을에서는 반정부활동 혐의를 받은 조직이 내부 침투를 노렸던 보위부원을 살해하기도 했다고 유치원교사 출신인 서경희씨는 전했다.

이 보위부원은 같은 마을 친구였는데 수상한 활동을 하는 문제의 조직을 염탐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됐다가 붙들려 돌에 맞아 죽었다고 서경희씨는 증언했다.

노동자들은 이른 아침 동원돼 밤사이에 나붙은 반정부 낙서를 지워 버려야 했다고 인권단체들은 전한다. 그러나 대다수 주민들은 너무 두려워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지도자들을 비판하면 신성모독으로 간주된다.

북한은 반정부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범”에 대해서는 일가족 전체를 유배하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낸다.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 이상 이 정권 전복에 목숨을 기꺼이 내줄 만도 하지만 그것은 혼자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고 가족 전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이 될 것”이라고 서씨는 말한다.

심지어 김정일 정권이 약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성분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있다. 청진에서 잘사는 사람들 다수는 당원이거나 군 또는 치안기관에 연결돼 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체제에서 권력에 닿아있는 끄나풀을 이용해 중국과 거래하고 개업허가를 받으며 뇌물을 갈취하고 매직행위를 한다.

“북한에서 힘 있는 자들은 항상 요령을 부려 돈을 번다”고 청진에서 성장, 지금은 서울에서 기자로 일하는 주성하씨(31)는 말했다.

주씨는 지명도 있는 관리의 외동아들로 버릇없이 자랐고 가족은 바다가 보이는 도시 북부 언덕에 위치한 시남지구에 살았다. 한국이나 중국 기준으로 보면 지붕에 생선과 오징어를 매달아 말리는 단독주택은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기준으로 그것은 저택에 해당된다.

주씨 가족은 시멘트블록으로 지은 2,000평방피트 면적의 가옥과 그보다 두 배는 되는 정원이 딸린 주택에 살았다. 정원은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하는 필수적 터전이었으나 가족들은 담장을 넘어 들어와 감자와 양배추를 훔쳐가는 군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북한가족들은 옷장의 수효로 신분을 따지는 경향이 있는데 주씨 가족은 5개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TV, 냉장고, 녹음기, 재봉틀, 선풍기와 카메라도 있었다. 그들에겐 부자로서도 당시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전화나 자동차는 없었으나 자전거는 있었다.

“전기가 끊기자 가전품은 무용지물 되었고 버스와 전차가 운행을 멈췄기 때문에 자전거는 제일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주씨는 말했다.

그는 청진에서 제일 좋은 초등閨냄?외국어학원을 거쳐 북한최고의 상아탑 김일성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북한에서 영어 원어민을 만난 적이 없었으나 BBC 비디오테이프와 금지된 할리우드영화로 듣기훈련을 했다.

“때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하루 두 번씩 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할리우드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체포됐을 것이다.” 서양문화에 접하면서 주씨의 체제충성도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학우들이 졸업 후 정권의 선전보도기관으로 진출할 때 주씨는 청진으로 돌아가 2001년 탈출할 때까지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렉서스 모는 사람, 애완견 기르는 여인 등장>

주씨는 말을 잇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배우 김혜영 역시 특권을 누린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 김두선은 중국에 버섯과 생선을 파는 무역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군과 보안부대 인맥을 활용, 권력의 세계를 헤엄치는 법을 알았다.

“어떤 관리의 가족이 결혼을 하면 그들은 포도주 몇 상자를 들고 나에게 왔다”고 아버지 김씨는 말했다.

중국과의 무역이 번창하자 김씨 가족도 발전했다. 그들은 회사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청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김혜영은 성장하면서 무대에서 재능을 발휘해 스스로의 힘으로 엘리트 배우가 되었고 한 연극에서는 주연배우로 발탁되어 북한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스파이 역을 했다.

이 연극이 1996년 평양 드라마 축제에서 1등을 하자 그녀는 김정일을 만났다.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숨을 제대로 못 쉰다는 그녀는 김정일이 악수를 하고 만년필을 줬다고 말했다.

“나는 배우로서 조국의 이념을 선양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김혜영과 자매들은 기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자녀들에게 숨기느라 애를 썼다.

“우리 딸들은 얼마나 많은 이웃 어린이들이 굶어 죽은 걸 알지 못했다.”고 어머니 최근란은 말했다. 어머니는 또한 자주 중국 여행을 하는 아버지가 북한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 돼 간다는 사실도 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1998년 김이 휴가를 마치고 평양에서 귀가하자 부모들은 중 국경 부근 도시 무산을 방문하러간다고 말했다. 그들은 국경을 건넌 후에야 가족이 탈북했다는 말을 들었다.

현재 한국 TV에서 치약 광고를 하는 29세의 김혜영은 북한을 떠나기를 원치 않았던 몇 안 되는 탈북자의 하나이다.

“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오늘날 북한의 엘리트들은 더욱 살기가 좋아져 집에 전화를 놓고 자동차도 산다.

“4,000 달러 내지 5,000 달러면 누구든지 자동차를 살 수 있다. 다만 자신의 자동차로 등록을 할 수 없다.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김영일씨는 말했다. 청진에서 탈북한 그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는 최근 청진에 살고 있는 친지를 위해 중국에서 컴퓨터를 밀수했다. 북한 국영회사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를 할 줄 아는 직원을 원한다. “컴퓨터를 가지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방문자들은 청진의 소비열기를 보고 놀란다. 청진에서 한국 원조물자를 나눠주던 한국 학자 전영태는 천마산 호텔에서 신형 렉서스 자동차 옆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를 보았다.

청진 외곽의 경성 온천에서는 여자가 애완견을 무릎에 안고 있는 광경도 목격했다. 금붕어가 유일한 애완동물일 정도로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 애완견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 갭은 굉장하며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청진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볼 수 있다.

음산한 건물 입구에는 대형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 있다. 대리석으로 장식한 시계는 늘 시간이 맞지 않는다. 기차-기차들은 정기 운행 스케줄이 없기 때문에 며칠 만에 오기도 한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들은 사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다.

군인이 일본 NTV에 판 비디오에는 기차역 부근에서 맨발로 빈 김치 항아리를 뒤지는 남루한 차림의 소년 모습이 나타난다. 한 소년은 엉덩이로 보도를 기어가고 있었다. 해설자는 이 소년의 발가락이 동상으로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혁은 소년들이 기차역 생활로 쉽게 전락하는 걸 잘 안다. 그는 역에서 2년째 그럭저럭 살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거나 집을 떠나면 기차역에 가면 그들을 볼 수 있다”고 현재 한국에 정착한 23세의 그는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그가 걸음마를 배울 때 사망했고 아버지 손에 길러졌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순안 지구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배고파 쌀 몇 부대 값에 아파트 팔아>

▲ 북한의 시장 모습
정부가 1993년 배급을 중지하자 아버지는 60 마일 떨어진 고아원으로 그를 데려갔다. 당시 그는 12 살로 헤어지는 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아원에는 먹을 게 있어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1997년 그가 16 살이 되기 직전 김은 고아원을 “졸업”했다. 그는 청진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청진은 변해 있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많은 아파트에는 창문이 없었으며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컴컴한 8층 계단을 올라가 집에 도착한 그는 어린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누굴까? 그는 노크를 했다.

젊은 부부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메모를 남기고 오래 전에 떠났다고 부부는 말했다. 기차역에 가서 찾아보라고 했다.

유랑현상은 북한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말해준다. 기근 전에는 정부가 주민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해 인근의 친척집에도 여행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집을 팔 때는 예외였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당장 경찰이 달려왔다.

그러나 주민들이 식량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자 가족은 파괴되었다. 전화도 없고 우편시스템도 마비된 상태에서 부모와 아이들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무작정 돌아다닌다. 쌀 몇 부대 값에 아파트를 판다”고 김은 말했다.

김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1년 앞서 고아원을 떠난 형 역시 만날 수 없었다.

갈 곳이 없는 그는 기차역에 머물렀다. 밤에는 철문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새우잠을 잤다. 낮에는 부근의 식품가게 부근을 배회했다. 가끔 부랑배들과 어울렸다.

그는 중국 국경으로 가는 서행 열차에 매달렸다. 일단 기차에 오른 후에는 열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전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잔뜩 낮춘 그는 몇 시간을 그렇게 실려 갔다.

국경에 도착한 그는 청진에서 가져온 일용품들을 판다.

1998년 그는 중국공안에 체포되었다. 그는 북한으로 송환되어 수용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그 후 2000년 다시 중국으로 도주했다. 거기서 마침내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왔다.
집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망했다. 김휘식은 기차역의 참혹한 광경을 회상했다.

“시체 셋을 마차에 싣는 것을 보았다. 40대의 남자는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의 눈은 아직 껌벅이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기근이 고조에 달한 이후 무주택자 수는 줄었으나 아직도 상당 수준이다.

“누군가가 사라진다. 그가 어디서 죽어서 버려졌는지 혹은 중국으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광부는 말했다.

<라디오 압수한 보안요원 “어떻게 작동시키나”>

지난 10년간 약 10만 명의 북한인들이 중국으로 도주했다. 이중 다수는 북한으로 송환되었거나 가족이 그리워 스스로 돌아왔다. 이들은 더러 돈과 물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생소한 이상도.

밀수꾼들은 1,000 개의 해적판 DVD를 담을 수 있는 상자를 가져온다. 한국의 드라마, 한국전 영화, 할리우드 액션물이 가장 인기가 높다. 심지어 포르노도 들어온다.

도발적이라고 해서 여자가 자전거 타는 것조차 금지하던 나라에서 이런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치원 교사로 있다가 1998년 떠난 서경희는 “당시 나는 26세였다. 어떻게 임신이 되는지 난 아직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도 여자들은 짧은 치마나 소매 없는 셔츠를 입는 게 금지되어 있다. 남녀 모두 블루진도 입으면 안 된다. 위반하면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나라를 은둔적 봉쇄로 유지하려는 투쟁은 지는 싸움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북한주민들은 우체국에서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국제전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 일부 주민들은 중국 휴대폰을 휴대하고 중국 국경에서 신호를 받아 국제전화를 하기 위해 국경으로 간다.

밀수꾼들은 또한 값싼 중국산 라디오를 들여온다. 정부 채널에 고정된 북한산 라디오와는 달리 중국산은 한국방송을 포함, 어떤 방송도 청취할 수 있으며 자유아시아방송도 듣는다.

과거에는 그런 방송을 들으면 감옥에 갔다. 지금은 보안요원들이 개인용도로 그런 라디오를 압수한다. 2001년 중국 라디오를 휴대한 통역자의 딸 옥희를 당국이 체포했을 때 첫 질문은 “어떻게 작동시키느냐?”였다. 그녀는 한국방송의 주파수를 적어 주었다. 경찰은 “이어폰은 없느냐? 남 몰래 나 혼자 듣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이 나라가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교시한다. 그러나 외부 영향력이 이런 환상을 깨뜨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부르주아 식 반공주의가 인민의 건전한 사고방식을 좀먹는다”고 2005년 4월에 하달된 노동당 교시는 경고한다. “이런 고상한 이상의 영향을 받도록 허용하면 김정일 장군 우상화 작업은 망한다.”

중국으로 탈주한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북한에서 겪은 삶을 돌아보고는 마치 예수님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1999년 청진에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온 의사 김지은은 시골 농가에서 내놓은 흰 쌀밥과 고기를 보고는 현기증을 느꼈다.

<중국의 개도 북한 당간부보다 나은 생활>

▲ 중국국경 부근의 탈북자들
“난 처음 눈을 의심했다. 그것을 냉동식품으로 알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중국의 개도 북한의 당 간부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탈북을 시도하다 체포된 많은 청진 주민들은 현재 농포 수용소에 감금돼 있다. 이 수용소는 옆에 논이 있는 철도역 곁에 있다. 수감자들은 인근 논에서 일을 하거나 벽돌 공장에서 근무한다. 작업은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옥희도 농포에서 복역한 사람의 하나이다. 반항기질이 있는 그녀는 북한의 삶에 진저리를 냈고 불행한 결혼까지 했다.

2001년 9월 여러 차례의 탈주시도 중 그녀는 무산에서 체포돼 열차 편으로 청진으로 송환되었다. 간수들은 죄수들의 몸을 서로 묶고는 구두끈으로 손발을 묶었다.

농포 수용소에서는 죄수들이 10명 씩 한 조로 짜여져 모로 누워서 잠을 잤다. 신참자들은 흘러넘치는 화장실 부근의 침대 밑에서 자야했다. 식사는 주로 짠 국물이고 가끔 생감자가 나오기도 했다.

“벽은 높았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한 여 수감자가 벽을 오르려다 잡혀 죽도록 맞았다. 그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이를 목격하게 했다. 당신은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옥희는 회상했다.

어느 날 옥희는 들에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 나이 많은 여자를 보았다. 옥희는 속옷을 벗어 그 여자에게 주고 대신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북한에서는 속옷이 귀하다. 그래서 그 여자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동의했다.

김희숙은 장사에서 번 돈으로 담배 10 갑을 샀다. 딸의 석방을 부탁하기 위해 보안 관리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며칠 후 간수가 옥희에게 왔다. 옥희와 다른 죄수들은 곧 석방될 예정이었다. 간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그리고는 약속의 표시로 손을 들라고 요구했다. 다시는 중국으로 도망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손을 드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일생동안 거짓말에 속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상 우리의 전 생애가 허위였다. 우리는 그때서야 시스템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고 옥희는 말했다.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간수는 말했다. “좋아, 다시 중국으로 도주하거든 잡히지 마!”

석방 4일 후 그녀는 중국으로 도주, 한국으로 오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북한의 어머니를 빼오기 위해 한국정부에서 준 정착금 8,000 달러를 브로커에게 주었다. 지금 옥희는 장례식장에서 일하며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한다. (끝)

뉴스앤뉴스 김재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