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4.03.16. 03:28업데이트 2024.03.16. 11:57
삼성전자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 공사 현장.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미 정부에서 반도체 공장 설립 보조금으로 60억달러(약 8조원) 이상을 받게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170억달러를 투자해 미 텍사스 테일러시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15일 삼성 사정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삼성전자에 미국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에 따른 보조금으로 60억달러 이상을 지급할 계획이다. 블룸버그도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이 소식은 몇 주 안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당초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지원금이 많아야 20억~30억달러 수준일 것으로 봤다. 400억달러를 투자해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고 있는 TSMC가 50억달러 수준의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 삼성전자가 추가 투자 의사를 보이면서 파격적인 보조금이 책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테일러 공장 건설 비용이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크게 늘었다는 점,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삼성전자 위상, 한미 양국 관계 등도 협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하고 있는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의 작년 모습.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올해 안에 4나노 공정을 적용한 반도체 생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
미 정부가 삼성전자에 지급하는 60억달러(약 8조원) 이상의 보조금은 당초 예상치의 3배에 가까운 파격적인 금액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이 통 큰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삼성전자의 추가 투자를 이끌어내고, 중국 반도체 굴기를 함께 압박하자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뿐 아니라 메모리와 패키징(후공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TSMC 의존도를 낮추고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삼성전자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삼성도 엔비디아, AMD, 메타 등 미국 고객을 적극 유치하며 TSMC를 추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 정부는 2022년 칩스법을 만들고 반도체 보조금과 연구·개발 비용 등을 포함해 총 527억달러를 기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이 중 280억달러를 최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에 보조금으로 지급한다. 지금까지 600여 기업이 보조금을 신청했다. 보조금이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을 미국에 몰려들게 하는 확실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시도하는 일본, 유럽, 인도 등도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워 기업들을 유혹하고 있다. ‘보조금이 있는 곳에 반도체 공장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보조금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격화된 반도체 보조금 전쟁
미국이 쏘아올린 반도체 보조금 경쟁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 부활을 꿈꾸고 있는 일본은 18조원 규모의 1차 지원금에 추가 지원금까지 내걸며 2030년까지 국가 반도체 매출을 현재의 세 배 수준인 15조엔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일본은 TSMC가 구마모토현에 문을 연 제1공장에 공장 건설 비용의 약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을 지원했고, 올해 말 착공에 들어가는 제2공장에도 7300억엔을 지급한다. 훗카이도에 공장 건설을 시작한 일본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에도 5900억엔을 추가 지원해 첨단 제품인 2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반도체를 직접 생산할 계획이다.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그래픽=이철원
유럽연합(EU)은 역내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EU 반도체법에 합의하고 2030년까지 정부와 민간기업이 함께 6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차세대 반도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10%에서 20% 이상 늘리겠다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EU도 반도체 분야만은 예외로 둔 것이다.
‘잠자는 코끼리’로 불리는 인도도 반도체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중 패권 전쟁이 격화되며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생산 지역 물색에 나서자 인도가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우며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다. 인도는 13조원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내걸고 공장 건설 비용의 50~70%를 지원하고 있다. 미 마이크론에 이어 이달 초 인도 타타일렉트로닉스와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 PSMC가 함께 추진하는 28나노 반도체 공장 등 3개 공장 건설을 한 번에 승인했다. 대만도 연구비의 25%에 대해 법인세를 면제해 주는 등 자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세제 혜택을 들고 나왔다.
◇보조금 없는 한국
세계 주요국들이 보조금을 살포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유혹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에서는 보조금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보조금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 때문이다. 여기에 반도체 기업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K칩스’ 법조차 올해 말 일몰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한 K칩스법은 반도체와 같은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높이는 법이다. 직접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으니 세금이라도 아껴주겠다는 취지지만, 연장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직전 3년간 평균 투자액을 초과하는 투자 금액에 대해 최대 10%를 추가로 세액공제 해주는 ‘임시투자세액공제’도 지난해 말 만료됐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투자는 누가 먼저 대규모 투자를 해 앞선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양산하느냐에 따라 주도권이 결정된다”면서 “막대한 해외 각국의 보조금을 포기하고 한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했다.
☞반도체 보조금
세계 주요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내건 보조금 및 세액공제 등의 대규모 지원책. 반도체가 국가 전략 산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각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설 투자의 최대 7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약속하며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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