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사엘과 더불어 왕하 8:25-29
04월 11일 (월)
하사엘과 더불어 왕하 8:25-29
25.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27.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28.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29.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26절).
아달랴는 아합의 딸이었고,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이었습니다(왕상 12:23). 그러므로 아달랴는 오므리의 손녀입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 설립자였습니다. 비록 왕들이 모두 악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나름 많이 애쓴 정열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인들은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땅>이라고 불렀고,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킨 예후 조차도 <오므리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28절). 이스라엘과 아람의 싸움은 벤하닷의 통치기간 중 자주 있었으며 하사엘의 치세 동안도 계속됐습니다. 이 기간 아람에게 공세를 취한 쪽은 오히려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벤하닷의 손에 많은 타격을 입었으므로 틀림없이 원수 갚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든 통치자가 교체되는 시기가 곧 전쟁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적들이 항상 새로운 왕이 그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전에 공격을 시도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때는 하사엘이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한 후였으므로 요람이 길르앗 라못을 다시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아합도 실은 그 요새를 취하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왕상 22:3-27). 우리는 늘 만사를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가 되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상처를 주는 일쯤은 예사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왕들도 <내 것이 되기만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고, 수많은 명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실은 모두 자신의 욕심을 그 안에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그와 반대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이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기필코 대적하는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동조하거나 가세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진심으로 간구해야 할 것은 악한 자들의 꾀 앞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할지도 모를 이 세상을 구해내는 지혜입니다. -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게 행한 것>(27절) 가운데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 아하시야가 요람과 함께 가서 하사엘과 싸운 <길르앗 라못>(28절)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 본문 29절과 9:27 말씀을 참고하여 아하시야의 죽음에 관해 적어 보십시오. 주님, 오늘 본문은 저희로 하여금 악한 자들과 함께하고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일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실은 그래서 솔로몬도 잠언에서 악한 자들과는 함께 다니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게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악인의 자리에 앉거나 그들과 수작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성령으로 단속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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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없는데도
“유토피아. 말 그대로 ‘없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머릿속에는 존재한다. 여기는 오직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서만 닿을 수 있다. 비록 상상 속에서만 닿을 수 있는 곳이기는 해도, 상상하는 사람에게 그곳이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닿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갈 방향을 인도해주기도 하니 말이다.” 김종성 저(著) 《쓰다보니》 (바른북스, 2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간이 사모하는 아무 문제와 고난이 없는 낙원인 유토피아는, 그리스 어인 ‘Ou(없음)’ + ‘Topos(장소)’의 합성어로, 말 뜻 그대로 ‘아무 곳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낙원은 없습니다. 그런 데도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끝없이 사모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며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최고의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에서 살아가던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기를 원하면서 낙 원을 잃어버리고 ‘실낙원’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인 간은 완벽한 낙원을 늘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 낙원의 삶을 다시 살기 위한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다시 동행하면서부터 낙원이 회복되기 시작합니 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배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며 전도하는 삶이 낙 원의 삶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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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장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Ezekiel 1:1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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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되는 것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공평하게 바뀌기를 기다리지 마시라. 세상이 그렇게 바뀐다면 좋은 것이지만 세상이 꼭 바뀌어야만 비로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높아도 좋고 거칠어도 좋고 초막이어도 좋고 궁궐이어도 좋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그의 뜻을 좇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되는 것이니. -김동호 목사의 ‘열린 천국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에서- 찌푸린 얼굴을 펴고 처진 어깨를 올리고. 눌린 마음과 가슴을 펴세요.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십시오. 말과 말투를 바꾸고.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께 세상도 맡기고 나 자신도 맡기는 겁니다. 천국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지 말고 누리십시오. 이미 얻은 천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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