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염재호 칼럼
좌파의 딜레마와 한국 정치의 미래
중앙일보 입력 2022.02.23 00:38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최신호는 올해 4월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이번에도 좌파가 패배할 것이라는 지배적 전망을 소개하고 있다. 1981년 이후 프랑스에서 좌파가 집권한 것은 절반에 달하는 20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좌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유럽 전역에서도 좌파 정부의 퇴조가 확연하다. 20여 년 전 EU 회원국 15개국 중에서 13개의 정부가 좌파였지만 지금은 27개국으로 늘어난 회원국 중 좌파 정부는 7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세르주 알리미 발행인과 브누아 부레빌 편집장은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이 현상을 잘 분석하고 있다.
알리미와 부레빌의 분석에 의하면 유럽 좌파 정부의 실패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좌파 정당이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기보다는 우파의 강령을 모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질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좌파 정부는 실용과 중도를 지향하며 민영화와 금융규제 완화에 앞장섰다. 그리고 좌파의 지지층인 노동자와 서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데 소홀했다. 더 나아가 좌파 출신 지도자들은 그들이 비판했던 조직들의 요직을 차지했다. 사회당 출신 전직 재무장관 스트로스 칸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되고, 사회당 미테랑의 측근 3인방이었던 자크 들로르는 EU집행위원장, 앙리 샤브란스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요직, 미셸 캉드쉬도 IMF 총재를 역임했다. 좌파이념의 구현보다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좌파 테크노크라트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유럽 좌파의 패배 위선과 무능에 등 돌린 유권자들 독선이 내로남불, 과욕이 무능 낳아 중도와 포용의 협치 리더십 보여야 |
또 다른 실패 요인으로 연금 불안정과 높은 실업률에 직면하여 재정적자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 행정 전문성의 미숙함을 들 수 있다. 좌파 지지층을 위한 선거공약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희망고문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좌파는 종종 조종실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오늘날 좌파에게 핸디캡으로 작용한다. 좌파 집권 시절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억이 좌파에게 다시 조종실을 맡기려는 의지를 꺾기 때문”이라는 알리미와 브레빌의 분석은 의미심장한 경고의 메시지다.
선거 때만 되면 좌파와 우파의 양대 정당은 수리통계학자 해롤드 호텔링이 제기한 ‘호텔링 법칙(Hotelling’s Law)’의 전략을 택한다. 예를 들어 해변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들은 해변 양쪽 끝보다 가급적 중간으로 이동하여 판매하는 것이 이롭기 때문에 중간지점으로 모이게 된다. 선거에서도 좌파와 우파의 양대 정당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표를 던질 양끝에 있는 지지자들보다는 중도층을 위한 정책공약을 내세운다. 이념의 순수성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좌파. 효율성을 버리고 이념에 다가서는 우파. 이 모두가 선거전략으로 중도 정책공약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집권해서 이를 실천하지 못할 때 중도층 유권자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최근 한국 정치도 이런 전철을 밟아왔다. 박근혜 정부는 좌파 정강을 많이 흡수했지만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해서 좌우 양쪽에서 불신을 자초해 탄핵까지 당했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와 일자리를 챙기겠다고 했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선거 때는 중도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포용할 것을 약속하지만 정권을 잡고 나면 독선에 빠져 까맣게 잊어버리는 현실에 유권자들은 절망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독선은 내로남불을 낳고, 과욕은 무능을 낳는다. 위선과 무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수권정당의 진정성과 능력이 제대로 평가된다. 독선에 빠진 강남좌파와 보수우파의 갈등이 우리 정치를 멍들게 한다. 좌파가 장기집권을 기약하려면 좌파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순수성과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조국 사태, 추윤 갈등, 위성정당 사태, 윤미향 사태, 대장동 사태, 부동산 폭등, 세금 폭탄 등은 순수성과 능력 모든 면에서 좌파 정당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좌파 정당의 지도자들이 내로남불을 일삼고, 원칙 없는 실용성을 주장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국민을 이반시킬 때 장기집권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김황식 전 총리의 최근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1』은 한국정치의 미래를 위한 좋은 교과서이다. 전후 독일 총리들 중 전반기 네 명의 총리 리더십을 분석한 이 책은 독일 통일과 번영의 힘이 이들의 리더십에 있다고 한다. 독일 총리 리더십의 특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이념은 견지하면서도 상대방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타협과 협력의 리더십에 있다. 이제 한국 정치도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버리고 19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기간에만 외치는 중도 정책이나 포용의 헛된 구호가 아니라 DJP연합과 같이 실질적인 협치의 정치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아프리카 격언을 명심하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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