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모든 것이 예배가 되는 삶 (사도행전 10장 1-15절)
03월 15일 (월)
가정의 모든 것이 예배가 되는 삶 (사도행전 10장 1-15절)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정은 무엇으로 사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뇌 과학에 의하면 사람이 사랑을 하면 뇌에서 화학물질이 분비가 돼서 사랑하는 감정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코넬 대학에서 이 분비물이 언제까지 분비되는지를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이 분비물이 분비되는 시기가 18개월이라고 합니다. 18개월이 지나면 이 물질은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 결과에 의하면 우리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 되지 않는 것은 인간적으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사랑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고넬료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탈리아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에게 천사나 나타나서 “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이 너를 기억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가 세례받기를 기도하며 천사를 만날 때, 북쪽에 있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같은 성령님이 동일한 시간에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하늘에서 부정한 음식들이 내려오는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이라 하여 거부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때마침 베드로 집 밖에 고넬료의 신하가 와서 문들 두드립니다.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한 계획임을 깨닫고 고넬료에게 가서 세례를 베풉니다.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일까? 2절에 보면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것, 어떤 사람은 질병, 어떤 사람은 죽음을 두려울 수 있습니다. 대출상납이 두려울 수도 있고, 대인관계가 두려울 수 있고 무능한 내 모습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 보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적으로 절대로 불가능한 베로드로와의 관계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단계는 내가 편하고, 내가 성공하고 잘 될 때까지입니다. 거기까지는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의 사랑은 온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려다가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내 힘으로 사랑하다가 실패한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단해 봅시다.
주님!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 포기해 버린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려는 노력에 앞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원합니다. 오늘 두려운 마음으로 ‘사랑의 하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나를 그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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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기독교인
“고대는 다신교 세계였다. 다신교 세계에서는 남이 믿는 신도 자기가 믿는 신과 똑같이 인정하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공생하는 신의 수도 늘어나 로마에는 신이 무려 30만이나 되어버렸지만, 신들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는 사고방식에 따르면 공존을 인정 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이 ‘무신앙자’ 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 저(著) 김석희 역(譯) 《로마인 이야기11》 (한길사, 14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로마인은 기독교인들을 ‘아테오’라고 부르면서 비난했습니다.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현대에서는‘무신론자’로 번역되지만,로마 시 대에는 ‘무신앙자’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신교를 믿었던 로마인들의 눈에, 오직 하나님만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 라며 구원에 있어서 일체 타협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배타적이 라느니, 독선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 나니” (고후11:14) 사탄은 전혀 사탄같이 보이지 않고, 한술 더 떠서 빛의 천사가 같이 보 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유영되는 많은 사상과 생각들 중에 가장 아 름다워 보이나 가장 치명적인 독이 스며있는 사탄의 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다원주의’ 입니다. 어느 종교든 진실하게 믿으면 된다는 이 망령은 가장 악한 사탄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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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 8장 17절)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Isaiah: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 (Matthew 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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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더 성숙해야 내가 그때 성경은 약간 알았지만 교회 돌아가는 것은 전혀 몰랐다. 섣부르게 책 한 권을 통해서 알고 정확하게 모르면 무서운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더 성숙해야 할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예는 너무나도 많이 있고, 나도 꽤 많이 체험했다. 그때 기억들을 생각하면 "좀 더 겸손했을 걸..."하는 후회가 항상 있다. 부분적으로 아는 진리를 가지고 이리저리 언어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한규 목사의 ‘영적인 눈을 뜨는 비결’에서-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분들 중에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께서 감동 주셔서 구원은 받았지만 눈에 비늘이 갓 떨어진 갓난아기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만의 진리를 가지고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얘기를 들으면 그 얘기만 듣고 다른 것을 무섭게 비판합니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통합적 인간이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어떤 사물을 볼 때에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를 가지십시오. 최소한 그러한 자세가 준비되어야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03월 13일 (토)
행복으로의 초대 (누가복음 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점은 기독교는 동적이요, 자신을 귀히 여기며, 잔치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그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잔치집은 기쁨과 즐거움도 넘치며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이런 잔치집이 천국이며 교회입니다. 세상의 잔치는 끝나면 허전하지만 천국잔치는 영원히 행복한 잔치이기에 누구나 참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풍성히 누리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이 초청이 얼마나 귀한 초청인지 몰랐으며,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샀기 때문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대를 거절했습니다(18-19). 그러나 이것은 거절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동산을 구입하고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영적인 부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한 물질위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육체보다는 영혼이, 현실보다는 영생이, 돈보다는 행복이 더 중한 것입니다. 또 장가들었으니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0). 결혼을 했다면 부인을 챙기고 가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하고도 얼마든지 가정은 돌볼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혼동이 문제입니다. 가치관과 우선순위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먼저 초청받은 자들이 거절하자 주인은 종들에게 사방으로 나가서 누구든지 초대하여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응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에 초대받고 있는 복된 자들입니다(15). 이 잔치의 성격을 알고, 행복을 누리는 자들이라면 이 잔치를 이웃에게 소개하고 초대해야 합니다.
소와 밭을 사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 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에 정신이 팔리고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눅17:27-29).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고 살아가면서도, 오직 의식주와 물질적인 욕망과 육신의 쾌락에만 몰두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우리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잔치를 마련하시고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행복으로의 초대에 응하셔서 세상 염려 걱정 다 털어 버리고 축제의 기쁨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 잔치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 천국잔치에 참여함으로 주안에서 이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요? - 나에게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 이 잔치를 누구에게 알리고, 데려올 것인지 대상을 정해 보십시다.
은혜의 주 하나님,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대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옵소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천국잔치를 위해 사람들을 데리러 갔던 종들처럼 저에게도 열심을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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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예수님이 오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서 고통을 제하여 주지는 않는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항상 위로를 느낄 것이라고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우리가 홀로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보시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셨고 이 땅에서 그분의 생애는 대부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견디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고통 없는 미래의 세상을 가능케 하시는 승리를 얻으셨다. -필립 얀시의 [삶이 고통스러울 때] 중에서- 주님이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우리의 삶은 고통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를 미리 맛보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에 모든 것을 이루시고 다시 부활하심을 믿고, 믿는자는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 땅에서 앞당겨 승리자처럼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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