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고난을 ‘위로의 능력’으로 바꾸라(고린도후서 1장 1-11절) 외 1

鶴山 徐 仁 2019. 11. 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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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고난을 ‘위로의 능력’으로 바꾸라(고린도후서 1장 1-11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 해석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나 걱정도 없이 행복한 것 같고, 나만 힘들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고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부러워하는 인물들도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마치 회전문 같아서 내가 어디로 나가야겠다고 결정하고 출구를 향하여 발을 내딛지 않으면, 끝없이 돌고 도는 질문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가 많은 고난가운데서도 어떻게 믿음으로 출구를 향하여 나아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때문에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그의 고백을 보면, 사도바울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과 감옥살이와 태장과 채찍과 돌에 맞음 등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들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고난들 때문에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위로를 위한 통로”였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돌이켜보면,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울을 비롯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이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거나 설명해 주어서 회복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안에 거할 때, 이해가 아닌 믿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아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고난가운데 그것을 집중하고 공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이 과정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섰는지를 말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고,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함께 고난을 통한 은혜를 나누기 위해 고난을 주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고난”을 “당하는 자”가 아닌 “동참하는 자”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결단과 적용

 지금 나에게 있는 고난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복음이 전해진다고 믿고, 

나의 삶에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집중하여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나에게 허락하신 이 고난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용기를 주시고 고난의 회전문을 돌고 도는 자가 아닌, 출구를 향해 발을 내딛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짧은 말 살리는 말
인문학 나눔

“에모리 대학 교수인 스티브 프랭클린 박사는 

효과적인 연설에 대해서이렇게 말했다.‘연설이 복잡해야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4음절 정도의 말도길다.  미켈란젤로는 단지 3가지 색으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쇼팽,베토벤,비발디도 단지 7음절로 훌륭한 곡을 남겼다.’(중략)

간단명료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태도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주게 된다.”지그 지글러 외 김은주 편역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1일 1분 특강》(백만문화사, 18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 삶에 참 소중한 것은 모두 한 글자로 된 것이 많습니다.

물, 몸, 넋, 잠, 흙, 집, 땅, 땀, 돈, 꿈, 복, 말, 글, 책, 앎...여러 멋진 말을 하지만 열매 없이 

이파리만 무성한 사람이 있고,한 마디만 말하지만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에 뜬 구름도 두 구름이 있습니다.   헛되이 천둥만 울리는 놈이 있고,  

비를 뿌려 땅을 적시는 것도 있습니다.  

비 내리는 구름은 소리가없지만 눈물처럼 땀처럼 피처럼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보면 병자호란 청나라의 침략을 받고도 말만무성한 조정의 한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예수님은 열매 없이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성 안의 말(言)은 성 밖의 말(馬)보다 무섭습니다.  

행함이 없는 말,식언(食言)하는 말, 믿음 없는 말, 사랑 없는 말은 허무한 이파리일 뿐입니다.

기독 메시지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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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장 23절
고린도전서 15:10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As for me, far be it from me that I should sin against the LORD by failing to pray for you. 

And I will teach you the way that is good and right.(NIV)

도서 큐티더 보기
당신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든다

 채소를 드리는 제사를 소제라고 한다. 

 채소를 가지고 와서 소금을 쳐서 뻣뻣한 채소를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숨을 죽인다'는 말은 

마치 양을 죽이는 것 같은 그런 의미가 있다.

  뻣뻣한 사람은 죽여야 되고.

 목이 곧은 사람은 목을 굽혀야 된다.

 어깨에 힘주는 사람, 힘을 빼야 된다.  

눈높이가 높은 사람, 낮추어야 된다. 

 잘났다는 사람, 자기가 가장 못난 사람으로 생각을 돌려야 한다.

  교만한 사람 겸손해져야 된다. 

이것이 소금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못하면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 

 -곽선희 목사의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당신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 여지없이 낮추어 버립니다.

  잘났다는 사람, 잘났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할 때까지 

하나님은 진노의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앞에 나올 때 완전히 깨끗한 겸손이 있어야 됩니다.

절인 배추처럼 아주 부드럽게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집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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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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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결혼의 비밀(에베소서5:31-32)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본문 해석

  가정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하며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은 교회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기본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교회 공동체가 파괴되고 결국 사회마저도 파괴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하는 끔찍한 범죄들을 보십시오. 그 원인은 대부분 가정의 파괴와 해체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문제란 가정문제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이 소중한 가정은 결혼으로부터 즉, ‘부부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결혼은 남녀간의 ‘찌릿한’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물론 연애한다고 해서 다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아니지요. 혹은 그런 찌릿함이 없어도 선을 봐서 결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애와 결혼은 분명 다릅니다. 결혼은 하나의 ‘제도’입니다.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순간 부부가 되며 거기에 가정이라는 최초의 ‘사회’가 성립됩니다. 

 

  성경적 결혼제도는 일부일처제가 성경적인 결혼제도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그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도 때론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모세, 다윗 등등. 그래서 몰몬교는 일부다처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면 구약의 일부다처는 인간이 타락 한 이후에 나타나는 결혼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하기 전,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들을 부부로 맺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들먹이며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무식’의 소치이며, 추악한 욕심을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려는 교만하고 신성모독적인 처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떻게 해서든 일부다처를 용인해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마19:6). 그러므로 우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 부부의 관계를 맺고 평생을 해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때에 세 가지 제도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이요(창2:1)) 둘째는 노동이며(창1:28) 셋째는 결혼 곧 가정(창2:24)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결혼이라는 예식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기억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결혼이라는 비유를 통해 아주 풍성하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신랑이며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마25:1-13). 바울은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엡5:25). 요한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갖게 되는 주님과의 잔치를 결혼식으로 묘사합니다(계19:9). 이처럼 결혼은 신성한 하나님의 제도이며 결혼식은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할 ‘천국혼인잔치’의 예표입니다. 

결단과 적용

- 결혼의 기초는 무엇이며, 나는 성경적 결혼관을 정립하고 있는지요.

- 앞으로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할 것인지 다짐해봅시다. 

-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약속하고 기도합시다.

오늘의 기도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창조하신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에 기준한 결혼생활이 될 수 있도록 만남의 복을 주시옵소서.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세워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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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이 싸우면
인문학 나눔

“모두들 권력의 힘을 알고 있기에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다.  

권력은 ‘뭔가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랑에서는 그 권력을 놓는다.  

사랑하는 쪽이 안달한다.  사랑하면 권력을 빼고 자존심도 빼고 힘도 뺀다.  

엄마와 딸이 씨우면 대개 엄마가 진다.  

딸이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2집》 (규장, 251-25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 창조」 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을 내미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얼굴 근육하나하나가 

일그러진 채 손을 최대한 뻗어 아담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잡으면 잡고 말면 말고’ 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은 그 표정이 바뀌어야 맞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아담의 사랑보다 크다는 것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진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고, 힘을 뺍니다.  

사랑의 권력(?)을휘두르는 사람은 덜 사랑하기에 그러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힘을줍니다.  그러나 참 사랑을 하면 힘을 뺍니다.  

마치 을이 되는 것처럼보입니다. 사랑하기에 낮아지고, 

사랑하기에 힘을 휘두르지 않고 약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연약해 보이시는 이유입니다.

기독 메시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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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5편 18절
고린도전서 15:10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The LORD is near to all who call on him,

to all who call on him in truth.(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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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벌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유대인이 마치 개처럼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저들을 멸하시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핵무기로 박살을 내게 하소서 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정죄하고 벌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민경진 목사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주님의 부르심에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조건은 없습니다.

 예수를 전하다가 박해를 하거나 좀 불미스런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 배척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여도

 벌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에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