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30절).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9개 지파의 지도자들, 즉 제단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단이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듣고 매우 흡족해 하는 대목입니다. 그들에 대한 오해가 말끔히 풀렸을 뿐 아니라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제와 소명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시 양쪽이 모두 신중한 자제와 성실한 해명 없이 흥분하며 무조건 상대를 단죄하려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초래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바탕 위에서 서로 자제하고 인내하고 대화했기에 결국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물론 서로 간의 공동체 의식을 확인함으로써 더 깊은 형제애를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좋게 여긴지라>를 직역하면 <눈에 좋았다>는 뜻입니다. <보기에 좋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먼저 빛을 지으시고 스스로 감동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었습니다.
혼자 보시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그 장엄한 광채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즐기고 싶으셔서 이를테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관계는 사랑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감동을 나누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첫 탄성>을 제대로 깨달아야 보다 깊이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담긴 빛을 발견하는 기쁨을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또 그럴 때만이 하나님의 영성과 생명의 출렁거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힘을 우리 안으로 실어 나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