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헌신의 시작(마가복음 1:16~20)

鶴山 徐 仁 2019. 1. 2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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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월 2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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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헌신의 시작(마가복음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본문 해석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헌신(devotion)은 '제물'(offer)이란 말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롬12:1).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이상 우리 몸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하고 우리의 기쁨이 아닌 그의 기쁨을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나 아닌 다른 인격체에 몰두하며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헌신의 삶이 우리의 세상일을 다 포기하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 고행하며 사는 수도자의 삶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 밖으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가서 세상을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 참된 헌신의 삶입니다. 

헌신의 시작은 돌아섬에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대로 살던 삶의 방향에서 돌아서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방향의 전환을 '회개'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회개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돌아섬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초청에 대해 베드로와 안드레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갈릴리의 어부 형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고민도, 어떤 주저도, 어떤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과단성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군인이 총을, 중이 목탁을 버렸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방향을 돌릴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헌신할 수 없습니다. 헌신은 먼저 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더욱 즉각적이었습니다 못해 비장감을 더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배뿐 아니라, 아버지마저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아버지를 버려둔다는 것은 좀 심한 것이 아닐까요?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어긴 것은 아닐까요? 이 말씀은 물론 부모에게 불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돌아섬의 과단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헌신된 자는 자신뿐 아니라 부모형제도 포기해야할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마10:37). 

본문을 통해서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생계와 부모형제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자고 성급하게 결론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문자 그대로 말씀을 직접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계와 부모형제를 포기하고 유리걸식하며 복음을 전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물론 이러한 수도자적 헌신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수도자적 헌신으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은사가 틀린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합니다. 모두가 수도자로서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기도원으로 들어간다면 교회는 누가 지키며 자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해석 없이 직접 말씀을 적용해버리면 열이면 열 모두 이단으로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회개의 과단성과 철저함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들어오시게 하려면 내가 나가야 합니다.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합니다(눅9:62). 

결단과 적용

- 살아오면서 다른 어떤 인격에 몰두하여 봉사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요? 돌아서기 위해 즉각 결단하십시다.

오늘의 기도

위대하신 하나님, 부족한 저를 택하시어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르게 응답치 못하고 주저하며 살아가 불충한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돌아서서 주의 일군으로 살아가도록 용기와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아름다운 헌신의 시작이 있게 하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아, 이어령
인문학 나눔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으러 가고 새 둥지를 가지러 가면 나 혼자서 

밀밭 사이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지나갔다. 그때 여름 햇빛이 비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섯 살짜리가 무엇을 알아서 눈물을 흘렸 겠는가? 

죽음이 어린 가슴에 잉태되어 있었고, 대낮 햇빛이 비치는 정적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의 영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울었겠는가? 그때 그 기억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어령 저(著) 「우물을 파는 사람」(두란노, 230-23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린 시절,  꼭 상처 때문에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싸우다가 코피가 나서 우는 것만도 아닙니다.  

소풍이 끝나고 집에 돌아 오는 길에 보았던 붉은 노을.  

봄 햇살이 너무 다사롭게 뺨에 부숴질 때도 알 수  없는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고독’이라는 말만 몰랐을 뿐,  어린  시절에도 고독이 있습니다.  

이 원초적 고독은 어른이 되어도 어김없이 이어집니다.

“명예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기더라, 

돈 벌려고 애쓰니까 되더라,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나아지더

라.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도,  

내가 좋아하는 글을 봐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

라고 느껴졌다.”(208쪽)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이어령 교수가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불가항력적인 딸의 병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견딜 수 없는 고독 때문입니다.  

이룬 것도 많았고, 느끼고 표현한 것도 많았던 그도 고독은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빈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없이도 당당히(?) 살아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빈 자리’를 

주시면서 하나님을 느끼게 하시건만 끝내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

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빈 자리’ 를 느껴 영원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건만 그 해결책을 하나님 아닌 다른 데서 찾는 사람입니다.   

기독 메시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

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

라.”  (롬8:20,21)

그림 큐티더 보기
마태복음 6장 6절
고린도전서 15:10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close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도서 큐티더 보기
예수의 사람인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말라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자꾸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건망증이라는 것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갖지 말아야 되는 건망증이 하나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늘 우리의 전부를 원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내 놓으라고 한다.

세상의 구조나, 흐름이, 질서가, 우리를 늘 끌어 들인다.

그러다 보니까 자주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 사람이 되어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 사람이 되어서 사는 가운데 가장 폐단인 것은,

내가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하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안영혁 목사의 ‘아기 예수는 믿음의 주이신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나쁜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혹은 세상을 따라 가다가도 화들짝 놀라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잘못된 길을 가곤 합니다.

특히 우리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서 있는 것 같을 때, 

빨리 나를 되돌려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 

예수의 사람인 것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