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개구리를 잡으러 가고 새 둥지를 가지러 가면 나 혼자서
밀밭 사이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지나갔다. 그때 여름 햇빛이 비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섯 살짜리가 무엇을 알아서 눈물을 흘렸 겠는가?
죽음이 어린 가슴에 잉태되어 있었고, 대낮 햇빛이 비치는 정적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의 영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울었겠는가? 그때 그 기억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어령 저(著) 「우물을 파는 사람」(두란노, 230-23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린 시절, 꼭 상처 때문에 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싸우다가 코피가 나서 우는 것만도 아닙니다.
소풍이 끝나고 집에 돌아 오는 길에 보았던 붉은 노을.
봄 햇살이 너무 다사롭게 뺨에 부숴질 때도 알 수 없는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고독’이라는 말만 몰랐을 뿐, 어린 시절에도 고독이 있습니다.
이 원초적 고독은 어른이 되어도 어김없이 이어집니다.
“명예 달라면서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기더라,
돈 벌려고 애쓰니까 되더라,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나아지더
라.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도,
내가 좋아하는 글을 봐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
라고 느껴졌다.”(208쪽)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이어령 교수가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불가항력적인 딸의 병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견딜 수 없는 고독 때문입니다.
이룬 것도 많았고, 느끼고 표현한 것도 많았던 그도 고독은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빈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없이도 당당히(?) 살아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빈 자리’를
주시면서 하나님을 느끼게 하시건만 끝내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
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빈 자리’ 를 느껴 영원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건만 그 해결책을 하나님 아닌 다른 데서 찾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