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스크랩] 춘래불사춘

鶴山 徐 仁 2017. 2. 20. 10:21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585)
증오와 적개심이 칼춤을 추고있네
나라가 혼란하고 민심은 갈라져서
꽃피는 봄이 왔건만 봄같지가 않구나

봄이 왔어도 봄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은 시기에 어울릴 만한 상황이 아닐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명언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
)의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온다. 왕소군(王昭君)은 서시(西施)와 초선(貂蟬)과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미인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 (元帝, 在位 BC. 49∼33)의 궁녀로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채 화친정책으로 흉노왕 선우(單于)에게 시집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가 흉노땅으로 시집가는 도중 멀리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국 한나라가 그리워서 비파로 「사귀
곡」(思歸曲)을 연주했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사귀곡」을 듣고 하도 슬퍼서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그녀
의 별명이 ‘낙안’(落雁)이 되었다. 동방규가 왕소군의 비극적 삶을 노래한 「소군원」을 보자.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어서(胡地無花草)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저절로 옷과 허리띠가 느슨해졌나니(自然衣帶緩)
허리 가는 미인이 되고자함이 아니었네(非是爲腰身)

왕소군이 시집 간 오랑캐 땅에도 봄은 왔으나 사막지방이라 꽃과 풀이 자라지 않아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고 했다(春來不似春).
전구(轉句)의 “저절로 옷과 허리띠가 느슨해졌다”는 것은 고국을 그리워하다 보니 몸이 야위어 자연스럽게 가는 허리(細腰)가 되어
한나라에서 입고 간 옷이 품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고, 결구(結句)에서 “이는 허리가 가는 미인이 되고자함이 아니었다네”는 S라인인
가는 허리(細腰)가 되어 오랑캐 왕에게 날씬하게 보이려고 다이어트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왕소군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시들어가는 모습을 슬퍼하며 동정한 것이다.

절세미인이었던 왕소군의 비극적인 생애로 인하여 역대 수 많은 시인들은 그의 삶을 노래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왕장(王嬙)이고
소군(昭君)은 자(字)인데 제(齊) 땅에 살던 왕양(王穰)의 딸이다. 자색이 뛰어나 후궁으로 뽑히어 5∼6년을 궁궐에 있었으나 임금의
은총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숫처녀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원제는 후궁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사랑을 베풀 수가 없어 궁중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이를 보고 잠자리를
함께 할 궁녀를 날마다 낙점하였다. 궁녀들은 너도나도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주었는데 많게는 10만 냥이었고 적게는
5만 냥이었다고 한다. 왕소군은 자신의 미모만 믿고 뇌물을 주지 않고 기다렸으나 화가 모연수가 밉게 그려 끝내 황제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변방의 막강한 오랑캐(匈奴國, 지금의 몽골) 왕인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책으로 한나라 궁중의
미녀들을 줄 것을 요구했다. 원제는 하는 수 없이 은총을 내리지 않은 궁녀들만 보내라고 하여, 왕소군이 오랑캐 나라로 시집가게
되었다. 왕소군이 하직인사를 하러 나타나자 원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아름다운 자태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왕소군이
모란꽃이라면 이제까지 사랑했던 궁녀들은 호박꽃이었다. 오랑캐에게 주기는 너무나 아까운 미모였으나 외교는 신의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약속을 파기할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원제는 그런 절세가인을 못생긴 얼굴로 그려 올린
화가 모연수를 즉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소군은 오랑캐 왕의 첩이 되었으나 마음은 조국 한나라를 한시도 잊지 못하였다. 또한 황제에게 한 번도 은총을 받지 못하였으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원제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낸 착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호한사선우와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다.
호한사선우가 죽자 둘째 부인의 아들 조도막고(雕陶莫皐)가 왕이 되었다. 아비가 죽으면 어머니를 첩으로 데리고 사는 것이 오랑캐
풍속이라서, 자기가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아들인 조도막고와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이 두 딸 중 하나인 수복거차(須卜居次)는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대신하여 정권을 좌지우지할 때, 태황황후(太皇皇后)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한나라에 바쳐졌다.
이들 모녀는 다 함께 외교용으로 희생을 당한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일설에는 왕소군이 흉노 땅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아들 주누(株累)가 호한사선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아비가 죽으면
어미를 첩으로 삼는 풍속인지라, 왕소군은 아들에게 “너는 흉노냐? 한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들이 “나는 흉노에 더 가깝
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들의 이 말은 곧 오랑캐의 풍속대로 어머니를 첩으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된
왕소군은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자 장례를 거국적으로 치렀다. 그녀는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오랑캐 땅의 풀들은 원래가 희고 시들지만 소군의 무덤에 돋아난
풀만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가도 영원히 푸르러 그녀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

증오와 적개심이 칼춤을 추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같이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나라가 혼란하고 민심이 갈라져서 봄이 왔건만
봄같지 않다.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이다. 리더는 보이지 않고 혼란을 부채질하고 반사이익을 노리며
나대는 자들이 있어 더욱 혼란하다. 그래서 춘래불사춘이다. 펌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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