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외 3

鶴山 徐 仁 2016. 8. 27. 15:02
8월 27일 (토)
느부갓네살의 하나님 찬양 - 단 3:27-30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온 기적 이상의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어 세우고 거기에 절하라고 강요하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믿기 어려운 고백까지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28절).
어디 그 뿐입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모독하지 못하도록 조서를 보내어 왕명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기를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29절). 이방인 바벨론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위대한 신이요 다른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신이심을 시인했을 뿐 아니라 만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조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30절). 이게 진정한 승리며 믿음의 진정한 반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적국이요 포로지인 바벨론에서 히브리 청년들이 오직 믿음 하나로 부른 통쾌한 개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전 4:8-9)고 했습니다.

부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사도 바울의 주님이 당신의 삶과 생애에도 함께 하사 망하지 않고 버린바 되지 않고 도리어 적국의 왕은 굴복시키는 반전의 은혜와 승리로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 찬양과 고백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28절).
-느부갓네살 왕이 전국에 내린 조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29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오고 오는 세대에 귀감이 되어 마땅한 이유를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주님,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히브리 세 청년을 풀무불에 던졌던 바벨론 왕이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모욕하지 못하도록 조서까지 내리며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전능하시다고 고백했습니다. 불태워 죽이려던 히브리 세 청년에게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지위까지 허락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믿음의 진정한 승리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죄의 찌꺼기들을 똑바로 보라

존 비비어는 한때 주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도대체 이 모든 분노가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요?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아들아! 금을 풀무에 녹일 때 비로소 불순물이 위로 떠오르는 법이다.’
‘너는 금을 불 속에 넣기 전에 그 금속의 불순물을 볼 수 있니?’
‘아니요” “하지만 그 속에 불순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연단의 풀무불이 너를 사르므로
불순물이 표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란다.
너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내게는 항상 그것이 보였다
그러니 이제 너의 미래를 선택하라.
너는 네 주변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화가 난 채로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죄의 찌꺼기들을 똑바로 보고 회개하고 용서하도록 해라.
그러면 내가 너의 삶 속에 있는 그 불순물들을 제거해 주겠다.’
-전진국 목사의 ‘상처 많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에서-

 
     
 
   
 


사단은 자신의 지위와 위치를 벗어난 교만한 자였습니다.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만 옹호하게 되면 눈이 멀게 됩니다.
눈이 하나님의 명철과 지혜로 밝혀져야 합니다.
관계의 상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십시오.
믿음은 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그 문제를 뛰어 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묶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한 자가 성숙한 자입니다.

 
     
       
 

나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

 

나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을 내가 종일토록 찬양함은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 아니요,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치 않아서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가장 좋은 것으로 그에게 드리고 싶어라..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이겨냄
   
   



8월 26일 (금)
풀무불 속의 네 사람 - 단 3:19-26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의 눈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철도 순식간에 녹여버릴 수 있는 용광로 속에서 당장 죽거나 타 없어지는 커녕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이 불속을 거닐고 있는 게 아닙니까?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급히 모사를 불러 확인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24절).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 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25절).
그렇습니다. 느부갓네살의 말대로 네 번째 사람처럼 보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이 불속을 거니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격려하고 계셨던 겁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건져 내시리라>(17절)고 믿었던 그들의 확신 그대로 주님이 그들을 건져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혹독한 풀무불 시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풀무불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건지시리라는 믿음, 죽음 속에서도 찾아 오사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이 가혹한 시험을 이기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26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장엄하고 통쾌한 승리가 또 어디 있습니까? 부디 당신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의 후예로 사시기 바랍니다.

 
   
   
 

-풀무불 앞에서도 이렇듯 담대한 세 청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시험이 닥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풀무불 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체적으로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주님, 주님은 어디든 오시고 나타나셔서 저희를 지키시고 구하십니다. 불속에서도, 물 속에서도 저희를 구원하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또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갔고, 마침내는 놀라운 반전을 통해 풀무불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정말 털끝 하나도 상하지 않고 무사히 생환했습니다. 부디 저희들도 이 세 청년의 믿음과 용기와 결단을 배우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은 서로가 Care해 주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한 기능이다.
그것은 동물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동물들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교제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Care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자식 간, 스승과 제자, 친구들, 이성간의 관계 등
“사랑은 서로가 Care해 주는 것”인데
상황에 따라서는 죽음이라도 각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임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곧바로 만나자마자
“내 양을 먹이라”하시지 않고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강성옥 목사의 ‘사랑’에서-

 
     
 
   
 


성숙한 사랑은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께는 자녀이고, 한 남자와 여자에게는 아내와 남편이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구와 동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서로 서로 날마다 Care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Care해야 하는 것입니다(요일4:20).

 
     
       
 

주를 찬양

 

주이름 찬양 풍요의 강물 흐르는 부요한 땅에 살 때에 주님 찬양해
거치른 광야와 같은 인생길 걸어갈 때도 주님 찬양해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갑과 을
   
   




8월 25일 (목)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단 3:8-18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7-18절).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 고백은 귀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붙잡혀 온 이들 세 청년은 <이제라도 너희가 ...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겠다>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왕 앞에서 이렇듯 담대하고도 당돌하게 답했습니다. 이들의 그런 단호하고도 과감한 언사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신앙의 비장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어떤 위기와 시련 가운데서도 반드시 구하시고 건져내시리라는 전능하신 하나님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라>(사 43:2).

그런데 이들이 더욱 위대했던 것은 설령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절대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죽더라도 끝까지 하나님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각오며 결단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얼마나 순교적입니까? 어떤 상황, 어떤 최악의 조건 가운데서도 기어이 구원받겠다는 믿음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 구원을 받지 못할지라도 그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키겠다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위대합니다. 툭하면 변절하고 허무하게 세상과 타협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 듯 그렇게도 쉽게 신앙 양심을 배신하는 이 시대 믿는 자들에게 오늘 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과 결단과 선택은 충격적인 깨달음과 깊은 각성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귀감으로 늘 당신을 위협하고 금 신상 경배를 강요하는 세상을 이기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한 세 청년의 고백이 곧 당신의 신앙이 되길 빕니다.
-최대한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쪽과 쉽게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 양심을 저버리는 쪽,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삶과 신앙에서 당신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생각할수록 오늘 본문은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끝까지 거부하면 당장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운명임에도 세 청년은 흔들리지 않았고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왕에게 대답할 필요조차 없나이다>하며 단호했고 비장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이들에게서 큰 도전을 받게 하사 타협을 미덕으로 삼지 않고 항상 믿음의 순수성과 정절을 지키며 살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분명히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지만, 공동체 밖의 사람들이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크리스티아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제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예수의 추종자들이나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이라 불리는 편을 선호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자기 제자들을 모으셨다. 당시 세상에는 소위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급진적이고 새로운 ‘도’만 있고,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인 다양한 ‘형제’와 ‘자매’의 무리가 있을 뿐이었다.
-오스 기니스의 [소명]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 의미는 결국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차별과 조롱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주는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유일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로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구별 짓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 3

 

현실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가시덩쿨일지도 몰라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 분명해...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갑과 을
   
   




8월 24일 (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로마서 5:12~21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돌아보면, 옳은 일을 하려다가 오히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장자연 사건, 법조계비리사건, 삼성사건을 통해서 거대한 세력 앞에 한 개인은 무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아무리 옳은 일이거나, 선할 일이라도 괜히 혼자 나섰다가 본인만 어려움만 당하게 된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서게 될 때가 많아집니다.

그뿐입니까? 어린 학생들이 담배를 피운다고 혼을 내다가 오히려 매를 맞아서 돌아가신 어르신의 이야기,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핸드폰을 건다고 혼냈다가 여자 아이에게 매 맞은 할머니 이야기, 길거리에서 여자들에게 찝쩍거리고, 희롱다하는 사람을 제재하다가 매 맞은 이야기는 이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도와 달라고 해도 그 말을 무시합니다. 나 혼자서 나서봤자, 괜히 어려움만 당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혼자지만, 내가 옳은 일에 나서면, 반드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혼자라도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라, 바로 나 한사람의 탓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단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갈 생각만 하는 것이 신앙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또한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나설 것입니다. 세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선은 악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하게 된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일이 무엇인지를 적어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한 가지라도 실천해 봅시다.

 
   
     
 

진정한 사랑은 낮아짐

고대에는 사람들이 샌들을 신고 흙길을 다녔기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졌습니다. 유월절과 같은 공식적인 식사는 오랜 시간 계속되었으며, 참석자들은 낮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바닥에 비스듬히 누웠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의 발이 그 옆 사람의 머리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을 시켜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였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가장 낮은 종이 하는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만찬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모였으나 발을 씻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크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낮추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몸을 구부려 발을 씻어주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존 맥아더의 [성경의 핵심을 꿰뚫어라] 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제자들의 발씻김이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더러운 것을 드러내는 삶도 아름답고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비난하지 않고 씻어주는 헌신은 더 아름답습니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헌신을 생각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감춰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낮아짐의 사랑을 위해 바쁘게 하던 걸음을 멈춰 서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 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아버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