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의 공통점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은 1천3백년이란 간격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唯二)한 지도자이다. 신라(新羅)의 김유신(金庾信)은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唐과 일전(一戰)을 벌여 평양-원산선(線) 이남 지역을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1천3백여 년을 살아올 수 있도록 한 토대는 바로 金庾信의 이 전쟁의지였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전성기에 있었던 세계적인 대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는 것, 이로써 우리는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얻은 것이다. 군대는 국가 요소의 하나이지만 국가는 그 군대를 딛고서만 존립(存立)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잃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효과적인 군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19년(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대원군(大院君)에 대해 일본이 무력 간섭을 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淸)은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3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그 목적이 지원이든 간섭이든 일단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독립성의 손상을 가져온다. 더구나 오장경(吳長慶)의 청군(淸軍)은 군영을 방문한 이 나라의 실권자인 大院君을 軍亂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한 뒤 천진으로 호송해 버렸다. 한 국가로서의 붕괴, 그리고 식민지화는 여기서부터 결정된 셈이다.
전쟁이란 명제(命題)로부터의 도피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수많은 침략을 당하고 강요된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왕건(王建)이 치른 내전(內戰), 월남 파병·대마도 정벌·여진족 토벌 수준의 전투를 국가 대 국가의 전쟁과 구별한다면>. 조선조 건국 이후의 6백년 동안엔 자주국방의 능력과 의지마저 잊어버렸다. 임진왜란 때는 명군(明軍)의 도움으로, 한국전쟁 때는 남한은 미군,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력(自力)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을 때, 즉 병자호란과 개항기(開港期)에 우리는 실패했다.
전쟁을 스스로 결단해 본 적이 없는 국가는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와 비교될 수 있다. 전쟁이란 것은 지도층과 국민이 개인적 운명과 체제의 존망을 걸고 국가의 힘을 총동원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이다.
그 사회의 가치관, 정부와 국민의 총체적 능력과 의지력,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명예를 거는 집단적 고뇌·각오·결단·희생·욕망이 전쟁인 것이다. 이기면 노예가 주인이 되고, 지면 남편이 아내도 지킬 수 없게 되는 전쟁을 통하여 국가·민족이 탄생, 소멸, 성장, 성숙을 거듭해왔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을. 통해 민족적인 대각성을 이룬 나라는 선진국으로 성장했고 그러지 못한 나라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 인간이 어른으로 성숙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주먹다짐이 필요하듯 한 국가로서 존립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위선적 평화론의 지배
그러함에도 한국은 이 命題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피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을 평화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지만 강요된 방어전을 하는 것과 자신의 철학·책임·계산·의지 하에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깊이가 다른 행위이다. [스스로의 전쟁 결심 없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한국 역사의 특이성은 우리의 민족성 형성에도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책임감과 명예심의 문제=목숨을 걸고 민족과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전통이 없는 지도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 관계의 문제=대외적(對外的)으로는 나약하여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권력은 대내적(對內的)으로는 가혹하게 행사되었다. 바깥에선 얻어맞고 집안에선 동생을 구박하는 형(兄)을 누가 따르겠는가. 국민은 무능하면서도 비열한 권력층을 불신·저주하면서 생존을 위한 요령을 터득해갔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비숍(Bishop) 여사는 [한국 민중은 가난 속에서 보호를 구한다]고 썼다. 돈을 벌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들이 몰려와 착취해 가니 [가난 속에 머무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다는 뜻이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는 고래뼈가 발굴되지만 그 뒤 한국 어민들은 포경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하면 어민들이 몰려나와 바다로 밀어 넣어 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관리들이 알면 어민들을 동원하여 고래를 해체시키고 기름을 뽑아낸 뒤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고래를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산업이 발달했겠는가. 유교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천 년을 이어온 이 나라에서 지난 1백 년 사이에 기독교 신도 수가 전국민의 약 4분의 1을 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배층의 논리와 윤리에 대한 민심(民心)의 이반 때문이었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고 그런 권력층과 국민 사이엔 착취·경멸·저주·불신만 쌓인다. 그런 가운데서 올바른 공직자-시민, 정부-국민 관계가 생길 리가 없다. 무사·기사 집단이 나라를 세우고 이끌었던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공직자-국민 관계와 문약한 지식인들이 지배했던 한국의 공직자-국민 관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의 지배층이 불신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착취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즉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의 논리=한 민족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다. 국가는 국가의 명예,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지고, 군인은 국민을 책임지며, 家長은 가정을 책임지고,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관계 속에서 국가는 국민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국민은 국가에 따른다. 비로소 떳떳한 국가, 국민, 그리고 국가-국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지배충의 생존 요령은 변명과 위선이다.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된다. 전쟁을 결심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선택했고, 그 평화란 것도 적국(敵國)의 평화이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아니었다(평화를 사랑한 민족이 왜 평화롭게 살지 못했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면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단했어야 할 경우가 많았으나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평화가 아닌 고통을 맞아들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의 역대 지배층을 이루어 온 지식인 사회에서 발견되는 위선적 명분론과 비열함, 그리고 산업·군사 輕視사조는 자주국방과 전쟁이란 거국적 승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란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무조건 악이요, 피하고 볼 일이라는 사조(思潮)가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남한 사회를 풍미하고 있다. 위선적인 반전론(反戰論)이 절대가치처럼 횡행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주된 지배층이었던 유교적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의 변동기 때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라를 유린당하도록 함으로써 아내가 겁탈 당하도록 방치한 남편의 신세가 되었다. 무식한 남편이었다면 아내에게 사죄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겠지만 논리라는 무기를 가진 지식인들은 달랐다. 겁탈 당한 아내를 부정한 여자라 하여 내쫓거나 자살하게 하고 침략 당한 민족이 침략한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전쟁은 무조건 악이라는 위선적인 평화론을 개발하였다. 이 평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분위기가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