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시대를 혼돈(混沌:chaos)의 시대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질서(disorder),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표현되는 ‘혼돈’의 개념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창조주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무질서의 혼돈세계를 7일간에 걸쳐서 질서의 세계로 창조했다는 창조론이 있고, 현대 물리학에서는 세계를 질서가 아닌 혼돈을 통해 새롭게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아침마다 자주 먹는 음식으로 혼돈탕이 있는데 우리나라 물만두 탕과 비슷하여 이것저것 섞여있어 실체를 모른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집 짬뽕의 어원이 혼돈에서 유래한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혼돈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정확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하거나 마구 섞여 있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나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혼돈이란 개념을 통하여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를 설명하곤 합니다.
혼돈이란 개념은 동양에선 도가철학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입니다.
「장자(莊子)」7번째 편, 응제왕(應帝王)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혼돈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남해의 왕 숙(?), 북해의 왕 홀(忽). 그리고 중앙의 왕 혼돈(混沌)이 있었습니다. (南海之帝爲?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混沌).
남해의 왕 숙과 북해의 왕 홀은 자주 중앙 혼돈의 땅에 가서 서로 만났습니다. (?與忽時相與遇於混沌之地),
그런데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해 주었답니다(混沌待之甚善).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려고 서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與忽謀報混沌之德),
사람들은 모두 7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고 한다(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 그런데 혼돈은 구멍이 없으니(此獨無有), 우리가 그 구멍을 뚫어줘 보답하자(嘗試鑿之).
그리고 날마다 한 개의 구멍을 뚫어주었고(日鑿一竅).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혼돈의 몸에 7개의 구멍이 뚫리며 죽어버렸다는 내용입니다. (七日而混沌死).’
중앙의 왕 혼돈이란 존재는 그야말로 구멍도 질서도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관점에서 두 신은 호의를 베풀어 혼돈의 몸을 인간으로 만들려다 결국 혼돈 자체를 죽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질서와 합리성보다 어쩌면 무질서와 모호성에서 더 큰 생명력을 볼 수 있다는 장자의 역설의 철학입니다.
어쩌면 잘 정리된 인생의 길 보다, 무질서하지만 그 속에서 더 큰 자유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건축가 아시하라 요시노부의 <도쿄의 미학>이란 책의 부제는 ‘혼돈과 질서’입니다.
무질서 가운데 부드러운 질서가 있다는 전제아래 프렉탈 기하학을 토대로 도쿄의 무질서한 건축물 속에 내적 질서를 찾아보고자 한 혼돈을 주제로 한 건축학 책입니다.
무조건 밀어붙여 질서 정연한 뉴타운 개발만이 정답이 아니라, 어쩌면 도시 건축 역시 혼돈 속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혼돈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흑인과 백인의 사이의 모호함, 하와이, 인도네시아, 시카고를 넘나들며 하버드대 유명인물과 시카고 빈민 변호사로서 그 혼돈스러움이 미국 정신이며 그 정신이 버락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혼돈은 질서보다 경쟁력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질서는 언제나 아름답고 우리를 안정시키는 것인가를 회의해 보고, 혼돈은 추하고 불안하고 제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보아야 합니다.
짜여진 틀에 맞춰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다니다가 거의 비슷한 질서정연한 인생을 사는 것이 과연 가장 아름다운 삶인가를 회의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경제 주체들이 부도와 파산이라는 혼돈의 위기에 처해있고, 인생도 도저히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질서와 합리성만이 해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질서보다는 무질서 속에서 더욱 예쁜 꽃이 피고, 순종보다는 잡종이 훨씬 더 경쟁력이 있고, 확실함 보다는 혼돈 속에서 해답이 더욱 다양할 수 있습니다.
혼돈의 역설, 그 화두를 주제로 나는 얼마나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한 번은 돌아보아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