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큐티 모음

鶴山 徐 仁 2015. 7. 12. 13:24


나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닮았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살아있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의 도전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다. 너희는 나를 봐라.’ 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의 ‘표준을 낮게 잡으면 망한다’에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해라.(마5:48)
이것이 주님의 요구며 이것이 표준입니다
온전해 지는 자가 제자라는 말입니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작은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 수준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격과 삶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라는 것을
우리가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름의 몸부림이 “없이” 우리가 주님을 본 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역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But who am I, and who are my people, that we should be able to give as generously as this? Everything comes from you, and we have given you only what comes from your hand.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여호와여 보옵소서! - 애 2:18-22
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20절).
결국 부모들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해 죽은 제 자식들의 사체를 먹는 끔직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최악의 상황에 처한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레미야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탄원하며 도대체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같은 일을 행하고 계신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정신이 있으십니까? 어찌 이스라엘이 이런 지경까지 왔습니까? 이게 정말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들입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하며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18절).
선지자는 하나님께 처절한 심정으로 탄원하는 한편 백성들에게도 비상한 회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사죄를 빌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어떤 죄요 허물이든 회개하면, 더구나 진심어린 눈물을 강처럼 쏟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로서>(시 56:8). 다윗도 눈물로 자신의 허물을 통회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내가 부르짖으므로 ...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3).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들의 눈물의 기도에 약하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19절).
<네 마음을 물 쏟듯하라>는 것은 마음을 온전히 바쳐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진심으로, 진솔하게, 적나라한 속마음으로, 거짓이나 숨김이나 치장 말고 원색적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손을 들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의뢰와 신뢰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항복하고 투항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거나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네 어린 자녀들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루라도 먼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십시오. 그래야 부모도 자식도 복됩니다. 아니, 인생사 모든 일에 대해 주를 향해 손을 드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내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십시오. 그래야 내가 고단하지 않고 그만큼 내 삶이 복되고 아름다워 집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남편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생각을 바꾸는 것은 행복의 지름길이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전에는 남편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합니다.
전에는 내가 참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남편도 많이 참는구나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전화 안 해줘서 섭섭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나를 믿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전에는 남편을 그럴 수가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편을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전에는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제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삽니다.
-최장환 목사의 ‘생각을 바꾸자’에서-

전에는 아이들이 우선 순위였는데
이제는 남편이 우선순위가 되었고
전에는 남편이 돈 벌어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편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가해자이고 내가 피해자였는데
이제는 남편도 나로 인한 피해자임을 알고 삽니다.
전에는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남편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남편을 사랑해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고린도후서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딸 예루살렘이여! - 애 2:8-17
8.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유다를 축복하사 그들에게 선지자들과 율법 교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9절). 백성들은 더 이상 율법을 가까이하지 않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율법을 새긴 돌판은 법궤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걸 제대로 보지도, 선용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성경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역시 이제 그들에게는 선지자도 묵시도 없을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내 눈이 상하며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11절).
예레미야는 이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고, 눈물에 눈이 상하도록 울었습니다. 마음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제대로 다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그런 재난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당한 변은 아니건만 그래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온몸이 녹아내릴 듯 했고, 내장이 다 풀어져 버릴 듯 했습니다(시 22:14). 여기 <창자>와 <간>이란 말은 견딜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이나 슬픔을 상징합니다. 성경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옛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고전 10:6, 11). 고난 중에 드린 예레미야의 기도를 배웁시다. 눈이 상하도록,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지도록 애끓는 심정으로 기도한 예레미야의 자세를 본받읍시다.

원수들이 비웃으며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16절).
예레미야가 더욱 가슴 아파한 것은 원수들의 비웃음과 의기양양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이 일은 우리가 한 것이고 우리의 위대한 업적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며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었습니다. 원수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안하무인인 원수들의 만행 조차도 다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음을 잊지 마시고 필요 이상으로, 사실 이상으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대적자들의 비웃음과 즐거워하는 모습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그 모든 처분을 맡기십시오. 다만 예레미야처럼 눈물로 기도하셔서 원수의 비웃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으십시오.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예수님의 이름이 임하면


전도할 때 "예수 믿으십시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주는 행위요,
전도를 받는 사람은 예수의 이름과 아울러
예수님 자신을 마음에 영접하는 행위이다.
여기에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하는 곳 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쫓겨간다.
죄악의 병이 치료된다. 육의 병든 자도 고침을 받는다.
마음이 상한 자가 평안을 얻고
낙심된 자가 소망을, 슬픔을 당한 자가 위로를 얻는다.
천한 자가 귀해지고, 악한 자가 선해지며,
어두운 곳이 광명해지고 영원히 죽을 자가 영원히 살게 된다.
-박종태 목사의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개인 뿐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가 되는 일은 모두 가치가 변합니다.
한 국가와 민족도 예수님의 이름만 받아들이면
야만 민족이 문화민족이 되고, 가난한 백성이 부한 백성으로
어두운 백성이 광명한 세계를 창조하며, 약한 민족이 강한 민족으로,
구속받고 눌리운 백성이 자유의 백성이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귀하고 귀합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마태복음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던지시다 - 애 2:1-7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4.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제2장도 제1장과 동일한 어조로 진행되며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2장 역시 <에카>(슬프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지금 온 이스라엘과 시온이 겪고 있는 모든 재난이 다 하나님의 진노이기에 오직 슬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란 그동안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려 온 온갖 축복과 은혜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그 모든 아름다움을 땅에 던져 무참하게 깨뜨리셨다는 겁니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1절).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심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3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다>는 것은 그의 위엄과 힘과 일체의 권위를 자르셨다는 뜻입니다. 교만하여 툭하면 뿔을 높이 쳐들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검은 구름으로 덮으사 그들의 모든 영광을 가리시고 뿔까지 자르사 이스라엘의 모든 아름다움을 단번에 무너뜨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모든 힘을 빼앗으시고 원수들을 대항하거나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하신 것은 대단히 의로우신 조치셨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 그만큼 못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 하셨도다>(5절). 백성들의 거처뿐 아니라 고관들과 큰 자들의 대저택과 견고하고 호화로운 궁궐들까지도 다 삼키사 불사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단을 버리시고 성소를 미워하심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며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궁궐들을 삼키시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게 큰 근심과 애통을 더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는 자신들의 모든 방어 수단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 보며 공포심에 질려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이미 이전에 세우신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행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초막도 허시고 당신의 절기들도 폐하시고 시온으로 하여금 안식일도 잊어버리게 하시고 제사장도 멸시하십니다(6절). 또 당신의 제단도 버리시고 성소도 미워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 품격과 권위와 존귀함을 떨어뜨린 경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도 제단도 성소도 미워하시며 땅에 던지십니다. 성전과 성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사 반드시 그 제단을 허시고 그 성소를 미워하사 땅에 던지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절대 성역이 없습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낙타의 무릎이 되도록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도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
예수님을 믿었도다.
예수님 동생 야고보는
기도를 너무 많이 하여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었도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였으면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기도를 하는가?
-‘사라의 모임’의 ’야고보의 기도‘에서-

내가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는지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의 기도는 부끄럽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늘
꿇어앉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낙타의 무릎이 된 야고보의 기도를 본받으시려면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고린도후서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성령께 묻고, 성령의 뜻을 따라서 삽시다 - 고전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묵상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왕따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경영하는 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회사에서 승진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가족이나 인간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온통 세상의 일과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돈과 명예, 그리고 건강과 권력’을 떠올립니다. 교회에서도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 복을 위해서 간구하고, 전도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면 세상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도해서 모인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진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은 죄를 이기는 삶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모르면서 내 안에 좋은 것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에 아무리 깨끗한 물을 넣어도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정수기에 아무리 좋은 휘발유를 넣어도 마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을 채워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채우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하루가 됩니다. 진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가장 두려운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거하시고,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우리는 세상의 지혜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일에 관심을 갖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는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 용]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신문을 읽는 것, 메일 체크하는 것, 중요한 전화를 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루의 모든 일들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 그 일을 해야 하는지, 그 만남을 가야 하는지, 그 거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성령의 다이나마이트


세상에서 가장 강한 폭탄이 있다면 그것은 원자탄이다.
그러나 더 위력 있고 피해 주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폭탄이 있다.
바로 성령의 다이나마이트이다.
이 폭탄만 떨어지면 사람이, 사회가, 문화가, 세상이 바꾸어진다.
행 1:8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했는데
여기에 “권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 영어의 다이나마이트
즉, 폭탄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 성령의 폭탄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짐으로
이 땅에 성령의 불이 맹렬하게 붙었다.
이 성령의 다이나마이트가 나에게도 권능으로 나타나야한다
-김창환 목사의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에서-

성령의 다이나마이트가 나에게도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고 요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폭탄은 죄악을 섬멸하고 새 사람을 창조하며
하나님의 일군을 만들고 능력을 주며
세상을 변화 시키는 폭탄입니다.
이런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십시오.
승리하는 성도가 되려면.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시편 119:176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I have strayed like a lost sheep. Seek your servant, for I have not forgotten your commands.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경제, 하나님의 주권 - 레위기 25: 23-28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두 가지 제도는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입니다. 정치는 사회의 질서에 관련되고 경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관련됩니다. 성경은 물론 경제학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소비와 생산의 법칙 같은 경제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성경은 경제제도의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원리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의 주권이요 둘째, 노동의 신성함이요 셋째, 올바른 이윤추구의 원리입니다.
성경적인 경제행위의 제1원칙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경제행위란 “재화와 용역에 관한 인간의 계획적인 행위”, 다시 말해 어떤 생산물을 내오기 위한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음식, 의복, 집 같은 여러 생산물이 필요합니다. 이 가운데서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선언합니다.
땅 투기꾼이 들으면 아주 기분 나쁘겠지만 성경은 원리적으로 토지의 매매를 금지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23). 전적으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제도 안에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토지는 개인의 소유이고 합법적으로 매매가 이루어집니다. 토지거래를 죄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합법적으로 토지를 사고 합법적으로 토지를 팝니다. 그렇다면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라”는 성경말씀은 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은 ‘토지 공개념’을 애초부터 전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땅을 얻는 것은 영구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돈 내 돈만 밝히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는 성경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땅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일부를 빌릴 뿐입니다. 이러한 토지 공개념은 성경의 아주 중요한 경제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엘제도’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권사상에서 나온 고대 이스라엘의 제도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정으로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면 그 사람의 친족 중 한사람이 다시 그 땅을 사는 제도가 고엘제도입니다(25절). 그래서 토지는 비록 제한된 범위 내에서 거래되지만 소유권은 원래 가문에 계속 귀속되게 됩니다. 성경의 이 고엘제도를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약은 약속이고 율법이니, 지금의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은 본래적인 것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늘 상기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은 본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빌려 쓰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일 뿐입니다(눅16:2).

[적용]
-성경적인 관점에서 왜 인간은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게 하셨는지 정리해 봅시다.
-나는 지금 지나친 탐욕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회개하십시다.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세요.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주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땅에 살아가도록 생명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더하시옵소서.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도 주시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교육학에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원리가 있다.
요약하면 "인성 발달 과정에서 인간의 단점을 바로잡겠다고
단점을 없애려 하면 그 단점이 점점 더 강화되기 때문에
오히려 단점은 자극하지 말고(그대로 두고)
그 사람의 장점을 자극(인정하고, 칭찬함)하면
그 장점이 점점 더 개발되고 단점은 사라진다."는 이론이다.
영성 개발에도 이 피그말리온 효과가 그 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곧 육체의 소욕은 건드리지(자극하지) 말고 ,
성령을 따라 행하면, 정녕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종규 목사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살리라‘에서-

(교육학에서 20C에 와서 알아낸 피그말리온 효과를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이미 계시해 주셨습니다.)
칭의 구원을 받은 성도가 성화 과정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고
육신의 생각으로 성화를 이루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은 점점 쇠하여지고
성령의 역사는 점점 더 강하여 저서 마침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let us draw near to God with a sincere heart in full assurance of faith, having our hearts sprinkled to cleanse us from a guilty conscience and having our bodies washed with pure water.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성경적 경제원리 - 마 25:14-2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성경이 돈과 이자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돈과 이자 자체는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죄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야고보 기자는 지적합니다. 돈과 이자는 항상 탐욕의 수단이 될 위험성이 상존하기에 성경은 이것을 늘 경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돈과 이자가 올바른 관계 안에서는 경제행위의 한 수단이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해서 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주인은 이들의 근면한 경제행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더 좋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시장, 장사, 돈과 이자는 악한 것으로 혹은 탐욕의 증표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시장과 이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 안에서 시장 경제제도는 성경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노동을 칭찬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왜 책망을 받았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이익을 남기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이 금욕주의적인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호된 말로 책망합니다. 왜 이자 놀이라도 해서 이익을 남기지 못했느냐고 추궁합니다. 물론 이윤의 추구만이 성경적 경제원리의 최고 목표는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의 목적은 시장 경제제도의 정당화가 아니라, 성도의 청지기적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비유의 근저에는 시장제도와 올바른 이윤추구의 정당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장과 이윤추구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제도는 원리상 성경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딤전6:10).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그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마6:24). 그렇다고 해서 이윤추구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돈과 이자는 이웃사랑의 한계 내에서 정당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웃에게 해악과 절망을 주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한계를 넘은 것으로 죄악입니다. 십일조의 원리가 말해주듯 그리스도인은 객과 고아와 과부, 즉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냐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적용]
-성경적인 재물관의 기초는 청지기 정신으로 나는 청지기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봅시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청부 청빈 정신으로 부지런히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다.
-재물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므로 잘 다스리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다.

[기도]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청지기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생활하게 하시고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게 하시옵소서. 탐욕을 이기고 이웃과 함께 하며, 작은 자들을 섬김으로 복음의 도구되게 하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