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큐티 예수님은 모든 권세의 머리가 되십니다. 외 8

鶴山 徐 仁 2015. 7. 6. 11:23



절대 권세와 능력 앞에 서라


세상 사람들이 온갖 재주를 부려도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둘 수 없다.
이제까지 완력과 정치적 압력을 가해 예수님을
종교적 우스개거리로 전락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상은 무덤 입구를 돌로 막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돌을 부수고 나오신다.
힘이 없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은 40년 동안 서방 선교사들에게 문을 닫았다.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신 사실에 대한 좋은 예다.
예수님은 봉해진 무덤 속에서 서방 선교사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5,000만 명을 구원하셨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부수고 나오셔서
그동안 하신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존 파이퍼 목사의 ‘말씀을 향해 바로 서기’에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외진 곳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고
주의 말씀이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어둔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실 때
어둠에서 거둔 많은 열매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매장할 수 없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그분은 모든 권세의 머리가 되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십시오.
예수님의 절대 권세와 능력 안에 서십시오.
지려고 해도 도저히 질 수 없는 경기가 될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잠언 30: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그의 진노하시는 날 - 애 1:11-22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절).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 심판의 날, 응징의 날은 곧 고통의 날이요 괴로움의 날입니다. 높은 곳에서 내 골수에 불을 보내시고 나를 물로 치시는 날이며 나를 피곤하게, 황폐하게 하시는 날입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진노의 날을 자초하여 결국 그렇게 패망했으며 그 모습을 지켜 본 예레미야 선지자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비애감에 절절한 슬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청년들을 부르심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15절).
이것은 유다의 용사들을 다 버리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어린 소년들까지도 모두 진멸하셨다는 의미로 이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청년들이 사라진 나라와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내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청년들을 치시고 부수시는 심판이야 말로 가장 혹독한 응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의 최대 위기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교인수 감소에 비해 4배나 많은 수의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이런 현상은 매우 우려스럽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학교가 대단히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게 부흥했고 언제나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청년들이 급속히 교회를 떠나는 현실은 곧 교회의 위기와 재앙을 의미합니다. 과거 유다에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예레미야의 절망감이 더욱 컸던 것입니다.

처녀들이 사로잡혀 감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18절).
성경은 갈대아인들이 청년 남녀를 불문하고 여자나 어린 자녀들까지도 전혀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대하 36:17). 전쟁은 잔혹하고, 적군은 무자비합니다. 불과 7,80여년 전 일제도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소녀들을 잡아다 유린했는데, 지금으로부터 2천 6백 년 전의 전쟁이었겠습니까? 위안부 출신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해방된 이후에도 피눈물 나는 한을 씹어야 했습니다. 일본이 아직까지도 강제연행 사실을 부인하며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수많은 고비 고비마다 전쟁과 폭력에 짓밟힌 이름 없는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아픈 식민지 역사인 일본군 위안부와 또 아득한 옛날 바벨론이 유다의 처녀들을 잡아가고 유린한 역사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해치거나 겁탈하는 도발을 자행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도 하루 속히 그 반인륜적인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깊이 시인하고 배상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2절). 예레미야처럼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겠습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라


누군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교훈이나 어떤 말보다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깊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 앞에서
말은 그야말로 말일 뿐이다.
어깨를 다독거려 준다든지 눈을 바라본다든지 하면서
침착하고도 평화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라.
그의 이야기와 이야기 너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권대웅의, ‘당신이 별입니다’ 중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든든한 위안과 설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슬픔이나 아픔에서 벗어나는 기간 동안
당신도 그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 두십시오.
그렇게 만드는 과정이나 시간이 들어간 것들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귀 기울여준다는 것은 말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처럼 바위처럼 떠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오래 지켜주는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베드로전서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Since you call on a Father who judges each man's work impartially, live your lives as strangers here in reverent fear.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슬프다 이 성이여! - 애 1:3-10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던 성이 지금은 적막하기 그지없습니다(1절).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고 성을 드나들며 교역을 하고 교류하던 외인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예루살렘의 형편을 <과부 같이 되었다>(1절)고 했겠습니까? 어엿한 주권국가의 수도였던 도성이 이제는 남의 나라에 예속되어 강제노동을 하며 조공을 바쳐야 하는 속국 신세가 되어 버렸고, 늘 즐거운 일들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성이 이제는 온통 슬픔과 울음 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여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4절).
길들은 온통 잡초로 뒤덮인 채 황폐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절기를 지키지 않았기에 길들이 그냥 버려진 채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절기를 무시하고 더럽혔기 때문에 이제 모든 절기들이 끝장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가던 시온의 길들과 성문들이 모조리 적막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 길을 버리시고 문들을 닫으시면 그게 아무리 성전으로 난 길이요 문일지라도 황폐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성전을 버리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8). 한 때는 하나님이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셨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시온의 모든 길과 문을 버리사 모든 길과 문이 폐허로 변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런 시온의 도로들을 바라보며 지금 한없이 울고 있습니다.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 없이 달아났도다>(6절).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던 성전이 파괴되자 시온의 모든 영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곧 은총이라는 아름다운 홀을 꺾어 버린 것이고 언약의 담보물인 봉인을 제거해 버린 것이었습니다(슥 11:10).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거룩한 성 시온과 거룩한 전인 성전에 이방인들이 닥쳐 온갖 더러운 행패를 다 부렸습니다. 보물을 빼앗고 신성한 성물들을 다 약탈했습니다. 절대 이방인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성소에 난입해 제멋대로 신성을 유린했습니다.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74:3). 이렇게 해서 딸 시온이 지니고 있던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대적들이 그런 시온의 멸망을 보고 크게 비웃었다고 합니다(7절). 하나님 신앙을 조롱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하며 시온의 영광에 침을 뱉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택하신 백성들이 오히려 시온의 모든 영광을 잃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악으로 욕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비애와 겉잡을 수 없는 울음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슬프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워 처절하게 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이런 거룩한 슬픔과 거룩한 눈물이 있습니까?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우리의 혀를 성령 안에서


때로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웃어주기만 해도 말실수 하는 것보다 휠씬 낫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말의 내용에 신경 쓰지만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보다는 표정과 태도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즉,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표정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자세로 말하느냐가 더 중요함을 기억하십시오.
가급적 이런 말을 많이 하십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그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다 이해가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 용서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한태완 목사의 ‘혀의 위력을 알고 통제하라‘에서-

우리의 혀를 성령 안에서 은혜로 길들여야 합니다.
기도하고 난 후에, 주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내뱉는
나의 말 한마디가 상처를 줍니다.
말을 함부로 하여 한 영혼을 낙심케 하면
성령을 근심하게(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심술궂은 태도와, 자주 성내는 버릇과, 싸움과, 가시돋힌 말과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악담을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복이 될 만한 말만을 하십시오.
친절하고 부드럽게.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Flee the evil desires of youth,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along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out of a pure heart.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슬픈 노래 - 애 1:1-2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전 7:2-3절).
솔로몬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 거룩한 슬픔에 빠지고, 예레미야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릴 자세를 가다듬어야겠습니다. 에레미야는 바벨론 군대에 멸망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깊은 슬픔을 표현하며 아울러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아주 생생한 일깨움을 주고 있습니다.

제목
이 책의 히브리어 제목은 모세오경이 그렇듯 책의 첫 단어를 따 <에카>(슬프다)라고 붙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슬픈 노래>라는 뜻의 <트레노이>라고 했고, 이것을 우리말로는 <애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거룩한 기쁨의 노래가 있듯 거룩한 슬픔의 노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감성의 노래로 역사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레미야의 눈물을 기리며 주전 586년의 솔로몬 성전의 함락과 주후 70년 헤롯 성전의 훼파를 기억하며 아빕월 9일 꼭 이 애가를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예루살렘 서쪽 벽 소위 <통곡의 벽> 앞에서 매주 금요일 금식을 하며 이 예레미야 애가를 읽습니다.

배경
이 애가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다 왕국의 국가 체제와 성전 체제가 다 무너졌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며 지은 탄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애가가 단순히 민족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함락만을 슬퍼한 노래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이 애가를 통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린 유다 백성의 죄악(1:8, 4:6)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2:1-10, 3:1-18).

구성
예레미야 애가는 <슬픔의 노래>지만 비통한 탄식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궁하신 자비와 긍휼에 의지하여(3:22-23) 죄악된 삶을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면(3:40-41) 이전의 찬란했던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기쁨과 소망의 노래로 끝을 맺습니다(5:19-21).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끝이 없으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정과 형편에 처해 있든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반드시 기쁨과 소망이 가득찬 영광스런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애가를 통해 전달하려는 예언의 핵심일 것입니다.
부디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 선지자와 함께 울고 함께 소망을 보는 큰 은혜와 감동있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추종자를 감동시키는 리더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빠르다.
강타자는 투수의 볼을 읽어 자기 힘과 타구에 변화를 주는 사람이다.
훌륭한 씨름 선수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기술에 변화를 준다.
기량이 뛰어난 씨름 선수라면 힘이 조금 약해도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리더는 추종자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리더란 상대의 마음을 살펴 추종자를 따르게 하는 작업이다.
-이성희 목사의‘디지털 목회 리더쉽’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동물입니다.
리더는 이성에 호소하지만
이지적인 말만 가지고는 추종자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인간의 생각을 이해하고
추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져야합니다.
‘고객 만족‘이던 유통업계의 구호가
‘고객 감동‘으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리더쉽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기술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Surely it was for my benefit that I suffered such anguish. In your love you kept me from the pit of destruction; you have put all my sins behind your back.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당신에게 신앙의 동역자가 얼마나 있습니까 - 로마서 16:1~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드디어 사도바울이 사랑으로 써내려간 로마서의 마지막 페이지 앞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쓴 편지의 마지막 대목에서 로마교회에 있는 교우들 중에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과 로마교회에 추천할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아마도 오늘 로마서 16장에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이 바울이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의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이름만으로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명의 사람들과 교제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주님의 일을 삶속에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평생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다른 교우들과의 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서로 말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직분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다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인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혼자서 신앙생활을 했을 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속에서 다른 교우들과 관계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내가 얼마나 입으로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서 16장에 거명한 사람들 모두가 바울에게 언제나 용기와 힘을 준 사람들만은 아날 것입니다. 때로는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선교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니, 때로는 바울의 행동에 대해서 권고했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둘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앙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함께 했던 교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때로는 책망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 바울처럼 당신에게 신앙의 동역자가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때로는 그 동역자가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그 동역자가 당신에게 책망의 말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역자를 통해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조금 더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동역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미련한 자의 등에는


수준 낮은 성도는 말을 못 알아듣는다.
하나님께서 채찍을 가해야 깨닫는다. 말에게
‘너 빨리 달리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는다. 죽인다.’해도 소용없다.
말씀으로 일러도 안 되는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채찍이 필요하다,
짐승과 같은 사람은 인격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백성은 몽둥이로 다스리신다.
- 김기원 목사의 ‘지혜롭게 살아라’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은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을
죄악의 도장을 육체에 찍지 말아야합니다.
나무에 박힌 못을 뽑으면 못은 빠지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평생 후회할 일을 순간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분명할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가 기다립니다.



글쓴이 : 김옥엽 서울신학교 ,한국여자신학교교수
종로구 숭인문화센터 시문학교실 강사
한국문인협회 정책기획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소명을 이루는 삶 - 시편 46:7-11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행복에는 3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를 믿어주고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원이 내 마음에 있어야 됩니다. 즉 나의 존재 의미를 알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사는 삶을 가리켜 소명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부르심이기에 그 분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다른 관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부르심 앞에서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발견해야 합니다. 이 소명 앞에 개인적으로 결단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소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가정생활과 직장과 사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소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일들을 감당하느라 너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도움과 구원을 기다리며 나에게 말씀하심을 듣기 위해서 내 생각 내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7절과 11절에도 말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씀은 모든 권세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분이 나를 향한 음성이 무엇일까를 중요하게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세상소리에 너무 민감하고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들로 복잡해 있을 때에는 중요한 소리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삶속에 분명히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주님의 메시지를 듣기 우하여 주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시고 선한 길로 가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에 음성을 내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향하신 부르심에 소명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음성 듣고 소명을 확신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드리며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적용]
- 나를 향한 부르심을 확신하고 있나요? 조용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 소명을 향한 부르심의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히 주님 앞에 엎드려 봅시다.
- 소명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려 놓아야할 것들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기도]
주 하나님,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의 부르심 앞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 아름다운 소명 이루기 위해 가정생활과 직장과 사업을 잘 경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예배 장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말씀은 미래의 지정학정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장소의 특별한 신성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단지 한 민족이 자기들끼리만 하나님을 섬기던 시대를 지나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보편적인 믿음의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면 그 말씀이 거기에 거함으로 그곳이 신성해질 수 있다.
-대린 패드릭&마크 디바인의 [나의 사랑하는 교회] 중에서-

초대교회의 시작은 성령이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부터입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안에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있는 곳이면, 복음이 들려지는 곳이면 그곳에서 누구든 예배합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우리의 신을 벗어놓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시작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Here is a trustworthy saying that deserves full acceptance: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of whom I am the worst.in his body is done with sin.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종말과 재림 - 마가 13:24-27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구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는 종말을 믿고 종말을 대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도 종말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대우주의 파국, 곧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적 종말에서 다양한 이단이 발생하는데, 대부분이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여기에 미혹된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물론 “도적같이” 오실 것입니다. 그 시와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살전5:1-2). 그러나 재림의 징조는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과 지진과 대재앙을 동반하는 무서운 대환난입니다(마태24장). 계시록에 의하면 이 전무후무한 대환난 때에 적그리스도가 판을 칠 것입니다.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임할 것입니다(계16:16). 이러한 대환난의 징조를 성급하게 재림의 전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지금도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로 인한 많은 재앙이 일어나며 여러 전쟁이 발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적그리스도로 의심받았던 많은 인물이 있었습니다(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 등등). 그러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3차 대전이 아마겟돈 전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대환난 후에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강림하실 것입니다(살전 5:2). 그때 휴거가 발생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세대 아니면 그 다음 세대에 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처럼 우주적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재림의 시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짜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여러 이단은 각종 엉터리 데이터를 대면서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마귀의 책략일 뿐입니다. 그 일시는 아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이 아십니다(32-33). 그러므로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33, 35, 37). 세상 잠에 취하고 재미에 정신 빠져서는 안됩니다. 더 근신하며 준비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마라나타! 곧,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재림의 약속은 두려움과 공포의 언약이 아니라 위로의 말씀입니다(살전 4:18).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적용]
-주님의 재림 전에 어떤 징조가 있는지 성경에서 찾아보고 연구해 봅시다.
-주님의 재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정리함으로 잘못된 종말론으로부터 자신을 지킵시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로 나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준비하십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를 살게하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깨어 근신하여 기도함으로 말씀과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각을 주시어 성령충만한 가운데 담대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맡은 일에 죽도록 충성케 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며 살아가도록 사용해 주시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교회의 사명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속에 ‘흩어진’ 이유는,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씨앗을 피워낸 결국 거기에 하늘의 열매들을 내게 하려 하심이다. 이 사명을 잊는 교회마다, 성도마다, 세상이 받는 심판을 함께 받게 될 것이다. 이 사명에 성공하는 교회마다, 성도마다, 그들 속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처럼 영영히 살고 세세토록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채영삼의 [지붕없는 교회] 중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교회되어 세상속에 살아있는 말씀되어 파송 받은 자들입니다. 흩어진 나그네 되어,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어 영원히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명은 심겨진 말씀을 잘 간직하여 삶속에 열매 맺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세상으로 옮겨놓는 성도의 선교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시드기야의 배신 - 렘 52:1-16
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4.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5.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6.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7.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그 성에서 나가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들이 아라바 길로 가더니
8.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9.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
10.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13.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4. 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15.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16.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은 모두 끝나고, 이제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갑니다. 내용은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보충자료인데 시간적으로는 바벨론의 패망보다 한참 앞선 일이지만 미진하다고 생각하여 예레미야서를 마무리하며 좀 더 보완한 것입니다.

악을 행한 왕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시드기야 왕은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BC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옹립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후에 그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에 의지하여 바벨론을 견제하려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이 됐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3절). 그러나 사실 그것은 표면적 요인에 불과하고 보다 근본적인 유다의 패망 원인은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대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유다를 11년간 통치한 참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더라>(왕하 23:37). 그런데 시드기야는 그 여호야김보다 더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되 바벨론 군대로 하여금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하셔서 극심한 기근에 빠뜨려 고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보십시오. 백성들은 그렇게 성안에 갇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왕은 제 혼자 살겠다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성을 탈출하다 결국 바벨론 군대에 발각돼 체포당합니다.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9절).

죽는 날까지 옥에 갇힌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11절).
시드기야 왕의 배신에 대한 바벨론 왕의 응징은 실로 끔찍했습니다. 몰래 달아나다 여리고 평지에서 뒤쫓던 바벨론 군대에 붙잡힌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 심문을 당했고, 시드기야 왕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다 살해를 당했으며 유다의 고관들도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을 뽑힌 채 놋사슬에 결박돼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과 응징은 철저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13-14절). 배신은 그게 일 개인이든 국가든 치명적인 결과를 부릅니다. 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과거 유다의 역사에서 보듯 반드시 끔찍한 비극을 부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브루투스, 유다와 같은 배신자들이 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을 져버리면 참혹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교회의 사명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속에 ‘흩어진’ 이유는,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씨앗을 피워낸 결국 거기에 하늘의 열매들을 내게 하려 하심이다. 이 사명을 잊는 교회마다, 성도마다, 세상이 받는 심판을 함께 받게 될 것이다. 이 사명에 성공하는 교회마다, 성도마다, 그들 속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처럼 영영히 살고 세세토록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채영삼의 [지붕없는 교회] 중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교회되어 세상속에 살아있는 말씀되어 파송 받은 자들입니다. 흩어진 나그네 되어,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어 영원히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사명은 심겨진 말씀을 잘 간직하여 삶속에 열매 맺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세상으로 옮겨놓는 성도의 선교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시드기야의 배신 - 렘 52:1-16
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4.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5.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6.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7.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그 성에서 나가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들이 아라바 길로 가더니
8.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9.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
10.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13.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4. 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15.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16.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은 모두 끝나고, 이제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갑니다. 내용은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보충자료인데 시간적으로는 바벨론의 패망보다 한참 앞선 일이지만 미진하다고 생각하여 예레미야서를 마무리하며 좀 더 보완한 것입니다.

악을 행한 왕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시드기야 왕은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BC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옹립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후에 그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에 의지하여 바벨론을 견제하려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당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이 됐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3절). 그러나 사실 그것은 표면적 요인에 불과하고 보다 근본적인 유다의 패망 원인은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절)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대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유다를 11년간 통치한 참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더라>(왕하 23:37). 그런데 시드기야는 그 여호야김보다 더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되 바벨론 군대로 하여금 1년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하셔서 극심한 기근에 빠뜨려 고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보십시오. 백성들은 그렇게 성안에 갇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왕은 제 혼자 살겠다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성을 탈출하다 결국 바벨론 군대에 발각돼 체포당합니다.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9절).

죽는 날까지 옥에 갇힌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11절).
시드기야 왕의 배신에 대한 바벨론 왕의 응징은 실로 끔찍했습니다. 몰래 달아나다 여리고 평지에서 뒤쫓던 바벨론 군대에 붙잡힌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 심문을 당했고, 시드기야 왕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다 살해를 당했으며 유다의 고관들도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을 뽑힌 채 놋사슬에 결박돼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과 응징은 철저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13-14절). 배신은 그게 일 개인이든 국가든 치명적인 결과를 부릅니다. 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과거 유다의 역사에서 보듯 반드시 끔찍한 비극을 부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브루투스, 유다와 같은 배신자들이 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사랑을 져버리면 참혹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는 일이 최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없이는 무슨 일도 우리에게 닥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역경이 없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어떤 역경도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복을 앗아갈 수 없으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스티븐 스콧의 [사명을 찾으면 인생이 달라진다] 중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생깁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간다면 더 이상의 두려움은 우리에게서 달아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앗아갈 만큼 두려움은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은 끝까지 사명 감당하며 주의 길을 갑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가면, 그 길 끝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로마서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For we know that since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he cannot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mastery over him.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큰 파멸의 소리 - 렘 51:54-64
54. 바벨론으로부터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도다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리도다
55.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사 그 큰 소리를 끊으심이로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
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59.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
<바벨론으로부터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도다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리도다>(54절).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들리던 무리들의 큰 소리, 흥청망청 떠들며 즐기던 온갖 소리들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온 세상의 칭찬과 영광과 동경을 한 몸에 받던 나라나 성읍도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끊으시는 순간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41절).

보복의 하나님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56절).
<보복의 하나님,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란 곧 <상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과 꼭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속성은 바로 <공의>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상 주시고 벌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 속성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절대적인 구원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음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죄도 간과하시지 않지만 이미 그 대가를 치룬 죄에 대해서는 절대 그 책임을 다시 묻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선에 대해서도 반드시 응분의 보상을 베푸시고 믿음에 대해서도 반드시 구원을 보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게 바로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바벨론의 심판은 바로 이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정한 재판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 바벨론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58절).

유브라데에 던진 책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63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패망에 관해 예언한 모든 말씀을 책으로 엮어 스마야라는 사람을 통해 유브라데에 던지라고 명한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심판과 저주에 관한 예언을 다 낭독한 후 책에 돌을 달아 유브라데 강에 던지는 퍼포먼스 장면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이제 곧 그렇게 침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연출이셨습니다.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64절). 이로써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에 대한 긴 예언이 모두 끝났습니다. 제 아무리 강한 나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 결국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이 바벨론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62절).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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