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勝地(십승지·천재지변에도 안전한 피난처 10곳) 찾아 떠난 길, 퇴계 발자취 만나 평화 얻네
입력 : 2014.09.25 04:00
儒佛仙 찾아 떠나는 백두대간 인문여행
- 불교의 요람이자 퇴계의 성지인 봉화 청량산의 청량사. 기암괴석 암산에 호젓하다./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돼지 등뼈를 가라앉힌 이북식 콩비지찌개를 권하며, 십승지사업단장인 동양대 전 부총장 이도선 교수가 말했다.
"풍기 인구의 40%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입니다. 조선 말, 그리고 6·25때. 이 식당 주인도 마찬가지고요. 풍기가 십승지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숫자죠."
경북 내륙의 식당에서 만나는 북한식 콩비지찌개. 얼핏 어긋나 보이는 이 기이한 조합의 뿌리에는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피난처 10곳. 조선시대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내려온 대표적 예언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땅이다.
가을 기행을 경북으로 이끄는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유불선을 키워드로 한 인문학 기행이라면 어떨까. 이름하여 백두대간 인문 여행.
- 금선정의 진정한 주인은 물이다. 고즈넉한 정자 아래 계곡의 물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십승지 중 1번지 풍기 금계리
왜구나 오랑캐의 잦은 침략으로 지쳐 있던 백성들에게 십승지는 살고 싶은 땅이었고, 실제로 십승지를 찾아 떠나는 이도 많았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판타지지만, 각박한 현실에 지친 백성들은 삭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정감록'이 서술하듯 십승지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땅이다. 붉게 익어가는 사과와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코스모스 시골길을 10여분 달리니 갑자기 확 트인 넓은 고원이 나타난다. 지금은 경북 항공고등학교 실습장으로 쓰고 있는 금계리의 땅이다. 금계리(金鷄里)는 이중환(1690~1752)의 '택리지'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고 서술된 땅. 항공고 실습장에 등 대고 서니, 저 아래 풍기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평안하고 평화롭다. 풍기 최초의 여성 읍장인 주정례 읍장이 한마디를 보탠다. "천재지변도 풍수해도 없는, 재난에서 가장 안전한 땅이 풍기랍니다."
차로 10여분을 달려 풍기가 자랑하는 금선정(錦仙亭)에 이른다. 조선 중기 문신인 금계 황준량(1517~1563)의 유지를 받들어 지었다는 정자다. 소백산 자락과 소백산 물줄기가 만나는 곳. 소나무 군락도 빼어나지만, 이곳의 진정한 주인은 물이다. 모든 소음을 빨아들여 진공 상태로 만드는 계곡의 물소리가 엄숙하다 못해 장엄하다. 빼어난 경치의 명승(名勝)이자, 경승(景勝)이다.
-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퇴계의 산이자 불교 요람 봉화 청량산
다시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봉화 청량산에 이른다. 입으로 소리만 내도 맑고 시원해지는 이름, 청량(淸凉). 이 산에는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청량사가 있다. 작은 금강산이라는 이 기암괴석 암산은 불교의 요람이자 유학의 성지. 퇴계 이황(1501~1570)은 청량산 열두 봉우리를 육육봉(六六峯)으로 불렀고, 주자의 중국 무이산에 빗대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았다. 당시 풍기 군수이던 주세붕이 청량산 유람 후 제출한 기행문을 필두로 청량산 기행문 100여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금강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봉화에 부임한 지 두 달 됐다는 이동열 부군수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청량산 장인봉에 뒤편에 서 있는 비석 '등청량정'(登淸凉頂)이다. 주세붕(1495~1554)은 이 산에 오른 뒤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네.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라고 썼다.
청량산 박물관의 정민호 학예연구사는 "퇴계를 닮아 외유내강형 산"이라고 청량산을 요약했다. 육육봉 20여 암자를 전전하며 공부했다는 퇴계.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퇴계의 자취를 좇는 성지 순례 으뜸이자, 유학의 성지다. 청량사의 크고 작은 장독 50여개가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오(伍)와 열(列)을 맞춰 나란히 섰다. 청량산의 단풍은 10월 셋째 주 정도가 한창이라는 게 주지 지현 스님의 귀띔. 저 아래 봉화에서는 한여름이었지만, 이곳 산 중턱 청량사는 이미 가을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평지보다 3~4도는 낮다는 청량사의 가을이 한없이 맑고 시원하다.
여행 정보
'정감록'은 1.경상북도 영주시 풍기(금계마을) 2.경상북도 봉화 춘양 3.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4.전라북도 남원 운봉 5.경상북도 예천 금당실 6.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마곡 7.강원도 영월 정동쪽 상류 8.전라북도 무주군 무풍 9.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10.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을 십승지로 꼽고 있다.
이북식 콩비지(7000원)는 풍기 서문가든(054-635-2415). 풍기 특산처럼 되어 있는 인삼불고기(1만3000원·사진 오른쪽 )도 삼의 풍미 진한 특식이다. 봉화에서는 은하숯불회관(054-673-1303)을 추천한다. 한약재를 먹이로 쓴 한우, 봉화 한약우 전문점이다. 한약우 불고기 1인분 1만원, 송이 불고기는 1인분 2만원. 봉화 송이축제<사진 왼쪽>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봉화에는 전통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고택이 많다. 토향 고택(054-673-1112)을 추천한다. 풍기에서는 소백산온천리조트(054-604-1700)가 으뜸이다. 호텔 수준의 객실에, 야외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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