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기습상륙, 문산·광덕산 루트로 수도권 3각 공격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9.14 00:24 / 수정 2014.09.14 08:48
김정은 '2015 통일대전' 내용은
중앙SUNDAY가 입수한 ‘북한 무인기 침투와 2015 통일대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통일대전은 서해안에 5000명 규모의 특수전 부대의 기습 상륙과 함께 문산·광덕산 축선을 핵심 공격로로 삼는다. 수도권 함락을 위해 세 방향에서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번 북한 무인기 항로를 통해 파악된 특이점은 그동안 북한군이 사용하지 않았던 광덕산(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축선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 대한 전략적 비중을 높였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문산 축선과 함께 또 다른 핵심 공격 축선을 광덕산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루트로 정한 것이다. 우리 정보 당국도 이미 북한군이 경북 상주를 중간 목표로 삼고 부산을 점령하는 대규모 연합훈련을 실시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고서는 삼척 무인기가 정찰한 것으로 추정되는 광덕산 축선 공격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전략적 의미에 주목했다. 북한군이 한강 이남에서 한·미 연합군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루트로 활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축선은 우리 3군과 1군 방어구역의 경계지역으로 상대적으로 돌파하기 쉬울 뿐 아니라 남진의 주요 통로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루트를 통해 남침한 병력은 문산 축선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서해안을 통해 상륙한 특수부대를 동쪽에서 지원하게 된다.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 2사단은 춘천을 조기 점령해 경춘국도를 통해 서울 동쪽으로 이동, 서울에 주둔한 한국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2사단을 춘천에서 격파해 북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줬다. 반면 중공군은 1951년 4월 광덕산 산악 접근로를 통해 가평을 점령하고 경춘가도를 통해 서울 동쪽 인근까지 진격했다.
보고서는 또 “서해 5도 지역 정찰은 북한이 서해를 통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실제 북한은 90년대부터 평양 방어를 맡은 4군단을 전시에는 서해안 일대의 북한군 기습 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90년대에 김포·인천·남양만 등 수도권 서쪽 일대를 대규모 기습 상륙작전 후보지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5000명에 달하는 특수전 부대를 공기부양정·고속상륙정 등으로 실어 날라 상륙시킨다는 작전이다.
상륙한 병력은 김포·문산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연계해 한·미 연합군의 주력을 한강 이남에서 섬멸한다는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전략 실행을 위해 북한군은 문산과 서해 5도 일대를 실제로 무인기로 정찰했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북한은 이미 90년대 중반 동해안 침투상륙작전을 위한 잠수함 작전체계를 완성했다. 이후 “서해에도 잠수함 작전체계를 구축했으며, 2010년 천안함 폭침 도발은 대규모 기습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시험한 것”이라며 “북한이 성공적으로 이를 완수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상륙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북한 무인기 3대의 정찰 경로는 6·25전쟁 당시 북한의 침공 루트와도 거의 일치한다. 북한은 6·25전쟁 때 서울 북방, 춘천, 동해안 등을 통해 남침했다. 1군단이 서울을 집중 공격하고 춘천을 돌파한 2군단의 주력은 대전과 대구로 진격했다. 전력 손실을 크게 본 한국군을 소백산맥 이북에서 포위해 섬멸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또 동해안을 돌파한 인민군은 바로 부산으로 진격해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웠다. 북한은 6·25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로망과 군 장비의 발전으로 속전속결이 더욱 용이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6·25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통일대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미군이다. 6·25 당시 북한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미국의 한국 지원에 2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직후 바로 개입했으며, 이 때문에 6·25는 북한의 당초 계획과는 크게 어긋나게 진행됐다.
북한은 통일대전에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가장 달라진 게 핵미사일의 존재다. 미군의 지원을 억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 위협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침을 감행하더라도 미군이 북한군의 핵무기를 우려해 전쟁에 적극 개입하진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군이 최악의 경제난 속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처음 입수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다. 당시 한·미 정보 당국은 수많은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전력 구조 및 군 구조 개편과 함께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통신 선로 지중화 ▶기습 공격을 위한 대규모 군사력 전진 배치 ▶미군의 첨단 감시장비에 대한 특별대비조치 등이 김정일의 특명으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은 첩보·정보 교류를 정례화하고 북한군의 쿠데타 가능성, 핵무기·ICBM 개발 동향과 한반도 전쟁 양상의 변화 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해 왔다.
한·미 간 북 남침 정보 공조 흔들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군 당국은 향후 10여 년 내에 북한이 핵무기와 ICBM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당시 보고서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에다 대화를 추구하던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기조와 맞물려 북한의 전면전에 대한 양국 정보 공조체제는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후 9·11 테러가 터지자 미국 국방정책은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했다. 그 결과 북한의 전면전 전략에 대한 한·미 정보 공조는 거의 단절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때부터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이 경제난으로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전쟁 시나리오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한국에 결정적인 정보를 안겨 줬다. 홍석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는 “한국이 미국과 달리 북한의 최근 상황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으로 인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일의 지원 차단, 전방 방어선 돌파, 서울 점령, 속도전, 부산 점령 등과 관련된 북한의 전략 해석을 두고 한·미 양국이 견해 차를 보였다고 한다. 홍 대표는 “이는 미국이 90년 초반 이후 북한의 군사적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의 강성대국론과 판가리 전략
북한이 2015 통일대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김정일이 98년 9월 국방위원장에 오른 직후다. 김정일은 본격적인 강성대국 건설과 함께 새로운 남침 계획을 추진했다. 김정일 시대의 야심작 중 하나인 북한의 핵전쟁 전략으로 불리는 ‘판가리 전략’도 이때 등장했다. 이는 한·미 연합전력의 우세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이 90년대 국제적 고립과 가뭄 등 자연재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판가리 전략을 위한 북한군의 전력구조 개편은 지속됐다. 판가리 전략은 북한과 해외 언론을 통해서도 전해졌다. “미제와 판가리 결전 준비 차원의 북한식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노동신문 99년 7월 7일), “한반도에 미군을 증강할 경우 선제공격을 할 것”(BBC 2003년 2월 6일), “미국의 핵 공격 땐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 것”(노동신문 2004년 9월 4일) 등이 대표적이다.
황장엽 전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핵전쟁 전략을 보고하면서 공개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결국 김일성·정일 부자는 각자의 역할을 나눴다. 김일성은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김정일은 새로운 대남 군사전략을 맡아 비밀리에 핵전쟁 전략을 수립했다.
이 사실은 90년대 중반 김일성대학에서 비공개로 한 김정일의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김일성)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 부문을 경제관료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조선반도의 판세를 한번에 뒤집을 군사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제반 분야에서의 성과가 미흡하다… 검열을 강화하겠다.” 북한은 실제 90년대 중반 도 단위 자력갱생을 지시한 뒤 예산을 군사력 강화 및 재편성과 특권층·군부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김정일의 강성대국 건설기간(1998~2012년)에 핵과 비대칭 전력을 크게 증강시켰으며 핵 전면전 계획을 완성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사정거리 3000㎞ 안팎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야전에 배치했으며 다양한 탄두를 소형화해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했다.
2012년 우리 『국방백서』는 북한군의 전력구조가 크게 개편됐음을 확인했다. 군단급 부대는 21개에서 15개로 축소됐으며 지상군 사단은 63개에서 90개로 늘었다. 포병군단을 해체해 사단으로 개편했으며, 군장비를 전방으로 배치했다. 특수전 부대도 3만 명(80년대)→10만 명(90년대)→20만 명(2000년대)으로 규모를 키웠다. 공기부양정과 헬리콥터 기지를 확충해 남침을 용이하게 했으며 늘어난 미사일을 운용하는 미사일 지도국을 군단급 부대로 증편하고 그 아래에 스커드·노동·무수단미사일 사단을 뒀다.
김정은도 판가리 전략에 깊이 관여하면서 전쟁 준비 완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의 특성상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2009년 9월 전후에 발생한 주요 도발 및 사건에서 그가 깊게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비롯해 천안함 폭침(2010년 5월),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등이 그런 사례라는 것이다.
북한의 전쟁 준비는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 갑작스레 사망함으로써 김정은으로 이어진다. 강성대국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던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 핵탄두를 소형화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정은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은 “국방에서의 자위를 위해 경제 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당대표회의·66년 10월)의 김정은 식 버전이다. 이는 또한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보유를 추진한 김정일의 판가리 전략을 계승한 것이다.
김정은,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무인기 침투 도발을 감행한 이유는 김정은이 2013년 3월 선포한 ‘우리 식 전면전’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김정은은 “전선부대들을 비롯, 육군·해군·항공 및 반(反)항공군, 전략로케트군 장병들이 우리 식의 전면전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전면전쟁 계획을 최초로 공개했다.
우리 식 전면전의 핵심은 핵미사일이다. 이를 사용해 미국의 증원과 일본의 지원을 차단하고 대량살상무기(WMD)·장사정포·특수전부대와 재편성된 재래식 전력으로 미군의 증원 이전 3~5일 이내에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무력통일 의지는 그동안의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며 작접 탱크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겠다”(2011년), “한번은 반드시 적들과 싸워야 한다” “3년 내 혁명 무력으로 통일할 것”(2013년), “2015년 통일대전을 준비하라” “조선혁명 완수를 위해 적들과 총결사전을 벌이자”(2014년)…. 김정은은 올해 초 군지휘관 회의에서도 “2015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통일대전을 위해 전략물자를 최대한 마련하고 언제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다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취재팀=채인택 논설위원, 한경환·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보고서는 “이번 북한 무인기 항로를 통해 파악된 특이점은 그동안 북한군이 사용하지 않았던 광덕산(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축선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 대한 전략적 비중을 높였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문산 축선과 함께 또 다른 핵심 공격 축선을 광덕산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루트로 정한 것이다. 우리 정보 당국도 이미 북한군이 경북 상주를 중간 목표로 삼고 부산을 점령하는 대규모 연합훈련을 실시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고서는 삼척 무인기가 정찰한 것으로 추정되는 광덕산 축선 공격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전략적 의미에 주목했다. 북한군이 한강 이남에서 한·미 연합군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루트로 활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축선은 우리 3군과 1군 방어구역의 경계지역으로 상대적으로 돌파하기 쉬울 뿐 아니라 남진의 주요 통로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루트를 통해 남침한 병력은 문산 축선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서해안을 통해 상륙한 특수부대를 동쪽에서 지원하게 된다.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 2사단은 춘천을 조기 점령해 경춘국도를 통해 서울 동쪽으로 이동, 서울에 주둔한 한국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2사단을 춘천에서 격파해 북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줬다. 반면 중공군은 1951년 4월 광덕산 산악 접근로를 통해 가평을 점령하고 경춘가도를 통해 서울 동쪽 인근까지 진격했다.
보고서는 또 “서해 5도 지역 정찰은 북한이 서해를 통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실제 북한은 90년대부터 평양 방어를 맡은 4군단을 전시에는 서해안 일대의 북한군 기습 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훈련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90년대에 김포·인천·남양만 등 수도권 서쪽 일대를 대규모 기습 상륙작전 후보지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5000명에 달하는 특수전 부대를 공기부양정·고속상륙정 등으로 실어 날라 상륙시킨다는 작전이다.
상륙한 병력은 김포·문산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연계해 한·미 연합군의 주력을 한강 이남에서 섬멸한다는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전략 실행을 위해 북한군은 문산과 서해 5도 일대를 실제로 무인기로 정찰했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북한은 이미 90년대 중반 동해안 침투상륙작전을 위한 잠수함 작전체계를 완성했다. 이후 “서해에도 잠수함 작전체계를 구축했으며, 2010년 천안함 폭침 도발은 대규모 기습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시험한 것”이라며 “북한이 성공적으로 이를 완수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상륙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북한 무인기 3대의 정찰 경로는 6·25전쟁 당시 북한의 침공 루트와도 거의 일치한다. 북한은 6·25전쟁 때 서울 북방, 춘천, 동해안 등을 통해 남침했다. 1군단이 서울을 집중 공격하고 춘천을 돌파한 2군단의 주력은 대전과 대구로 진격했다. 전력 손실을 크게 본 한국군을 소백산맥 이북에서 포위해 섬멸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또 동해안을 돌파한 인민군은 바로 부산으로 진격해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웠다. 북한은 6·25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로망과 군 장비의 발전으로 속전속결이 더욱 용이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6·25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통일대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미군이다. 6·25 당시 북한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미국의 한국 지원에 2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직후 바로 개입했으며, 이 때문에 6·25는 북한의 당초 계획과는 크게 어긋나게 진행됐다.
북한은 통일대전에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가장 달라진 게 핵미사일의 존재다. 미군의 지원을 억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 위협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침을 감행하더라도 미군이 북한군의 핵무기를 우려해 전쟁에 적극 개입하진 않을 것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군이 최악의 경제난 속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처음 입수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다. 당시 한·미 정보 당국은 수많은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전력 구조 및 군 구조 개편과 함께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통신 선로 지중화 ▶기습 공격을 위한 대규모 군사력 전진 배치 ▶미군의 첨단 감시장비에 대한 특별대비조치 등이 김정일의 특명으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은 첩보·정보 교류를 정례화하고 북한군의 쿠데타 가능성, 핵무기·ICBM 개발 동향과 한반도 전쟁 양상의 변화 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해 왔다.
한·미 간 북 남침 정보 공조 흔들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군 당국은 향후 10여 년 내에 북한이 핵무기와 ICBM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당시 보고서는 햇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에다 대화를 추구하던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기조와 맞물려 북한의 전면전에 대한 양국 정보 공조체제는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후 9·11 테러가 터지자 미국 국방정책은 테러와의 전쟁에 집중했다. 그 결과 북한의 전면전 전략에 대한 한·미 정보 공조는 거의 단절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때부터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이 경제난으로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전쟁 시나리오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한국에 결정적인 정보를 안겨 줬다. 홍석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는 “한국이 미국과 달리 북한의 최근 상황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으로 인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미·일의 지원 차단, 전방 방어선 돌파, 서울 점령, 속도전, 부산 점령 등과 관련된 북한의 전략 해석을 두고 한·미 양국이 견해 차를 보였다고 한다. 홍 대표는 “이는 미국이 90년 초반 이후 북한의 군사적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의 강성대국론과 판가리 전략
북한이 2015 통일대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김정일이 98년 9월 국방위원장에 오른 직후다. 김정일은 본격적인 강성대국 건설과 함께 새로운 남침 계획을 추진했다. 김정일 시대의 야심작 중 하나인 북한의 핵전쟁 전략으로 불리는 ‘판가리 전략’도 이때 등장했다. 이는 한·미 연합전력의 우세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이 90년대 국제적 고립과 가뭄 등 자연재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판가리 전략을 위한 북한군의 전력구조 개편은 지속됐다. 판가리 전략은 북한과 해외 언론을 통해서도 전해졌다. “미제와 판가리 결전 준비 차원의 북한식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노동신문 99년 7월 7일), “한반도에 미군을 증강할 경우 선제공격을 할 것”(BBC 2003년 2월 6일), “미국의 핵 공격 땐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 것”(노동신문 2004년 9월 4일) 등이 대표적이다.
황장엽 전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핵전쟁 전략을 보고하면서 공개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자”고 건의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결국 김일성·정일 부자는 각자의 역할을 나눴다. 김일성은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김정일은 새로운 대남 군사전략을 맡아 비밀리에 핵전쟁 전략을 수립했다.
이 사실은 90년대 중반 김일성대학에서 비공개로 한 김정일의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김일성)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 부문을 경제관료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조선반도의 판세를 한번에 뒤집을 군사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제반 분야에서의 성과가 미흡하다… 검열을 강화하겠다.” 북한은 실제 90년대 중반 도 단위 자력갱생을 지시한 뒤 예산을 군사력 강화 및 재편성과 특권층·군부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김정일의 강성대국 건설기간(1998~2012년)에 핵과 비대칭 전력을 크게 증강시켰으며 핵 전면전 계획을 완성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사정거리 3000㎞ 안팎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야전에 배치했으며 다양한 탄두를 소형화해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했다.
2012년 우리 『국방백서』는 북한군의 전력구조가 크게 개편됐음을 확인했다. 군단급 부대는 21개에서 15개로 축소됐으며 지상군 사단은 63개에서 90개로 늘었다. 포병군단을 해체해 사단으로 개편했으며, 군장비를 전방으로 배치했다. 특수전 부대도 3만 명(80년대)→10만 명(90년대)→20만 명(2000년대)으로 규모를 키웠다. 공기부양정과 헬리콥터 기지를 확충해 남침을 용이하게 했으며 늘어난 미사일을 운용하는 미사일 지도국을 군단급 부대로 증편하고 그 아래에 스커드·노동·무수단미사일 사단을 뒀다.
김정은도 판가리 전략에 깊이 관여하면서 전쟁 준비 완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의 특성상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2009년 9월 전후에 발생한 주요 도발 및 사건에서 그가 깊게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비롯해 천안함 폭침(2010년 5월),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등이 그런 사례라는 것이다.
북한의 전쟁 준비는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 갑작스레 사망함으로써 김정은으로 이어진다. 강성대국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던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 핵탄두를 소형화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정은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은 “국방에서의 자위를 위해 경제 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당대표회의·66년 10월)의 김정은 식 버전이다. 이는 또한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보유를 추진한 김정일의 판가리 전략을 계승한 것이다.
김정은,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무인기 침투 도발을 감행한 이유는 김정은이 2013년 3월 선포한 ‘우리 식 전면전’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김정은은 “전선부대들을 비롯, 육군·해군·항공 및 반(反)항공군, 전략로케트군 장병들이 우리 식의 전면전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전면전쟁 계획을 최초로 공개했다.
우리 식 전면전의 핵심은 핵미사일이다. 이를 사용해 미국의 증원과 일본의 지원을 차단하고 대량살상무기(WMD)·장사정포·특수전부대와 재편성된 재래식 전력으로 미군의 증원 이전 3~5일 이내에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무력통일 의지는 그동안의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며 작접 탱크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겠다”(2011년), “한번은 반드시 적들과 싸워야 한다” “3년 내 혁명 무력으로 통일할 것”(2013년), “2015년 통일대전을 준비하라” “조선혁명 완수를 위해 적들과 총결사전을 벌이자”(2014년)…. 김정은은 올해 초 군지휘관 회의에서도 “2015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통일대전을 위해 전략물자를 최대한 마련하고 언제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다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취재팀=채인택 논설위원, 한경환·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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